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방의 하녀2021.09.26.
“야!”
어깨를 잡아 흔드는 매서운 손길에 레이나는 혼비백산해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야! 잤어? 아서 경이랑 잤냐구!”
깜짝 놀란 레이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포근한 이불이 몸에서 흘러내리며 차가운 공기가 맨몸에 닿았다. 응? 맨몸?
“!”
레이나는 소스라치며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가렸다. 탄식하듯 이마를 짚은 검은 머리의 하녀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하녀가 어쩔 줄을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려고 그래! 아가씨가 널 가만둘 거 같아?!”
자신의 꼴을 확인한 레이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옷. 내 옷. 어디 갔지? 아가씨의 신방에서 알몸으로 눈을 뜬 하녀의 상큼한 아침이 밝았다. * * *
“몸은 네가 알아서 씻어.”
두 하녀는 신경질적으로 욕조를 내려다 놓고 통보했다. ……나로서도 너희한테 발가벗은 몸을 보여 주고 싶진 않거든? 레이나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고……고마워. 욕조 가져다줘서…….”
……저절로 말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나라고 원해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게 아닌데.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있다는 생각 때문인가 위축되었다. 하녀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욕조 주변에 칸막이를 세워 준 뒤 침대에 앉아 있는 레이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등을 돌리고 앉았다.
“…….”
레이나는 그들의 뒤통수가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얼른 침대에서 벗어나 칸막이가 쳐진 안까지 까치발을 하고 후다닥 이동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자기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들추어보며 확인했다.
‘맞지? 그렇지?!’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사라진 건 코르셋뿐이었고 몸도 깨끗했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런 보송보송한 상태일 리 없어. 오 년 전의 경험으로 레이나는 간밤에 자신과 아서 경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명 개선식을 하고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
밤새도록 손을 흔들다 날이 밝아 오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데운 포도주를 받아 마시고…… 이후가 생각이 안 난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난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입고 있던 드레스와 코르셋은 어디로 간 건지, 어쩌다 이 침실에 들어와 자고 있었던 건지 하나도 기억이…….
“…….”
잠깐, 침실?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어 레이나는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
금사로 수 놓인 검정 카펫과 천장의 샹들리에. 하늘하늘한 커튼과 최고급 벽난로. 벽에 걸린 낯익은 명화들과 고급스러운 장식품들. 그리고 익숙한 가구 배치……. 레이나도 진작 그 방의 청소와 준비에 동원되어 한 달이 넘도록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역사가 있었기에 여기가 어딘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는…….
‘아가씨랑 아서 경의 신방이잖아!’
머리가 띵 해지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아가씨가 널 가만둘 것 같냐고 발을 동동 구르던 하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 * * 아서는 시가 끝에 불을 붙이며 다리를 꼬았다. 오른편에는 줄리어스 후작과 후작 부인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이라는 남자가 통성명 후 맞은편에 자리했다. 황후의 조카라고. 후작 내외는 꽤나 그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아서는 후 옆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곤 담백하게 웃었다.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
집주인 같은 인사치레에 후작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여기가 네 집이냐? 이 건방진 자식!’
렘브란트 경만 없었어도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아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주셨다 들었습니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간밤에 개선식을 소화하고 새벽에나 들어온 참이라, 기상 시간이 늦었거든요.”
아서는 시가를 다시 입가에 가져가며 웃었다.
“사실 제가 이리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일에 익숙지 않아서요. 지난 세월 불민하여, 좀 더 빠르게 관심 가지실 만한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했던 탓이겠지요.”
말 속에 뼈가 있었다. 해석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 오 년 그리도 무심하시더니 이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지셨군요. 전장에 있을 땐 관심 한 톨 주지 않으시더니. 진작 관심 좀 주시지 그러셨어요? 한밤의 개선식은 웃기긴 했습니다.> 목소리는 유려하게 이어졌다.
“이리 과분한 관심 가져주실 줄 몰라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갑작스럽고도 분에 넘치는 정성에 놀랐습니다. 넉넉함으로 맞이해 주신 가문 어르신들께 감사드립니다.”
해석은 이랬다. <개선식 하는 거 보니 너희 풍족하더라? 이리 풍족하면서 지난 오 년 뭐 했니?> 후작이 탁자 맞은편에 앉은 렘브란트 경을 의식하며 얼굴을 굳혔다. 후작 부인은 손안에서 떨리는 찻잔을 움켜쥐며 지난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 · ·
“한밤에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저택에 들어온 아서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품에 안은 여자를 고쳐 들며 말했다.
“물론 낮에 환대해 주실 수 있었더라면 더 행복하셨을 텐데 유감입니다.”
아서의 뒤를 따르던 기사가 크흠 하고 고개를 틀며 비웃음을 참아내는 게 보였다. 후작은 분노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입을 다물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성질대로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곳은 저택의 복도 한복판이었다.
‘렘브란트, 렘브란트, 렘브란트……!’
저택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귀빈의 이름을 참을 인처럼 새기며, 후작은 목구멍 아래로 고함을 삼켰다. 한편 후작 부인은 아서가 드레스를 입은 채 잠든 레이나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말문이 턱 막힌 상태였다.
‘……자고 있어?’
채신머리없게 남자 품에 안겨서 저 꼴은 뭐야? 사람들은 전부 ‘저게’ 우리 크리스티나라고 생각할 텐데! 후작 부인이 아서의 팔에 안긴 레이나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봐요, 아서 경……. 그 애…… 그…… 우리 크리스티나가, 어째서 경에게…… 그렇게 안겨 있는 거지요……?”
아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복도의 코너를 돌아 나타난 집사장이 얼굴이 새하얘진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굳은 표정으로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당황한 것은 잰걸음과 다급한 말투, 힘줄이 돋아난 이마에서 드러났다. 집사장은 후작 부인의 곁에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주인마님. 렘브란트 경께서 와 계십니다. 지금 저 복도 앞에…….”
그리고 집사장의 난처한 시선은 아서와 그 품에 안겨 있는 레이나에게로 이어졌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거의 동시에 버럭 소리쳤다.
“수고했네! 이만 올라가 여독을 풀게! 개선식이 힘들었을 텐데!”
“하녀 애들이 잠자리를 봐 두었을 겁니다! 어서 올라가 쉬세요!”
· · · 그리고 후작과 후작 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렘브란트 앞에 섰다. 밤새도록 이어진 개선식으로 쌓인 피로가 어쩌고, 오 년 만에 재회한 크리스티나와의 회포가 저쩌고. 호들갑을 떨며 온갖 말들을 늘어놓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다행히 그들의 노력이 성과가 있었는지, 렘브란트 경은 웃으며 당장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만나볼 수 없는 사정을 납득해 주었다. 고맙게도 그는 줄리어스 후작이 잡아 두었던 약속을 어긴 것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그러나 뒤이어 그의 입에선 내일의 만남을 고대해도 좋겠냐는 질문이 떨어졌다. 그가 그저 일개 궁정화가에 지나지 않았다면 초상화 일정은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겠노라 일축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황제의 처조카였다. 황실의 가족으로서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권을 가진 빠른 만남을 바란다는 뜻이었기에 후작 내외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다음 날의 첫 번째 일정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간신히 렘브란트 경을 수습했다고, 이제 아서만 어떻게 하면 되겠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는데.
“……뭐?”
아서 경이 레이나를 데리고 올라가 진짜로 아가씨의 신방을 차지해 버렸다는 하녀의 보고를 전해 들은 후작 부인은 세상에 태어나 지어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며 하인들까지 물렸다는 소리에 눈 밑이 경련하며 입까지 벌어졌다.
“허…….”
올라가 쉬라는 건, 잠깐 올라가 우릴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가서 그러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래, 아무리 세기의 커플이래도, 귀족들의 정략혼이 그렇지. 그 정도의 신분이라면 얼마든지 정부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상했고 우리를 모욕하고 싶어도 그렇지. 내 딸을 위해 준비한 신방에 정부를 먼저 들여? · · · 사태를 호전시킬 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내가 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후작 부인은 분노로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건 크리스티나가 써야 할 방이었는데. 내가 그 신방을 얼마나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했는데. 이제 잘해 보자는 뜻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애써 준비했다는 걸 아서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크리스티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다니.
“…….”
후작 부인은 찻잔을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감사는 무슨요. 당연한 일입니다. 아서 경이야말로, 잠자리는 편안했나요? 경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무척 고심하여 준비했거든요.”
살가운 미소와 함께 잘근잘근 씹듯이 덧붙였다.
“하찮은 것들은 무엇 하나 들일 수 없는 방이니까요.”
아서가 웃는 낯으로 답했다.
“최고뿐이었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담뱃재를 털어내며 입꼬리에 미소를 매단 채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특히 ‘크리스티나’가 최고였죠. 제 아내요.”
후작 부인의 얼굴에 딱딱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 그랬나요?”
“네. 방 안의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었습니다. 훌륭하더군요. 따님을 어찌 그리 키우셨는지. 제게 과분한 아내입니다.”
식탁 위에 냉기가 감돌았다. 후작 부인이 결국 싸늘하게 미소 지은 채 아서를 들이받았다.
“별말씀을요. 아서 경의 넘치는 품위와 고귀한 혈통에 어울리지요.”
이 귀족어를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천한 것.>
“부인!”
후작이 낮게 윽박질렀다.
“크흠.”
그리고 렘브란트 경이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
순간 후작 부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렘브란트 경은 황제의 처조카. 즉, 그는 황후의 조카였다. 후작 부인은 울컥한 나머지 황후의 조카 앞에서, 황제의 혼외 자식을 상대로 ‘고귀한 혈통’을 운운하며 아서의 출신을 비꼰 것이었다. 비꼬는 것으로 들렸든 추켜세워 주는 것으로 들렸든 최악이었다. 후작 부인의 표정에 낭패감이 드러났다.
“아, 괜찮습니다.”
렘브란트가 입을 가렸던 손을 치우며 작게 웃음기가 남은 낯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그리 말씀하시니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또 무척 궁금해지는데요? 사실 드디어 오늘 세기의 커플을 함께 뵐 수 있을 줄 알고 고대했거든요.”
렘브란트는 그대로 아서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아서 경을 뵙게 된 것만으로도 무척 기분 좋은 영광입니다만, 사실 저도 그 유명한 ‘레이디 크리스티나’에 대한 관심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스러운 결혼 맹세를 하신 부인께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요.”
후작 내외가 무척이나 렘브란트 경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끼며, 아서는 여상히 렘브란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까. 여기서 이 주 가까이 머물러 계셨다고 들었는데, 제 아내와 인사 나누신 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후작과 후작 부인은 아서가 ‘지금 당장 제 아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만나러 가시죠.’ 하고 일어나기라도 할까 봐 손에 땀을 쥐고 조마조마하게 아서의 입을 노려보았다. 렘브란트는 속으로 ‘레이나’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그 아내 분’께 인사드린 적이 없지 않긴 한데. 그렇게 말할 순 없겠지. 렘브란트는 ‘크리스티나’를 기준으로 답했다.
“네, 스치듯 먼발치에서만 뵈었습니다. 워낙 정숙한 분이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