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디까지 하려는 거야2021.09.23.
개선식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수도로 이동해 황제의 앞에서 치르는 정식 개선식, 그 이후에야 비로소 군을 해산하고 장병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황제는 수도로 귀환하는 장병들이 자신들의 고향에 도착했을 때 충분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흥을 내는 약식 개선식을 치르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격식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분위기도 수도의 개선식에 비해 자유로워, 장병들은 때론 인파 사이에 섞여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가족을 발견하곤 달려 나가 얼싸안으며 감격의 재회를 나누기도 했다. 한밤중의 개선식이었지만, 잠들어 있는 집은 없는 것 같았다.
“줄리어스가 제법 힘을 썼군.”
기자들도 순수하게 놀라워할 정도로 줄리어스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개선식에 지지 않으려면 황제 폐하께서 힘을 내셔야겠는데?”
무슨 개선식을 한밤중에 시작하냐며 황당하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폭죽이 터지고 아름다운 빛이 밤하늘을 수놓자 줄리어스가 특별하면서도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개선식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야경을 과시한다는 회심의 한 수를 펼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화려한 개선식이었다. 지난 오 년간의 부실 보급 논란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 * 동이 터 오는지 하늘의 빛깔이 변해가고 있었다. 레이나의 머릿속도 따라서 표백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레이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 개선 행진용 금수레에 올라 아서의 옆에 서서 영지민들에게 여덟 시간째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이제 내가 손을 흔들고 있는 건지 내 손이 경련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개선식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
구두를 신은 발이 아프다. 간밤에 뚫린 귀보다 발꿈치가 더 쓰라렸다. 코르셋을 너무 조여서 그런가, 가슴뼈 어딘가가 욱신거리는 통증까지 있었다. 숨쉬기가 힘들어. 뼈가 부러진 건 아니겠지? 사방에서 축제를 벌인다고 음식 냄새가 나고 있었지만 레이나는 환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고고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드느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배고파. 그런데 입맛이 도는 것도 아니다. 너무 지쳤어. 발이 아프다. 팔도 아프다. 가슴뼈도 아파. 추워. 귀걸이가 무거워선지 현기증까지 난다. 교수대까지 가기도 전에 이 자리에서 쓰러져 죽을 판이었다.
“아가씨, 미소를 잃으시면 안 돼요. 기자들이 봐요.”
곁에 선 하녀 둘이 살짝 속삭이며 레이나를 부축해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그들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예쁘게 만들어 주고, 화장을 고쳐 주고, 시든 꽃을 떼어 내고 싱싱한 꽃으로 바꿔 달아 주는 동안, 레이나는 멍하니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살짝 눈이 마주쳤다. 이름은 모르지만 안면이 있는 하녀들이었다. 내가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니라는 걸 틀림없이 알아봤겠지만 당황한 얼굴조차 아니었다. 아가씨라 부르는 게 아주 자연스럽기 짝이 없어, 순간 그 애들의 눈엔 내가 진짜 아가씨로 보이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를 아가씨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붙여 놓은 것이겠지? 아가씨가 그 누구에게도 시중을 받고 있지 않다면 이상할 테니까. 후작님네는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텐데. 그들도 입조심을 한다면 두 배의 주급을 챙겨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까?
“…….”
툭. 갑자기 어깨에 포근한 감촉이 느껴져 레이나는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주변을 에워싸는 휘파람 소리와 뭔가 띄워 주는 것 같은 야유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아서가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벗어 걸쳐 주곤 도로 손을 물리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마디 말도 없이 시선이 떠나간다.
“…….”
기억이 왜곡됐던 걸까? 꽤 잘생기셨어요, 라고 말했던 건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그는 좀, 지나치게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별 의미 없이 지은 표정도, 그냥 있을 뿐인 자세도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 장면처럼 각인될 정도로.
“…….”
왜 저렇게 잘생겼을까. 전쟁에 얼굴은 쓸 데도 없었을 텐데. 그와의 역사가 나를 교수대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순간 두려움이 무뎌질 정도로, 그는 너무 멋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 아래, 느슨한 흰 셔츠만 입고 무심히 다른 데를 보고 있는 모습이 거짓말처럼 근사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나는 가만히 서서 숨을 쉬는 것조차 부자연스럽고, 이제는 얼굴도 팔도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은데. 나랑 똑같이 서서 밤새도록 손을 흔들고 있지 않았나? 어째서 그는 막 새벽바람을 맞으러 나온 사람처럼 편하고 자유로워 보이는지. 역시,
“……무인이라 그런가 체력이…….”
헉. 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이 아닌데. 코르셋이 너무 몸뚱이를 쥐어짜고 있어서 그런가, 가슴에 담아만 두어야 했던 속생각이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빠져나와 버렸다. 레이나는 입을 가렸다.
“…….”
너무 스스럼없이 말해 버렸어. 들었을까? 못 들었길 바라며 힐끔 시선을 돌려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앞의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앞을 응시한 그대로 웃고 있었다.
“많이 힘듭니까.”
……들었구나.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며 손등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가씨라면 뭐라고 했을까?
“……개선식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서가 웃었다.
“힘들지 않다고는 안 하는군요.”
그야 그건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힘들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 년 동안 전장을 전전하고 이제 막 돌아온 사람에게, 손을 너무 흔들었더니 팔이 마비될 거 같아요 따위의 우는소리를 할 정도로 뻔뻔하진 못했다. 레이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답했다.
“……겉옷은 감사합니다.”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후작가의 하녀 생활이 호락호락한 건 아니었지만 굶어 죽을 걱정이나 밤중에 갑자기 칼을 맞을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평화로운 생활이었다. 조금씩 아껴서 나 좋은 것을 사 모으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었고. 힘든 와중에도 언젠가 바닷가를 꿈꿀 수도 있었다.
“…….”
그동안 내가 영위한 평안은 이분이 목숨 걸고 고생해 지켜준 것이었겠지. 그런데 겨우 옷이나 얻어 입고 개선식이 힘드냐, 이런 대화나 나누고 있다니. 레이나는 어색하게 그가 둘러준 겉옷을 만지작거렸다.
“…….”
「호들갑 떨지 마라.」
「아서 경은 그저 잠깐 화가 났을 뿐이야.」
「네 역할은 그냥 지금의 난리를 잠재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알고 있다. 어쩌면 이 거리는 오늘뿐. 황실 모독으로 교수대에 끌려가지만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은 내 평생에 다시 없을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주 잠깐 가까운 곳에 설 수 있었던 딴 세상의 왕자님. 이렇게 그와 대화할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평생 소식지를 통해서나 볼 수 있겠지. 그때 뭐라도 그럴싸한 대화를 해 볼 걸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무어라도 말을 걸어 볼까? 평생의 추억이 될 텐데.
“…….”
레이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대화는 무슨. 아무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조용히 있으며 무사히 교수대가 멀어지기나 기다리면 되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되는 건 사양이다. 최대한 조용히 숨죽여 이 순간이나 모면하고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달아나야지. 고래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최대한 먼 바다로…….
“…….”
레이나는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여든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나는 다시 인형 같이 웃으며 아서가 걸쳐준 외투 밖으로 팔을 뻗어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려고 했다.
“한잔?”
놀랍게도 다시 말을 건 것은 그였다. 레이나는 흠칫하고 그가 자신에게 내민 잔을 바라보았다.
“…….”
다시 아까의 띄워주는 듯한 야유가 들렸다.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 밤과 같은 인파는 아니었지만, 주변엔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레이나가 잔을 받길 기대하는 듯 분위기를 띄우는 환호를 올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
레이나는 잔을 받아들었다. 외투 자락을 가슴 앞에서 움켜쥔 채, 다른 손을 내밀어서.
“…….”
잠시 손에 든 잔을 바라보았다. 그가 준 건 데운 포도주였다. 나는 술은 전혀 못 하지만……. 그에게 술을 한잔 받았다. 어떻게 이 잔을 거절할까. 평생의 추억일 텐데…….
“…….”
크리스티나 아가씨였어도 이런 분위기에서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가씨는 술도 잘하니까…….
「그의 앞에선 철저히 크리스티나로 있어라.」
가을의 새벽은 싸늘했다. 잔 안쪽에 흔들리는 포도주의 수면 위로 뽀얀 김이 어리고 있었다. 따뜻할 것 같아.
“…….”
레이나는 그대로 잔을 입가로 가져가 쭉 들이켰다.
“하아…….”
따뜻한 와인 향기를 품은 입김이 새벽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좋네. 달콤하고 따뜻했다. 다시 사람들이 환호를 올렸다. · · ·
“황제를 위하여.”
아서가 검을 들고 짧게 외치자 병사들이 제창하며 경례했다.
“황제를 위하여!”
약식 개선식이 끝났다. * * * ……아가씨께서 지독한 열병에 걸리셨다. 하지만 너희들도 알다시피 오늘은 중요한 개선식이 있는 날이야. 아가씨는 어떻게든 나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지만 열이 심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상태이시다. 후작님께선 심하게 앓고 있는 아가씨를 사람들 앞에 내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셨다. 그렇다고 아가씨가 아프니 회복할 때까지 아서 경에게 성 밖에서 며칠만 기다려 달라 하는 것도 못 할 짓 아니겠니? 개선장군과 장병들이 그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몸이 좀 아프다고 아가씨가 나가지 못한다 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홀대한다는 오해를 사게 될 것 아니니. 아서 경만이 아니라 오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 밤만, 레이나가 아가씨를 대신해 개선식의 자리에 서기로 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레이나가 실수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거라. 괜히 좋은 날에 쓸데없는 잡음이 따라붙지 않게 신중해야 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 · ·
“…….”
레이나를 보조했던 두 하녀는 당혹해서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로…… 아가씨는 지금 아가씨가 아닌 상태인 것인데…….
“열어.”
“…….”
혹시, 아서 경은 그걸 모르시는 건가? 왜……. 왜 아서 경이? 쟤를 안고 신방에? 아서와 아가씨의 것으로 배정된, 이 줄리어스 저택에서 두 번째로 큰 침실. 아마도 이 집안에 아들이 있었다면 그의 차지가 되었을 바로 그 방. 하녀들과 후작 부인이 한 달 넘게 공들여 꾸민 신방의 닫힌 문을 앞에 두고. 쓰러진 건지 잠든 건지, 긴긴 개선식 끝에 갑자기 정신을 놓고 늘어진 레이나를 품에 안은 아서 경이 말했다.
“안 들리나?”
하녀들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요, 그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레이나는 그냥 아픈 아가씨 대신 행진만 하는 거 아니었냐구요. 침실까지 같이 들어가시게요? 거기 아가씨랑 쓰실 신방인데? 당장 이거 아니라고 말려야 해? 아니면 일단 아서 경 앞에서 입조심 해야 해? 뭐야, 뭐냐구! 어떡해? 마님? 크리스티나 아가씨? 허스트 부인? 다들 어디 있어! 아서 경, 어디까지 가실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