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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와 결혼한 여자가 아니다 (3/210)

#3. 나와 결혼한 여자가 아니다2021.09.09.

열광하는 구경꾼들이 가득 몰려든 줄리어스 후작령의 개선 광장. 개선군의 맨 앞에 선 총사령관 아서의 앞으로 나선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쥐고 시선을 내리며 사뿐히 무릎을 굽혔다.

16549654887524.png“……제국의 떠오르는 빛을 뵙습니다.”

아서를 향한 크리스티나의 첫마디에 모여든 군중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올리며 환호했다. 줄리어스 후작이 손을 들어 군중들을 저지할 때까지, 환호는 계속 이어졌다. 크리스티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몸을 숙인 채 말을 이었다.

16549654887524.png“……큰 영광 속에 개선하심을 축하드립니다. 강건하신 모습 뵙게 되어 기쁩니다.”

다시 터져 나온 환호성에 광장이 들끓었다. 이번에는 후작이 손을 들기 전에 소리가 잦아들었다. 흥분한 군중들이 혹시라도 그의 첫마디를 놓칠세라 저마다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고 옆 사람들에게 얼른 소릴 낮추라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구경꾼들이 눈을 빛냈다. 몰려든 사람들은 이 세기의 커플의 재회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된 행운에 기뻐하며 아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온 제국민들이 기다렸던 역사적인 재회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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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54887539.png“…….”

말 위에 앉아 크리스티나를 내려다보던 아서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16549654887539.png“……그대가 내 부인이라고?”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군중들은 ‘아서 경이 뭐래?’ 하며 서로를 마주 보거나 고개를 저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건 가까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감격의 함성이 터져 나오지 않는 분위기만은 모두가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의문 반, 기대 반의 얼굴로 혹시 한마디라도 들을 수 없을까 하며 더욱 소리를 낮췄다.

16549654887524.png“…….”

크리스티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16549654887554.png“아서 경.”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직전, 크리스티나를 대신해 후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16549654887554.png“너무 오랜만에 다시 뵙는 것이다 보니, 크리스티나가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아서는 조용히 웃는 낯 그대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응수해 주지 않은 채 산뜻하지만 어딘지 서늘한 미소만 짓는다. 후작 부인은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654887554.png“떠나시기 전에 겨우 열일곱 살이었으니 못 알아보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몰라볼 정도로 예쁘게 컸죠?”

후작 부인의 말에, 아서는 대답 대신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곤 검지와 중지로 구겨진 눈썹께를 매만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가만히 후작가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어딘지 이상한 분위기에 사람들 사이로 의아한 표정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뒤로 한 발 빠진 채, 묵묵히 위엄 있고 자애로운 영주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줄리어스 후작, 안토니오 줄리어스의 표정에 불편한 빛이 스쳤다. ……후작 부인이 말을 거는데, 대답을 하지 않아? 줄리어스 후작은 다시 시작하는 그와의 관계를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시작하고 싶었기에 자신이 기대하듯 우호적으로 응해 주지 않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아하게 돌려 지적하며 대답을 유도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후작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음을 의식하고 그냥 미소 지었다. 국민 영웅 아서 경을 향한 줄리어스 후작의 첫마디가, 그의 귀족적이지 않은 태도에 대한 훈수나 지적질이 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겠지. 더군다나 그들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부실 보급 의혹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서의 긍정적인 증언이 필요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줄리어스 후작은 손수 나아가 그를 포옹이라도 해 줄 듯이 일어섰다. 소식지의 삽화가 될 만한 장면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도 좋겠지. 예상보다 이른 방문에 사원의 기록관이나 길드의 기자들은 충분히 모여 있지 않았지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은 전해질 터였다. 그러나 만면에 웃음을 띤 줄리어스 후작이 팔을 벌리며 막 단상 아래로 내려서는 순간, 아서는 곤란한 듯 웃는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16549654887539.png“저 여자는 나랑 결혼한 여자가 아닌데?”

분명하게 군중 속으로 퍼져 나가는 목소리. 당황한 사람들을 무시한 채, 아서는 산뜻하게 크리스티나를 외면하고 후작가의 사람들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16549654887539.png“나는 ‘내 아내’를 보겠다고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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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54926588.jpg“…….”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잠자다 끌려 나온 레이나는 당혹감 속에서 자신의 눈앞에 선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16549654926588.jpg“마, 마님? 저어…….”

후작 부인은 탁,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접으며 레이나를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얼른 불쌍하고도 공손한 눈으로 두려운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겠지만, 이번엔 불가능했다. 정신없이 옷이 벗겨지는 중이었으니까. 레이나는 그녀를 잡아 돌리는 허스트 부인의 손길에 억 소리를 내며 팽이처럼 뒤로 돌려졌다. 다음으로 콱 하고 코르셋이 조여졌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코르셋이 한 번 더 조여졌다.

16549654926588.jpg“아윽.”

더 조일 데가 남아 있었다니. 코르셋에 으스러지지 않기 위해 낑낑대느라 레이나는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후작 부인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16549654887554.png“…….”

후작 부인은 아직도 최후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눈앞의 하녀 애를 보고 있었다. 침대 기둥을 붙들고 끙끙거리는 레이나의 뒤에서 후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16549654887554.png“아서 경이 돌아왔다는 건 알고 있지?”

16549654926588.jpg“윽, 네… 네…….”

레이나는 숨을 쉬기가 버거워 코르셋을 쥐어뜯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제국 사람들 중에 그분이 돌아왔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한 달 전부터 사원 소식지, 길드 신문, 온갖 호외에서 매일 그분의 행보를 퍼 나르는데.

16549654926588.jpg“웁.”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뜨거운 물에 덥힌 수건으로 얼굴을 꽉 감쌌다. 아 뜨거워! 비명은 수건 속으로 사라졌다. 그다음엔 머리카락에 또 젖은 수건이 박박 문질러졌다. 이어서 화로에 달군 머리 인두가 훅 다가와 열기를 뿜었다.

16549654926588.jpg“……!”

피부에 가까워지는 위협적인 화기에 목이 움츠러들며 등줄기에 쭉 소름이 끼쳤다. 잠깐, 잠깐만! 뜨거워, 무섭단 말이야! 뒤에선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16549654887554.png“살고 싶다면 아서 경에게 우리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잘 말해야 할 거다. 네가 예전에 크리스티나를 대신했었다는 게 밝혀지면 너나 우리나 몹시 곤란한 상황이 될 거야. 특히 너는 절대로 무사하지 못해. 똑똑하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만.”

……? 순간적으로 아가씨의 시녀라도 하게 되는 건가 생각했지만 곧바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후작 부인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레이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누구한테 뭘 말하라고?

16549654926588.jpg“네?”

레이나는 기겁해 고개를 돌리고 하녀장과 후작 부인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니까, 조금 전 아서 경이 돌아왔다는 소리가……. 후작 부인이 싸늘하게 레이나를 내려다보았다. 빠르면 열흘이라 생각했던 아서 경의 귀환이,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하달된 명령이 무엇인지도. 레이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더듬더듬 답했다.

16549654926588.jpg“마, 마님. 그러니까 이제 진짜 크리스티나 아가씨께서 나서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서 경께서도 이젠 어엿한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셨고, 황실에서도 엄청난 포상을 해 준다고 하잖아요.”

후작 부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나는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16549654926588.jpg“그, 그 정도면 후작가의 사위로도 손색이 없을 거 같은데……. 괜히 제가 나갔다가 일이 꼬이면 어떡해요…….”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의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아서 경이 아니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후작가일지라도 함부로 대하거나 대충 잘못을 얼버무려 넘길 수 있는 신분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소식지에서 그를 일컫는 말은 가장 겸손한 표현으로도 ‘떠오르는 황실의 샛별’이었다. 직접적으로 공언하진 않았지만, 황실에서도 ‘형제의 우애’에 대한 기쁨을 표함으로써 아서가 이제 어엿한 황실의 일원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즉, 더 이상 하녀 따위를 은근슬쩍 대역으로 들이밀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왜? 과거의 일을 최선을 다해 숨겨도 모자란 상황일 텐데, 대체 왜 날?

16549654926588.jpg“마, 마님.”

예전에야 어려서 뭘 모르고 시키는 대로 휘말렸다지만, 이젠 이런 일에 잘못 얽혔다간 목이 달아나기 십상이라는 걸 알 만큼 아는 나이다.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랑 좀 관계있는 유명인.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 들으면 괜히 뿌듯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거리로 좁혀지길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하던 후작 부인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어 말했다.

16549654887554.png“……아무래도 그놈이 눈치를 챈 것 같아.”

그놈이 어떤 놈이냐고 반문하기도 전에 부인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16549654887554.png“아니면 너, 내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 그놈은 네가 크리스티나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고 했잖아!”

레이나는 움찔하며 지난 한 달 내내 불려갈 때마다 했던 대답을 또 반복했다.

16549654926588.jpg“다, 당연하죠. 그땐 분명 눈치채지 못하셨어요……. 전 시키신 대로 했는걸요…….”

불안한 마음에 황급히 다시 한번 옛날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생각이 뻗어 나갈 틈도 없이 후작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16549654887554.png“그럼 그놈 새끼가 왜 크리스티나를 보고 내 아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레이나는 깜짝 놀라 숨을 멈추었다.

16549654926588.jpg‘……아서 경이 그런 말을 했다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서 경이 가짜 신부와 결혼했었다는 걸 알아채고 그걸 문제 삼을 가능성은 레이나로서도 무서웠다. 그 결혼은 황실과의 계약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짓은 황실 기만이었다. 문제가 된다면 연루된 사람들은 전부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그때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다시 홱, 레이나를 돌려놓으며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16549654970068.jpg“레이나가 들켰던 거면요? 오 년 전에 난리가 안 나고 왜 지금 난리가 나겠습니까? 덮어 주려다가도 오 년 동안 그리하셨으니 나 같아도 열 받아서 문제 삼고 싶겠네.”

오십 년 동안 저택을 지키며 삼 대의 후작 부인을 모신 하녀장 허스트 부인의 거침없는 바른말에 천하의 후작 부인도 말문이 턱 막혔다. 허스트 부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16549654970068.jpg“그러니까 좀 죽었다는 게 확실해지고 나서 딴마음을 먹기라도 하시든가. 공 세우고 있다는 소식 들려올 때 보급품이라도 좀 제대로 보내주시지 그렇게 홀대하시고. 서운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제가 이건 문제 될 수 있다고, 도리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너무나 맞는 말인 나머지 레이나는 맞장구를 칠 뻔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보고 레이나는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후작 부인은 차마 대부인의 총애를 받는 저택의 터줏대감 올가 허스트를 어쩌지는 못하고, 그녀 대신 레이나를 노려보며 부채를 틀어쥔 손을 쳐들었다.

16549654887554.png“너……!”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예상한 손찌검은 떨어지지 않았다. 후작 부인은 힘줄이 도드라진 손을 파들파들 떨다가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16549654887554.png“……일단 준비하고 있어라.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너희 할머니에겐 절대 섭섭지 않게 해 줄 터이니. 일이 틀어지면 너도, 네 할머니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리고 후작 부인은 뒤에 남겨진 레이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방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쾅!

16549654926588.jpg“…….”

레이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듣지 못할 후작 부인에게 대답했다.

16549654926588.jpg“……네, 아무렴요.”

억센 손길이 바쁘게 드레스에 리본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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