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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기만했다 (19/210)

#19. 기만했다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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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가 덜컹거리며 번화가를 가로질렀다. 레이나는 헐겁게 흘러내린 후드를 다시 끌어당겨 얼굴을 가리며 긴장했다.

16549658429096.png“…….”

괜찮겠지……? 어쩔 수 없었잖아. 후작 부인이 외출을 최대한 피하라고 하긴 했지만, 마님도 사정을 들으면 내 선택을 납득해 줄 것이다. 외출은 ‘자제하라’ 했고, 렘브란트 경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피하라’ 했으니까. 렘브란트 경을 만나는 것보단 차라리 아서 경을 따라 나오는 게 나았다. 레이나는 초조하게 출발하기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 · ·

16549658429102.png“외출해야겠소.”

레이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16549658429096.png“네? 외출이요?”

그럼 나는 어떡하지? 분명 후작 부인이 부를 텐데. 그 사이에 찾아낸 그의 약점이 없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그를 잡는 말을 했다.

16549658429096.png“돌아오신 지 며칠이나 됐다구요. 이제 하루 겨우 쉬신 건데, 조금 더 쉬시지…….”

하지만 아서는 싱긋 웃으며 셔츠 위에 외출복을 걸쳤다.

16549658429102.png“슬슬 나가야지. 이미 너무 빈둥거렸어. 세기의 개선장군이랍시고 떠들썩하게 환영식을 치러 줬는데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되겠소. 하루 정도면 모를까, 침대에 처박혀 안 나오고 있다고 빈축을 살 거요. 게으른 모습을 보여 주어선 안 되오.”

레이나는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58429102.png“사실 어제 하루 쉰 것도 굉장한 파격이었소. 날 쉬게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후작의 배려 덕에.”

그리고 그건 레이나 덕분이기도 했다.

16549658429096.png“…….”

레이나의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보고 아서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16549658429102.png“개선장군의 의무를 해야지. 할 일이 많소. 어제 하루는 렘브란트 경만 만났지만, 실은 후작이 소개하는 인물들을 만난다고 온종일 불려 다녔어야 정상이오.”

그렇구나. 아서 경은 바쁘구나. 듣고 보니 당연한데, 왜 생각하지 못했지? 무의식중에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비슷하게 방 안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귀한 사람이 너무 오래 떠돌고 왔으니 최소한 한 달, 아니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거라고만……. 레이나는 어색하게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뭔가……. 크라바트를 달아 준다거나, 커프스 링크를 달아 준다거나, 옷을 걸쳐 준다거나, 그런 행동들을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군인인 아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완벽하게 의장을 갖추어 입곤 홀로 완벽한 모습이 되었다.

16549658429096.png“…….”

일어는 났는데 할 일을 찾지 못한 레이나는 쓸모없이 그의 앞에서 방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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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 툭 휘장 장식을 꽂아 마무리한 아서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16549658429102.png“같이 나가겠소?”

레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이 나가겠냐니? 레이나는 외출할 수 없었다. 가짜 크리스티나니까. 그녀는 대역이었고,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레이나는 경직된 채 후작 부인이 정해 준 핑계를 더듬더듬 읊었다.

16549658429096.png“아……. 저는…… 몸이 좀…….”

아서가 빤하다는 듯이 웃었다.

16549658429102.png“그럼 렘브란트 경을 먼저 만나고 있겠소? 그의 일을 좀 진전시켜 줘야 할 것 같던데. 초상화 말이오.”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왔다.

16549658429096.png“아뇨. 당신 외의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렘브란트 경은 절대 안 돼.

16549658429102.png“…….”

16549658429096.png“…….”

그리고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뭔가가 잘못된 걸 깨달은 레이나의 얼굴은 다시 토마토 빛깔로 달아올랐다.

16549658458425.png「적당히 몸이 좋지 않다거나, 남편 외의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렴.」

  이상하다? 후작 부인이 말했을 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대체 뭐가 문제지?

16549658429096.png“…….”

아서는 잠시 틈을 두고 슬쩍 웃었다.

16549658429102.png“그럼 같이 나갑시다. 렘브란트 경은 나중에 함께 만나는 걸로 하고. 그대를 혼자 두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 여러 가지 의미로.”

그러더니 옷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팔에 끌어안기듯 감싸이자 레이나는 흠칫 놀라 움츠렸다. 그는 별다른 접촉도 없이 레이나의 움츠러든 어깨 위에 가볍게 그것을 둘러 입혔다. 툭……. 후드가 달려 있는 케이프 코트가 어깨 위에 걸쳐졌다. 후드를 씌운 뒤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동안, 레이나는 뻣뻣하게 선 채 숨을 멈추었다. 후드와 옷깃을 살짝 당겨 정돈해 주며 그의 두 손이 레이나의 뺨 근처에 머물렀다. 향기가……. 어쩔 줄 몰라하며 눈을 피하는 레이나를, 아서가 부드러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16549658429102.png“……얼굴은 가리고 나가지. 당신은 정숙하니까.”

아서가 후드를 만져주며 싱긋 웃었다. · · ·

16549658429096.png“……어디 가는 거예요?”

레이나의 질문에 아서가 간단히 답했다.

16549658429102.png“내 부하네 집.”

마부에게 전달한 것이 부하의 주소였던 모양이다. 레이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물었다.

16549658429096.png“늘 가까이 계시던 분이요?”

16549658429102.png“트리스탄? 아니오. 다른 부하의 집이오.”

아서가 싱겁게 웃으며 덧붙였다.

16549658429102.png“벌써 트리스탄을 아는군. 조만간 정식으로 소개해 주겠소.”

16549658429096.png“아…… 아니.”

가짜 아내로서 당신의 측근들을 소개받는다니, 날 뭘로 소개할 셈이에요. 엉망진창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 소개 안 받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16549658429096.png“……네.”

레이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16549658429096.png“…….”

마차가 광장 근처의 붐비는 거리로 접어들었다. 그가 하자는 대로 나오긴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이나는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게 신경이 쓰여서 머리에 쓴 후드를 좀 더 당겨 만지작거렸다. ‘아가씨’로 드러내고 가는 게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 텐데…….

16549658429102.png“…….”

아서는 불안해하는 듯 자꾸만 후드를 당기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 · · 십 년 이상 줄리어스 저택에서 일한 하녀입니다. 하녀로 일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부터 일한 모양이더군요. 평범하게 청소, 정원 정리, 빨래, 바느질 일 같은 걸 주로 하고, 가끔 아가씨 시중을 드는 일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전용 시녀를 고정으로 따로 두지 않는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몸종으로 가끔 부르는 몇 명 중 하나라더군요. 24시간 후작저에 머물고 있고 집에는 드물게 간다고 합니다. 바깥에 가족이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만 가족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없어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하녀들 사이 평판은 딱히 이렇다 할 것이 없습니다. ‘벽치는 성격’이라고 하죠. 딱히 평판이 나쁘거나 적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 다니는 편이고 친한 하녀는 없는 모양입니다. 가까이 지낸다 할 만한 사람은 테일러 로렌슨 한 명뿐이라는데, 주치의 앨빈 로렌슨 선생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똑같이 의사고 후작가에 고용되어 있습니다. 둘이 연인이다, 아니다 말은 많습니다만 가까운 사이라는 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여러 사람이 알더군요. 그쪽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다시 ‘레이나’로 돌아와서……. 외모가 눈에 띄는 편이라 하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것 같습니다만, 워낙 말이 없고 외모 외에는 이렇다 할 눈에 띄는 구석도 존재감도 없어서요. 친구도 없고 그냥 좀 예쁘다는 게 전부인 조용한 사용인일 뿐이라 그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더군요. 후작가에서도 저택 내부 이야기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거나 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아서인지 입단속을 시키는 듯하고요. 개인적으로는 눈에 띄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끔 되어있는 하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확인된 바가 아니라 조심스럽습니다만, 외모가 뛰어난 하녀에 얽힌 소문이 이렇게까지 잠잠한 경우 후작가의 깨끗하지 않은 일에 동원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작가에서 소문을 관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조심해 주십시오. 위험한 여자일 수 있습니다. · · · 마차가 복잡한 교차로에서 잠시 멈춘 사이, 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차창 너머로 들어왔다.

16549658536766.jpg“부실 보급 진짜야?”

16549658536766.jpg“진짜 같아. 우리한테 보급편 통해서 전해 준다고 걷어간 거, 받았다는 사람이 없대.”

16549658536766.jpg“어머, 세상에.”

16549658536766.jpg“아버지한테 보내준다고 해서 우리도 편지랑 같이 솜옷도 보내고 축성 받은 목걸이도 보내고 했는데, 받으신 적이 없다는 거야. 우리 속상할까 봐 내내 말 안 하시고 받은 척하시다가…… 사실 못 받았다고 오늘 아침에야 말씀하시는데, 진짜 속상해서…….”

16549658536766.jpg“아…….”

안타까운 감탄사 뒤로 말소리가 이어졌다.

16549658536766.jpg“괜찮다고, 그래도 보내준 마음이 전해져서 내가 무사히 돌아왔지 않냐고 하시는데 온 가족 다 울고 난리도 아니었어.”

16549658429096.png“…….”

마차가 다시 출발하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레이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실 보급. 후작가 내에서도 입단속 항목으로 이야기가 돌아 알고는 있었지만. 돌아온 사람들의 가족이 하는 말을 듣자 실감이 났다. 그냥 전해진 물건이 빈약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닿지 않았다. 간절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만했다. 이제 징집병들이 영지에 돌아왔으니 사람들이 전부 부실 보급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떡하지? 전쟁에 징집당한 친인척이 없는 레이나로서는 후작가가 병사들과 아서 경한테 너무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크리스티나’로서의 레이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16549658429102.png“…….”

아서도 틀림없이 마차 밖에서 들려온 소릴 들었을 텐데.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마차 창으로 넘어오는 거리의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16549658536766.jpg“이 얘긴 한나 듣는 데서는 하지 마. 남편이 2년 전에 전사했잖아. 그동안 편지랑 보낸 물건들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떠났다는 걸 알면 너무 슬퍼할 거야.”

16549658536766.jpg“어떻게 숨겨……. 언젠간 알게 될 텐데…….”

16549658536766.jpg“알게 되더라도 그걸 지금 말해 주지는 않아도 되잖아…….”

16549658429096.png“…….”

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싱긋 웃기만 했다. * * *

16549658536766.jpg“다 왔습니다, 나리.”

마차가 멈추어 섰다. 아서가 먼저 내린 뒤 마차에서 내리는 레이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레이나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섰다. 저택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트리스탄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경직되었다. 트리스탄이 그들을 발견하고 예를 표한 뒤 가볍게 달려서 다가왔다.

16549658565727.png“오셨습니까.”

16549658429102.png“이쪽은 내 아내.”

아서가 느닷없이 레이나를 소개했다.

16549658429096.png“?!”

이렇게 갑자기요? 레이나는 당황해서 드레스를 쥔 채 허둥지둥 무릎을 굽혔다.

16549658429096.png“크, 크리스티나입니다.”

트리스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레이나는 어쩔 줄 모르고 위축되었다. 아, ‘크리스티나’세요? 라고 눈에 써 있는 것 같아.

16549658565727.png“…….”

하지만 트리스탄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레이나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16549658565727.png“트리스탄입니다.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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