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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선 넘지 마세요 (75/79)


75화 선 넘지 마세요
2023.08.19.


갑작스러운 결투 신청으로 귀빈실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헤르티안이 열고 들어온 문으로 기사들이며 시종들이 기웃기웃거렸다.


“결투 신청을 하셨다는 게 사실인가?”

“대공 전하께서 황자 전하께 먼저 결투 신청을 하셨다네.”

“황자 전하께서 대공께 결투 신청한 게 아니라 그 반대라고?”

“그렇다니까.”

“근데 왜 결투 신청을 하신 거야?”

“그런 잘 모르겠네.”

모두 결투 신청을 한 이유가 궁금한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헤르티안은 묵묵히 장갑을 벗어 세르디스의 가슴팍에 내던졌다.


“더는 내 앞에서 부인을 모욕하는 꼴을 보이지 말아라.”

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하! 결투 신청으로 내 명예를 추락시키려는 의도인가 보지? 그래 놓고 장갑을 얼굴에 던지지 않는 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보니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군.”

헤르티안은 끊임없이 도발을 이어 나갔다. 아예 작정을 한 사람처럼 말이다.


“참전을 막아준 형님께 결투로 상대하는 게 네가 은혜를 갚는 방식이라면 알겠다. 애초에 네게 진심으로 고맙단 인사를 들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으니까.”

세르디스도 지지 않고 입을 놀렸다.


“황궁에선 병 주고 약을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법이라도 있나 보군.”

“북부에서 살더니 상상력도 깊어졌다?”

말싸움은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더는 이 둘 사이를 되돌리긴 어려워 보였다.


‘대체 다들 왜 이러는지.’

세르디스야 그렇다 쳐도 헤르티안이 직접 맞서는 건 처음이라 난감했다.


“같잖은 말싸움은 이만하고 답하지? 직접 결투에 나올 용기가 없다면 기사단장을 내보내도 좋다.”

진검승부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황자로서 큰 불명예다.

당연히 세르디스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받아들인다.”

 

***



“평소 헤르티안답지 않았어요.”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도발에 의문을 표했다.


“곧 북부로 올라가면 보지 않을 사람이에요. 굳이 결투까지 벌인 이유가 뭐예요?”

헤르티안은 고심이 깊어 보였다.

하지만 결투를 청한 건 후회하지 않는 눈치였다.


“계속 부인을 함부로 대하는 걸 두고 볼 순 없습니다.”

그에게 세르디스는 나와 마찬가지로 줄곧 거슬리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잠깐뿐이에요. 잠깐만 참으면 되는 문제였어요.”

“매번 그렇게 참고만 사실 겁니까?”

“상대는 황자예요. 그리고 이건 헤르티안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부인께선 늘 그렇듯 참고 사실 수 있겠죠. 근데 전 아닙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황자 때문에 부인이 곤란해하고 골치 아파하는 일이라면 아예 싹을 잘라 놓을 겁니다.”

그의 목덜미에 핏대가 솟았다. 당장이라도 세르디스를 찾아가 검을 겨눌 사람처럼 무섭게 화가 나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요?”

“부인께 화를 낸 게 아니라 스스로가 너무 무력해서 화가 났습니다. 제가 힘이 없으니까 부인이 당하고 계신 겁니다. 결투가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다고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이젠 무력하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헤르티안이 시선을 피하며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속내를 직접 말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오늘따라 왜 그래요? 불안하게.”

나보다 불안해 보이는 건 그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의문을 넘어서 의아함마저 들었다.

헤르티안은 마른 입술만 짓씹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와 이야기가 안 좋게 끝났다기엔 그 전부터 말수가 확연히 줄었었다.

그렇다는 건 이유는 딱 하나.


“내가 미처 눈치 못 챈 게 하나 있었군요.”

궁정 의원에서의 일.


“아까 에반이랑 당신만 본 게 있었죠.”

그제야 헤르티안이 고개를 돌렸다.


“부인.”

나는 그를 외면한 채로 거울로 다가가 옷을 내리곤 등을 돌려보았다. 날갯죽지가 잘 보이도록.

하얀 살결 위로 그간 외면해왔던 진실이 드러났다.

언젠가 달라져 있을 문양이 두려워, 꽁꽁 감춰두고 있었다.

내 몸에 새겨진 작은 시한폭탄.


“……문양이 달라졌네요.”

그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았던 봉오리가 자라 큰 꽃잎을 품은 채로 말려 있었고, 둥글게 말려 있던 꽃잎 끝은 조금 벌어졌다.


‘지난번에 쓰러지고 나서부터 묘하게 몸이 안 좋더라니.’

미카엘을 초대한 날, 변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변한 문양을 발견한 난 절망스럽기보다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아까 두 분 다 말이 없으셨군요. 제가 말한 문양이 아니라서. 감추면 제가 계속 모를 것 같았어요?”

“부인께서 알면 고통스러우실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헤르티안은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얼굴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래요. 당신이 날 생각해 주는 마음이라고 쳐요. 그럼 제가 곧 죽을까 봐 황자에게 결투 신청을 하는 게 과연 옳은가요?”

“몸이 좋지 않은 부인을 괴롭히는 걸 두고만 볼 순 없었습니다.”

“제가 원치 않는다면요?”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계속해서 부인을 괴롭힐 겁니다.”

“저 때문에 황족인 두 분이 싸우는 걸 다른 이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그가 입을 다물었다. 더는 나와 싸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면 헤르티안은 계속 날 위해서 나서겠지.’

그만 옷을 올리고 굳어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늘 이게 문제예요.”

나에게 과몰입하는 것.

나는 그에게로 뻗으려던 손을 매정하게 거둬들이곤 더없이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과 나는 계약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전 제 쓸모가 다하면 당신과의 관계를 끊어낼 거예요.”

날 올려다보는 헤르티안의 눈은 늘 그렇듯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앞으로는 선을 지켜주세요.”

그의 말대로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 같은 눈이기에 나는 사달이 나기 전에 막을 의무가 있었다.

모든 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헤르티안의 손이 뒤에서 나를 가뒀다.


 


“선을 넘어도 되냐고 먼저 물어본 건 부인입니다.”

머리 위로 뜨겁게 내려앉는 숨길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제 와 선을 지키라고 하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닙니까?”

축축이 젖어 든 목소리가 나를 옭아매려 했다.

나는 안간힘을 써 그를 밀어냈다.


“그건 당신이 온전히 내 곁에 있어야 내 안전을 보장받으니까.”

그리고 모진 말을 뱉었다.


“우리 계약 사이잖아요. 당신도 제가 죽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땐 저도 당신이 참전하면 제게 위협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도왔을 뿐이에요.”

“부인.”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

마음이 불편했다.

헤르티안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못된 소리를 뱉는 입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거리를 두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질 것이다.


‘헤르티안이 아니라 내가.’

방금도 그의 품에 기대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


“잘한 거야, 아네트.”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도록 귀빈실이 있는 곳을 벗어나 하염없이 걸었다.

넓디넓은 황궁이건만, 이곳에서 내가 마음 편히 쉴 곳 하나 없어 더 지쳐갔다.


‘백작저에 돌아가고 싶다.’

가족들 품에서 즐겁게 웃으며 지냈던 그때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찔끔 흘렀다.

이건 슬퍼서가 아니라 꽉 조이는 구두 때문이었다. 그래도 벗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래야 조금은 잡념이 사라지는 기분이라서. 발끝에 감각이 서서히 사라질 때쯤이었다.


“유화 냄새다.”

지독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향은 기분 나쁘기보다 익숙했다.


“여기가 황궁 화실이구나.”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품에서 나던 향이니까.

어린 화가들을 후원하며 돌보는 일이 어머니의 낙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 품에 안길 때면 좋은 향기 너머에 꼭 이 유화 냄새가 났었지.

나는 그 냄새를 따라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비하면 황궁의 화실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화려했다.

벽을 가득 메운 명화들.

어머니가 경매에서 놓쳤다며 아쉬워하던 작품도 보였다.

그리고 사물을 가운데 두고 둘러싼 고급 이젤과 캔버스도 모두 최고급이다.

그 앞에 앉아 있는 궁정 화가들 또한 어머니가 놓친 인재들이겠거니.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를 발견했다.

내 허리만치 오는 작은 키에 빵모자.

갈색 머리카락에 토실한 볼살.


“럭키가 여기 왜 있지?”

눈을 쓱쓱 비볐다.

문양이 변해서 내 눈도 이상해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가씨?”

나를 돌아보며 맑은 눈을 키우는 꼬마는 럭키였다.


“럭키구나!”

그리웠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그리움에 나는 와락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빵을 먹었는지 그에게서 빵 냄새와 유화 냄새가 가득했다.


“여기에서 너를 보다니. 이름처럼 행운이지 뭐야.”

“예? 예. 근데 아가씨. 밖에 나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럭키는 반가움보단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이름을 갖고 놀리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 그래도 여기엔 너랑 나밖에 없잖아.”

화가들이 함께 쓰는 곳이지만 지금은 모두 자리를 비우고 여기엔 나랑 럭키뿐이었다.

굳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 그래도…… 여긴 이야기하는 공간이 아니니까요.”

럭키가 물감이 묻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네. 다른 사람이 보면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까 나가자.”

나는 그를 내려주고 손을 뻗었다.

평소처럼 착 감겨올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기대했건만.


“저쪽으로 나가요.”

럭키는 내 손을 마주 잡지 않고 쓱 지나쳐 나갔다.

나는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다 울컥한 마음에 입을 가렸다.


‘사춘기구나.’

이제 부끄러움도 알 정도로 다 큰 모양이다.

그래도 저 볼살이 다 빠질 때까지 내겐 그때의 럭키였다.


“같이 가!”

“얼른 오세요.”

나는 어른인 척하는 럭키를 보고 웃으며 따라나섰다.

그가 데려간 곳은 미술용품이 가득 쌓인 용품실이었다. 바닥에 쏟아진 기름에 코가 시큰거릴 만큼 냄새가 지독했다.

럭키는 그걸 발견하고 걸레를 가져와 급히 바닥을 닦았다.

나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럭키를 보고 그의 팔을 당겼다.


“이걸 왜 네가 치우고 있어. 내가 시종들을 불러올 테니까 기다려.”

럭키를 보아하니 이곳의 궁정화가가 된 것 같은데, 특별 취급을 받는 궁정화가가 이런 잡일을 할 필욘 없다.


“그냥 두세요.”

하지만 럭키는 나를 밀어고 꿋꿋이 바닥을 치웠다.

이 지독한 기름이 천을 넘어 그의 작은 손을 전부 적시고, 옷을 더럽힐 만큼 열심히.

나는 바닥에 엎드린 작은 등을 내려다보다가 두 손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청소용 면포를 가져와 그의 옆에 주저앉아 아직도 흥건한 기름을 닦아냈다.


“아, 아가씨. 하지 마세요.”

럭키가 곤란한 얼굴로 나를 말렸다.


“싫거든.”

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곤 다시 바닥을 벅벅 문질렀다.


“제발요! 아가씨.”

“응? 여기 아가씨가 어디 있어? 내 눈엔 꼬마 화가 하나랑 진작 결혼해서 저택을 떠난 부인 하나밖에 안 보이는데?”

“대공비님. 제발 그만해주세요.”

그제야 럭키가 호칭을 바꿔 불렀다.


“대공비 말도 안 듣는 화가 말을 내가 들을 필요 있을까?”

“저는 이걸 치워야 한단 말이에요. 대공비님이랑 저는 다르니까요.”

럭키는 끝까지 손에서 걸레를 놓지 않았다.


“럭키. 너 변했어.”

이런 고집스러운 럭키는 퍽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럭키는 내가 주는 빵을 볼이 빵빵하게 욱여넣으며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였다.

중간중간 가득 찬 배를 통통 두드리며 헤헤 웃는 얼굴로 붓을 들곤 했다.

내 결혼을 축하한다며 자신이 열심히 그린 그림을 선물할 만큼 친한 사이였는데!


“우리 사이좋았잖아?”

어떻게 한순간에 마음이 변한단 말이야?


“사춘기가 무섭긴 무섭구나…….”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 세상이 문제다.

어린아이가 직접 그림을 그려 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 죽는 세상이라, 럭키의 사춘기도 빠르게 찾아온 것이다.


“얼른 일어나세요.”

럭키는 작은 손으로 내 팔을 당겨 일으켰다. 그리고 손에 묻은 더러운 천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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