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기사회생2021.11.28.
아서는 하루 만에 찾아온 줄리어스 후작을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나 주었다.
“후작 각하.”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하는 아서는 언제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담백하고 산뜻한 얼굴이었다.
“…….”
후작은 묵묵히 굳은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가 놓았다. 부실 보급 건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후작은 어제 자신의 실수에 대한 사과만 하러 왔다고 말했다.
“…….”
아서는 눈짓으로 자신의 뒤에서 경호하던 기사들을 바깥으로 물렸다. 아서와 단둘이 꽤 오랜 시간 대화한 후. 집무실에서 나온 줄리어스 후작은 리오넬을 직접 찾아가 정중한 태도로 사과했다.
“미안하네. 자네가 받은 모욕에 사과가 되지 않겠지만, 치료비나마 보상해 주겠네.”
리오넬은 떨떠름하게 사과를 받았다. 후일 보상금을 받은 리오넬이 촌평하기로, 따귀 세 대 정돈 더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였다. * * * 그리고 이틀 뒤. 남은 개선군들이 모두 줄리어스 영지에 도착했다. 아서가 줄리어스 후작령으로 돌아온 지 칠 일 만의 일이었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아서와 함께 가장 먼저 도착했던 개선식 인원의 다섯 배가 넘었다.
‘와…….’
레이나는 창밖으로 외성 지역 주둔지에 꽉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었다.
“저는 일주일 전에 개선식에 경이랑 함께 도착했던 사람들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아서는 싱긋 웃었다.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있는 인원들만 먼저 빠르게 온 거였소. 그날 나와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사이거나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병사들이오. 이동에 시간이 걸리는 병사들은 뒤에 따로 따라오기로 했지.”
아서가 그녀의 곁에 서며 레이나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오늘 도착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줄리어스의 징집병들인 셈이오.”
“아…….”
그랬구나. 어쩐지 먼저 온 분들은 다들 아서 경이랑 비슷한 무장을 하고 있는 것 같더라니.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렇게 예상을 깨고 빨리 올 수 있었던 거구나. 레이나는 뒤늦게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며 납득했다. 그런데 아서 경은 왜 그렇게 급히 왔을까?
“그런데 부인은.”
아서가 장난처럼 손가락 끝을 튕겨 레이나의 앞이마를 살짝 건드렸다.
“언제까지 나를 ‘아서 경’이라 할 거요.”
아서가 미소 지었다.
“아, 죄송해요. ……아서…….”
레이나가 그의 스스럼없는 장난을 쑥스럽게 느끼며 그의 손끝이 살짝 스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레이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직은 좀…… 어색하네요. 편해지면 천천히, 그렇게 부를게요. ……경도 저한테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나이도 어리잖아요.”
아서가 그녀를 보지 않고 시선을 창밖으로 향한 채 반문했다.
“이름으로?”
“…….”
아. ……레이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서는 소리 없이 미소 지은 채 말했다.
“나도 편해지면 그러겠소, 부인.”
* * * 아서는 기사들과 함께 나가 도착한 병사들을 맞이하고는, 몸을 돌려 그들을 인솔해 다시 후작 쪽을 향해 경례했다. 그리고 황제가 있을 서쪽을 향해 황제기를 세우고 경례했다. 줄리어스 후작 내외는 조금 높은 곳에 마련된 자리에 앉은 채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웬일로 후작은 무리하게 나서서 아서나 귀환병들에게 친한 척을 하거나 생색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영지에는 병사들의 완전 귀환을 축하하는, 제대로 된 개선 기념 거리 축제가 온종일 열렸다. 일주일 전의 시행착오도 있었고 이틀 전부터 미리 준비했던 만큼, 첫 번째 개선식보다 훨씬 대단한 규모의 거리 잔치가 벌어졌다. 그것은 이틀 전, 줄리어스 후작이 찾아왔을 때 아서가 요구한 것이었다. 비교도 안 되게 많은 돈이 들어간 만큼 훨씬 체계적으로 알차게 맛있고 진귀한 음식들이 영지와 주둔지 곳곳에 공급되었다. 그리고 후작의 달라진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병사들이 자신들의 이름과 가족 앞으로 도착한 막대한 참전 포상금에 턱이 떡 벌어졌을 즈음. 소식지에 기사가 났다. 【 특종! 아서 경 단독 인터뷰! ― “줄리어스의 보급, 미숙한 부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어. 하지만 줄리어스 후작 각하 쪼잔한 분 아니다” 】 ― 줄리어스의 보급에 부족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후작 각하께서 세간에서 오해하는 것처럼 인색한 분은 아니라는 것. ― 보급이라는 게 원래 중간에 약탈도 당하고 사고도 있을 수 있고 그렇긴 하다. 아서는 이틀 전. 찾아온 후작을 상대로 돌아온 기사들과 참전 용사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리고 후작은, ‘가주’와 동등한 가문 내 공동 지배권을 지닌 후계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문 내 권한과 사유 재산은 별개이니, 사실상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 줄리어스, 참전 용사들에게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전쟁 포상금 지급! 】 【 줄리어스 아낌없이 금고 열어! 참전 용사들 돈방석에 앉아 】 그 대단한 줄리어스조차 순간 비틀거릴 정도의 막대한 포상금이었다. 전사자 가족에 대한 위로금도 잊지 않아, 약속된 유족 연금도 상당한 규모였다. 이러한 보급 누락에 대한 배상금을 병사들 전체에게 지급하는 것을 대가로, 아서는 모호한 태도로나마 후작을 두둔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하나. 【 레이디 크리스티나, 아서 경과 함께 참전 용사 유가족 가정 방문, 뒤늦게 밝혀져 화제! 】 ― 그분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이신 줄 몰랐어요. ― 아서 경이랑 같이 오셨는데, 뒤에서 조용히 우시더라구요……. ― 소개도 하지 않으셔서 레이디 크리스티나이실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 금발에, 눈이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아서’가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함께, 아서의 귀환 둘째 날, 참전 용사 유가족들을 직접 가정 방문하여 위로하였다는 충격의 특종 보도가 뒤따랐다. 도도하고 까탈스러운 부잣집 아가씨로만 알려졌던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도 않은 채 뒤에 서서 조용히 눈물만 흘리다 갔다니. 오랫동안 숨겨 왔던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찬사와 놀라움으로 소식지들이 들끓었다. 줄리어스는 기사회생했다. 이전보다는 못한 수준이었지만 줄리어스에는 선물과 방문객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의 미담으로 간신히 아슬아슬한 재기에 성공한 줄리어스 후작 내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서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기사회생을 하긴 했는데. 복잡한 마음이었다. * * *
후작 부인은 초조하게 서성였다. 오전 11시부터 약 한 시간가량. 로렌슨 선생이 레이나와 아서에게 다녀오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후작 부인에게 돌아오는 시각은 보통 12시 반에서 1시 사이. 공식적으로는 며칠 전 계단에서 넘어지느라 다친 후작 부인의 팔과 다리를 치료해 주러 로렌슨 선생이 오는 시각이었다.
“…….”
완전히 기가 눌려 아서의 눈치를 보게 되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후작 부인은 레이나에게 맡겨둔 ‘아서의 약점’ 보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시계를 쳐다보며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던 그녀는, 문을 열고 주치의 앨빈 로렌슨이 들어오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뭐래? 오늘도 아무 소식 없어?”
로렌슨 선생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마님……. 이제 겨우 일주일 옆에 있었는데 그 순진하고 쪼그만 게 무슨 벌써 약점 같은 걸 가져오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면 레이나가 하녀 하고 있겠습니까? 이미 어디 스카웃 돼서 간첩이나 첩보 요원 하고 있지.”
후작 부인이 짜증을 부렸다.
“일주일이 왜?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밤낮없이 옆에 같이 있으면서 보고 듣는 게 있을 거 아냐!”
로렌슨 선생은 깊은 한숨과 함께 갑갑한 눈으로 마님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서 경이 호구입니까? 아서 경도 걔가 가짜인 거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면서요. 뻔히 주인마님한테 그런 명령 받았을 거 짐작할 텐데 호락호락하게 자기 약점 같은 거 잡을 수 있게 하고 있겠냐고요. 그쪽은 오 년 동안 진짜 전쟁에 다녀온 사람인데.”
후작 부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어유으으!” 하면서 히스테릭한 소리를 내질렀다. 분하고 속이 터졌다. 처음부터 은밀하게 명령하기라도 할걸. 왜 보란 듯이 아서 앞에서 레이나를 압박하고 데리고 나와서는. 진득한 대화 같은 거 할 것도 없었는데, 아서에게 내 위력을 과시하느라고 대놓고 레이나를 데리고 나와 오래도록 시간을 끌어 버렸다. 내가 네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탓이었다. 무슨 얘기 하는지 속이나 타라고 일부러 더 시간을 끌며 한참 잡아 두었다가 돌려보냈던 건데. 오히려 그 때문에 속태우게 된 건 그녀 자신이었다. 후작 부인은 초조하게 부채 끝을 물어뜯었다. 그래 버렸으니 레이나가 나한테 뭐라도 명령을 받았을 걸 짐작하겠지? 로렌슨 선생 말대로였다. 엄청나게 경계 당하고 있을 거야.
“…….”
양심은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후작 부인은 심사가 뒤틀렸다.
‘아니 그래도 일주일이면, 약점까진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제가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무슨 표시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후작 부인이 홱 고개를 돌리며 로렌슨 선생에게 말했다.
“앨빈. 아들한테 한 번 다녀와 봐. 레이나 할머니한테 가 있는 그 애, 테일러한테 말이야.”
아무래도 테일러를 한 번쯤 미끼로 던져 줘야겠어. 후작 부인의 눈이 번뜩였다. * * * 아서의 개인 정원. 레이나는 자기 접시의 마지막 양송이를 포크로 콕 찍어 입에 쏙 넣으며 입안 가득 퍼지는 그 따끈하고 고소한 풍미에 행복해했다. 스테이크의 육즙이 배어 있는 촉촉한 갈색 양송이가 일품이었다. 너무 맛있어……. 그러면서 레이나는 슬쩍 아서의 접시를 확인했다.
“…….”
역시. 버섯을 먹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접시에 처음부터 양송이가 몇 개 있었는지 확인했는데. 스테이크가 거의 사라졌는데도, 먹음직스럽게 구운 세 개의 양송이들은 전부 그의 접시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단 한 개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걸 보고 레이나는 거의 확신했다. 아서는 버섯을 먹지 않는다. 지난번 스테이크 접시에 있던 다른 종류의 버섯도. 닭고기 버섯 스튜도. 버섯 수프도 아서는 손대지 않았다. 맛있는데. 왜지?
“아서 경.”
“응?”
레이나가 그의 접시 위에 1초쯤 시선을 두었다가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버섯을 싫어해요?”
“……어? 아.”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아서는 멈칫하고, 아닌 척할까 말까 고민하듯 그 위에서 식기를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미 들켰다는 걸 깨달은 듯 그냥 머쓱하게 웃으며 버섯 멀찍이 포크를 내렸다. 뭐야……? 편식하는 거 창피해하는 거야? 레이나는 갑자기 조금 고무되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 그에 대해 뭔가 알아낸 기분이 들었다. 아서가 머쓱한 듯 미소 지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오?”
“아뇨. 그냥……. 의외라서요.”
레이나가 포크 끝을 물고 작게 웃었다.
“그거 맛있는데…….”
아서는 슬쩍 웃으며 레이나를 보았다.
“……당신은 좋아하는 모양이군. 더 가져오라고 할까?”
“네? 아니에요. 안 드시면 그냥 그거 저…….”
―까지 말하다가 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거 뭔가 아가씨다운 행동이 아닌 것 같은데. 크리스티나 아가씨라면 사람을 불렀으려나? 하지만 겨우 양송이 때문에?
“음…….”
레이나는 그냥 사양하려고 했다. 아서가 피식 웃더니 아직 사용하지 않은 디저트 포크로 자기 접시의 양송이를 찍어서 내밀었다. 자그마한 야외용 원형 식탁에서 그들의 자리는 제법 가까웠다.
“…….”
에라 모르겠다. 레이나는 그냥 조금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살짝 상체를 기울여 받아먹었다. 역시 맛있다. 입을 가리고 오물거리고 있으니 아서가 두 번째 양송이를 또 찍어서 내밀었다.
“…….”
아서가 웃었다.
“못 먹는 건 아닌데. 좋아하지 않는 건 맞소.”
레이나는 한 번 더 받아먹고는, 그걸 삼킨 뒤 물어보려고 했다. ―왜요? 그런데 대답은 다른 곳에서 왔다.
“독버섯 먹고 고생한 적이 있어서.”
낯선 목소리의 발원지로 고개를 돌린 아서의 표정에 놀라운 빛이 번졌다.
“카일.”
응?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갑자기 나타난 금발의 미남자를 쳐다보았다.
“…….”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안녕.”
응? 카일? 그 이름 어디선가…….
“…….”
레이나는 멍하니 얼어 있다가 다음 순간 입을 가리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카일 황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