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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니 (2/210)

#2.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니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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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의 머리를 치고 바닥을 굴러가던 유리 재떨이가 벽에 부딪힌 뒤 멈추었다. 무의식적으로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싸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레이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허리를 숙였다.

16549654681195.jpg“찾으셨습니까.”

다행히 침착하게 목소리가 나왔다. 앞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16549654681201.png“늦었구나. 무얼 하다 이제야 오느냐.”

레이나로선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 거지만 반박은 어불성설이었다. 레이나는 어둠 속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가씨의 실루엣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16549654681195.jpg“죄송합니다.”

고맙게도 허스트 부인이 짧은 변명을 붙여 주었다.

16549654681213.jpg“마님께서 훈화 말씀이 기셨습니다.”

아가씨가 웃었다.

16549654681201.png“아, 그래? 진작 말을 하지.”

말을 할 틈을 주셨어야죠. 생각일 뿐이다. 입은 충실히 답한다.

16549654681195.jpg“죄송합니다.”

똑. 턱에 맺힌 핏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가씨는 긴 다리를 꼬며 거울 너머로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16549654681201.png“주워 와.”

레이나는 얼른 벽 근처에 멈춘 재떨이를 주워서 크리스티나의 곁에 다가갔다. 피가 묻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재떨이를 건네었지만, 크리스티나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다른 곳을 턱짓했다. 그녀가 지목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제야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빗이 눈에 들어왔다. 재떨이를 크리스티나 옆의 테이블 위에 돌려놓은 뒤, 레이나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빗을 주워 들었다. 돌아선 김에 이마에서 흐른 피를 소매의 검은 부분으로 티 나지 않게 닦아내고. 레이나는 다시 크리스티나의 앞으로 나아가 두 손으로 공손히 빗을 건네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받아 들지 않은 채 가만히 내밀어진 빗을 보다가, 그대로 눈만 들어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고급 밀랍 양초가 빚어내는 은은한 조명 아래, 고귀한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레이나의 눈에 들어왔다.

16549654681195.jpg“…….”

흠결 없이 투명한 피부. 눈부신 금빛으로 굽이치는 머리카락. 갓 태어난 초록이 햇살을 머금은 듯 신비로운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그 위로 드리워진 긴 속눈썹. 아주 드물게만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 다물린 붉은 입술. 참 예쁘기도 예쁘고, 예민해 보이기도 끝장나는 얼굴이었다.

16549654681195.jpg“…….”

마님과 허스트 부인은 어떻게 나를 이런 분의 대역으로 세울 생각을 했는지. 하녀 중에야 미인이란 소릴 듣지만, 레이나는 이렇게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는 푸석한 아가씨였다.

16549654681195.jpg“…….”

레이나를 올려보던 크리스티나는 시선을 돌려 거울을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16549654681201.png“둘이 이야기하겠다.”

허스트 부인은 “네.” 하고 허리를 숙인 후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크리스티나는 가만히 거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숨 막히는 공기. 멀어져가는 하녀장의 발소리가 사라지고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크리스티나는 입을 열었다.

16549654681201.png“빗겨 주렴.”

레이나는 “네.” 대답한 뒤 빗을 내밀고 있던 손을 거두어 크리스티나의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의자 밖으로 빼 늘어뜨리며 빗을 고쳐 쥐었다. 금실 같은 머리칼이 레이나의 손가락 사이로 치렁치렁 흘러내렸다. 테이블 위의 유리 재떨이가 촛불 빛을 투과시키며 그 위로 날카로운 무늬를 만들어 냈다. 오 년 전. 이 자리에서 결혼을 거부하며 난동을 부리던 열일곱 살의 크리스티나가 지금의 그녀 모습 위에 겹쳐졌다. ……그때는 후작님이 아가씨에게 재떨이를 던졌었지.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재떨이를 대신 맞은 것도 나였는데. 뭐, 누구도 기억해 주지는 않는 일이다.

16549654681195.jpg“……히비스커스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화장대 위의 다른 향유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아네모네다. 레이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래쪽부터 천천히, 빗이 그녀의 머리를 당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레이나는 적당히 데운 향유를 손가락 끝에 발라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한 번, 빗이 한 번씩 지나간 자리를 따라 윤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그 사이로 아가씨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16549654681201.png“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니.”

16549654681195.jpg“…….”

레이나의 시선이 거울 속 크리스티나의 모습에 머물렀다. 크리스티나는 레이나를 보지 않은 채, 화장대 위의 마른 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6549654681201.png“듣고 싶어 불렀다.”

16549654681195.jpg“…….”

……남편. 빗을 쥐고 멈추어 선 레이나의 기억이 그 옛날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 · ·

16549654702261.jpg「이 결혼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지금 손을 들어 말씀하시고, 그러지 않으실 것이면 영원히 침묵하십시오.」

16549654702261.jpg「슬플 때나 기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젊어서 뿐만 아니라 나이 들어서도…….」

16549654702261.jpg「죽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16549654702261.jpg「두 사람은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맞이하여 섬기고 아끼며 사랑하겠습니까.」

16549654730232.jpg「…….」

16549654702261.jpg「두 사람은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십시오.」

  · · · 면사포를 쥔 채 두려움에 떨던 밤. 어둠이 가짜 신부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려주길 바란 듯, 고요한 신방에는 단 하나의 촛불만이 켜져 있었다. 촛불의 빛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는 면사포를 벗지 말라던 허스트 부인의 말을 상기하며, 레이나는 떨리는 두 손이 새하얘지도록 면사포를 움켜쥐었다.

16549654681195.jpg「…….」

크리스티나 아가씨라면 이렇게 덜덜 떨지 않았을 텐데. 지나치게 떠는 모습이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아 의연함을 가장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16549654681195.jpg「…….」

레이나는 두려움을 잊으려 애쓰며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했다. 할머니는 불이 난 집에 뛰어들어 쓰러진 레이나를 구해낸 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줄리어스 일가는 할머니에게 거액의 치료비와 가문의 주치의를 보내주는 대가로 이 밤을 걸었다. 할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레이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16549654730249.png「……두렵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레이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면사포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사내는 잠시 레이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는 듯하더니 무심히 다른 데로 고개를 돌렸다.

16549654730249.png「……바보 같은 질문이군.」

16549654681195.jpg「…….」

다행히 아가씨의 얼굴도 성격도 모르는 상대의 눈에는, 레이나가 그저 평범하게 초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 것 같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희미한 불빛 아래. 레이나의 마음속에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모든 일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과, 자신이 ‘후작 영애’가 아님을 알아본 그가 화를 내며 방을 박차고 나가주길 바라는 마음이 모두 있었다. 레이나는 눈을 꾹 감고 사랑하는 할머니만 생각하려고 애썼다.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던 그는 얼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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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한 목소리가 짧은 틈을 두고 조용히 이어졌다.

16549654730249.png「이 이상 미룰 수가 없겠소.」

16549654730249.png「더 기다려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16549654730249.png「남은 밤이 짧고, 나는 시간이 없어서…….」

레이나는 침묵했다. 무거운 예복 장식과 장신구 몇 개를 풀어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가 다가왔다. 떨고 있는 레이나 앞에 선 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16549654730249.png「이 밤, 그대에게 조금 더 힘든 일이 될 텐데…….」

16549654730249.png「노력해 보겠지만 그대, 견뎌야 함은 어쩔 수 없을 테지.」

16549654730249.png「……견뎌주시오.」

16549654730249.png「미리 미안하오.」

그 말은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레이나는 처음으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16549654681195.jpg「…….」

훤칠한 체격에, 조각 같은 얼굴. 신비로운 회색빛 눈동자에 고요히 타는 불빛이 담겨 있었다. 설원의 겨울 늑대가 떠오르는 남자였다.

16549654730249.png「……소개가 늦었군.」

16549654730249.png「내 이름은 ‘아서’요.」

16549654730249.png「……아까 서약서에 서명을 할 때 봤겠지만.」

이 모든 게 우습다는 듯,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16549654730249.png「그대 부군 될 사람이오.」

농담을 던진 거였을까. 아니면 뻔하고 시시한 통성명을 바란 것이었을까.

16549654681195.jpg「…….」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가능한……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 레이나가 답을 돌려주지 않은 데에 실망하지 않은 듯, 그는 담담하게 대신 말해 주었다.

16549654730249.png「……그대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좋소.」

16549654681195.jpg「…….」

촛불이 꺼지고. 툭. 그의 손길에 면사포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목덜미를 감싸는 서늘한 손을 느끼며, 레이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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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몹시 끔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룻밤이면 된다, 별것도 아니다, 하녀의 첫날밤에 그 누구도 이런 비싼 값을 쳐주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로하려 애썼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유린당한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정중했고, 모든 순간 레이나를 배려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 정도의 레이디는 이렇게 소중한 대우를 받는구나. 그녀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를 살짝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이 들 정도로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덕분에 레이나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남지 않았다. · · ·

16549654681195.jpg“…….”

현실로 돌아온 레이나는 잠시 멈추었던 손을 가만히 움직여, 두어 번 아가씨의 머리를 빗겨 주며 입을 열었다.

16549654681195.jpg“그분은…….”

잠시 틈을 두고 레이나는 말을 이었다.

16549654681195.jpg“꽤 잘생기셨어요.”

16549654681201.png“…….”

맥 빠지는 대답에 조각상처럼 앉아 있던 크리스티나가 싸늘하게 거울 속 레이나를 쏘아보았다. ‘그딴 소리나 듣자고 부른 줄 알아?’ 말하는 듯 차가운 눈이었다. 레이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거울 너머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16549654681195.jpg“……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 나쁜 분은 아니셨어요.”

16549654681201.png“…….”

크리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나는 가만가만, 부드럽게 빗질을 이어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크리스티나와의 시간이 끝난 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허스트 부인은 레이나를 따로 불러 그녀의 짐작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허튼 입놀림을 하지 않고 한동안 얌전히 저택을 떠나 몸을 숨겼다가 오면 주급을 두 배로 챙겨 주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원래 올해까지만 약속되어 있었던 레이나의 할머니에 대한 보살핌을 오 년 더 늘려주시겠다는 말이 덧붙었다는 것이었다. 놀란 레이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16549654681195.jpg“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격한 얼굴로 허스트 부인에게 몇 번이나 꾸벅꾸벅 고개를 숙인 레이나는 닫힌 크리스티나의 침실 문 앞에서 기쁘게 물러났다. * * * 레이나가 하녀 다락으로 돌아온 건 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새벽녘에나 들어와 간신히 쪽잠을 잤을 모든 하녀들이 다시 일어나 일을 나갔을 시간. 언제나 외풍이 드는 좁다란 다락의 창으로 막 조그마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레이나는 닫힌 문에 기대어 선 채 다락에 자기 혼자뿐이라는 걸 확인하곤 미소를 지었다.

16549654681195.jpg“으하―암…….”

그리고 등 뒤로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자신의 침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일은 하지도 않는데 돈은 두 배로 받는다니…… 모처럼의 횡재였다. 할머니를 보살펴 주시는 분들도 올해까지만 뵐 수 있을 예정이었는데 오 년이나 더 보살펴 주신다니. 지원이 끊길 걸 대비해 여러모로 준비해 두긴 했지만, 이걸로 훨씬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어쩌면 준비해 두었던 돈으로 조만간 바닷가의 낡은 집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16549654681195.jpg‘내일은 할머니를 보러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가, 하루만 푹 쉬고 가야겠다고 계획을 바꾸었다. 이틀 동안 다섯 시간도 채 온전히 누이지 못한 노곤한 몸을 침대가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녀들이 돌아오기 전에 잠깐만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나는 시린 눈을 비볐다. ……한 달 정도 떠나 있으면 되려나? 짐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16549654681195.jpg‘집에 가져갈 짐들만 챙겨두고 쉬어야겠다.’

레이나는 자신의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툭―. 몇 안 되는 짐을 정리하던 손이 서류 보관함을 스치며 뚜껑이 살짝 어긋나 열렸다. 레이나의 시선이 그 틈새로 고개를 내민 스크랩북들에 멈추었다.

16549654681195.jpg“…….”

수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노랗게 빛바랜 소식지들. 낡아서 보들보들해진 그 모서리들을 손으로 살짝 만져보며, 거기 묻은 시간들을 헤아리던 레이나는 미소 지었다. 하룻밤 남편님. 대청소에 시달리는 한 달 동안 당신을 참 원망했었는데, 지금은 덕분에 행복하네요. 마지막 선물, 감사히 잘 받을게요. 돌아오셔서 행복하시길 바라요. 당신의 옛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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