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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순조롭게 꼬여 간다 (27/210)

#27. 순조롭게 꼬여 간다2021.12.02.

16549660210852.png“카일 황태자?!”

아이고. 황태자가 곤란한 듯 웃으며 황급히 레이나의 입을 손으로 덮어 막았다. 그리고 소리를 낮추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작게 말했다.

16549660210857.png“쉬이. 내가 여기 있는 건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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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그에게 입이 막힌 채 완전히 경직되었다.

16549660210852.png“죄,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라니. 황태자라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진짜 황태자인 거야? 그건 그렇다 치고 내 호칭 엄청나게 무례했잖아. 황태자는 문득 앞에 있는 아서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레이나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항복하듯 들어 보였다.

16549660210857.png“실례.”

아서가 싱긋 웃었다. 레이나는 그에게서 놓여나자마자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예를 갖추며 더듬거렸다.

16549660210852.png“죄송합니다. 이런 누추한 곳에 걸음 하실 거라 상상하지 못해 결례를 범했어요.”

16549660210857.png“아, 괜찮아, 괜찮아. 편히 앉아요, 레이디.”

황태자는 태연히 근처에 있던 여분의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16549660210857.png“그쪽이 크리스티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사교계 최고의 미인이라고. 만나서 반가워요.”

카일은 레이나의 손을 맘대로 잡아 가져가더니 레이나를 보며 웃는 얼굴로 키스하고 놓아 주었다. 아서가 불편하게 미소 지었다.

16549660210889.png“황태자 전하. 합석 허락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16549660210857.png“왜 이래, 야박하게. 참고로 저렇게 부를 땐 기분 나쁘다는 뜻입니다.”

16549660210889.png“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

16549660210857.png“이번엔 그렇다는 뜻이군.”

레이나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렘브란트 경도 만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었는데, 황태자 전하라니. 후작 부인이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감히 황태자를 만날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일 터. ‘크리스티나’로서 봐선 안 될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어떡하지? 지금 와서 도망갈 수도 없고. 레이나는 황태자의 시선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16549660210852.png“…….”

그나마 안심이 되는 구석은 오늘의 메이크업을 마리나가 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요 며칠 가끔 마리나가 아닌 브로디가 아침 메이크업을 해 주었지만, 오늘 아침 메이크업을 해 준 건 마리나였다. 브로디가 화장을 해 주면 아가씨처럼 보이지 않지만, 마리나가 메이크업 한 날 레이나는 확실히 크리스티나와 닮았다. ……그게 그나마 안심이 되는 구석이라면 구석이었지만……. 솔직히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레이나는 필사적으로 땅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황태자의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본 적이 있다면, 메이크업이고 나발이고 나중에 진짜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만났을 때 티가 날 텐데.

16549660210852.png“…….”

아서는 ‘잘생긴’ 황태자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레이나를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다며? * * *

16549660252804.jpg「저기……. 테일러. 뭐 하나 물어봐도 돼?」

16549660252804.jpg「내가 아는 부엌 하녀 하나가 화상을 입은 지 꽤 오래됐는데…….」

16549660252804.jpg「아직도 가끔 다쳤던 곳이 아프고 열이 난다더라고…….」

16549660252804.jpg「그러기도 해?」

16549660252804.jpg「저기 혹시…… 테일러.」

16549660252804.jpg「나이가 든 사람들이 기억을 깜박깜박하는 거 말인데…….」

16549660252804.jpg「저기……. 테일러.」

16549660252804.jpg「테일러…….」

16549660271719.png“…….”

별것도 아닌 질문들. 레이나는 그런 걸 물어볼 때마다, 그에게 값을 치르지 않고 슬그머니 물건을 훔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염치없어했다. 뭘 그렇게 어려워하나 했는데……. 테일러 로렌슨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16549660271719.png“후우…….”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레이나가 그동안 친구 이야기라며 물어봤던 것들은 전부 자기 할머니 이야기였다. 레이나에게 나 말고 다른 친구가 없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겨우 소식지 같은 거나 가져다주면서 그 애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니. 그래도 내가 그 애에겐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레이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49660271719.png‘……왜 말을 안 했을까.’

줄리어스 일가와 관계가 있다던 기밀이랑 관련이 있을까?

16549660271732.jpg“의사 선생님.”

16549660271719.png“아, 네.”

간병인 아주머니가 미소로 그를 부르고선 테일러가 내어 준 약그릇을 받아들었다.

16549660271732.jpg“의사 선생님께서 오시고서 할머니 상태가 부쩍 좋아지셨어요.”

테일러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가슴을 짚고 웃었다.

16549660271719.png“그래요? 다행이네요.”

간병인은 빙그레 웃고는 약을 들고 나갔다.

16549660271719.png“…….”

테일러는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책상에 손을 짚어 몸을 기대었다.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일단 테일러는 그녀의 할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본능적으로 그는 할머니가 레이나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직감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의사로서 그의 환자이기도 했으니까.

16549660271719.png“…….”

테일러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레이나의 할머니, 이오나의 증상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다. 오 년이 된 전신 화상. 지금은 거의 흉터가 되었고 남아 있는 것은 등에 자리한 작은 범위의 상처뿐이지만. 그런 염증이 그렇게 오래 갈 수가 있나? 아니……. 그 전에. 염증이 낫지 않고 그렇게 오래 가는데도 사람이 무사할 수가 있나?

16549660271719.png“…….”

테일러는 짧은 한숨과 함께 내성의 전문 책방에 가서 사 온 의학 서적을 펼쳤다.

16549660271732.jpg“의사 선생님.”

쟁반을 든 간병인이 다시 문간에 나타나 그를 불렀다.

16549660271719.png“네?”

테일러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16549660271732.jpg“로렌슨 선생님께서 오셨어요. 선생님의 아버지이시죠? 며칠 전에 같이 오신…….”

16549660271719.png“아…… 네!”

테일러는 반가움에 책에 책갈피를 꽂아 두고 그대로 일어났다. * * *

16549660271719.png“아버지!”

1654966030148.jpg“그래. 잘하고 있느냐?”

앨빈 로렌슨은 마차에서 막 몸을 내리고 마부가 건네주는 짐을 받아들고 있었다.

16549660271719.png“네, 뭐. 그럭저럭…….”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테일러는 아버지가 넘겨준 커다란 약재 꾸러미를 받아 안으며 자신 없는 얼굴을 했다.

16549660271719.png“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아, 오 년 전에 할머니 화상 치료를 맡으신 게 아버지셨다고 하셨죠?”

1654966030148.jpg“어. 그랬었지. 정말 죽을 뻔한 걸 간신히 살렸었다. 천운이었지. 건강하시냐?”

그들은 집을 향해 발을 옮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16549660271719.png“예. 상태가 그리 나쁘진 않으세요. 연세를 듣고 걱정한 거에 비해 몸 상태도 좋으시고. 대체로 기분도 좋으시고. 절 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긴 하시지만요…….”

1654966030148.jpg“아, 그래?”

16549660271719.png“네. 그런데 몇 년 뵌 간병인 아주머니께도 그러신다네요. 건망증이라기엔 좀 이상한데…….”

아버지를 만나자 생각했던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16549660271719.png“혹시 할머니께서 머리를 다친 적이 있으신가요? 간병인 아주머니도 모른다고 하시더라구요.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러셨다고…….”

1654966030148.jpg“흠……. 나도 오 년 전에 한 번 뵀을 뿐이라 잘 모른다만.”

앨빈 로렌슨은 테일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1654966030148.jpg“노인들 가운데 종종 그런 케이스가 있긴 하지. 근래에는 그게 그냥 노환이 아니라 질병의 일종이라는 학계 주장도 있더구나. 혹시 신경질이 많다거나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거나 하진 않고?”

16549660271719.png“네. 그렇진 않으세요.”

1654966030148.jpg“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구나. 집 뛰쳐나가서 길 잃거나 하시지 않게 문단속 잘하고 보살피거라.”

약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테일러가 눈을 껌벅거렸다.

16549660271719.png“집을 뛰쳐나가요?”

1654966030148.jpg“그래. 그런 환자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앨빈 로렌슨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6030148.jpg“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집을 나가서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리지. 돌아와야 한다는 것조차도.”

테일러의 표정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애매해졌다. 그냥 노환인 건가? 주변에서 칠십이 넘게 나이 든 어른이라곤 하녀장 허스트 부인 외엔 본 적이 없어서 와닿지 않았다. 허스트 부인은 레이나의 할머니와 같은 연배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까랑까랑한 데다 아버지보다 정정하고. 집사장 짐도 겨우 육십, 그녀보다 10년은 젊었다. 그 외에 유일하게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인 후작 대부인은 저택에 머물지 않고 멀리 별장에서 따로 살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약한 노인이란, 테일러에게 이오나 할머니가 처음이었다. 하긴, 애초에 나이가 칠십이 넘은 노인을 보는 일 자체가 드물긴 하지만…….

16549660271719.png“…….”

레이나가 할머니를 잘 모신 덕일 테니 복이라 해야 하나. 테일러는 약재를 풀어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찬장에 정리하며 말했다.

16549660271719.png“그래도 보호자랑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네요. 혹시 다친 적이 있으신지……. 언제부터 그러셨는지.”

테일러가 슬그머니 레이나를 볼 밑밥을 깔았다.

1654966030148.jpg“그래.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러 왔다. 증상 파악하고 전할 말은 정리해 두었니?”

16549660271719.png“네. 문제없어요.”

뜻밖에 선선히 나온 대답에 로렌슨 선생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자식, 제법인데?

1654966030148.jpg“…….”

그러나 다음 순간, 앨빈 로렌슨은 말없이 빤히 아들을 쳐다보았다. 젊고 멀끔한 아들의 반반한 낯짝이 새삼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로렌슨 선생이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1654966030148.jpg“너 혹시…….”

16549660271719.png“네?”

저택에서 오래 나와 있어야 한다고 했을 때, 주저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테일러가 태연한 척하며 약재 장을 닫고 반문했다.

16549660271719.png“……왜요?”

앨빈 로렌슨이 물었다.

1654966030148.jpg“너 혹시 저택에 만나는 애 있니?”

16549660271719.png“아뇨?”

뻔뻔하게 즉답이 나왔다.

1654966030148.jpg“그럼 너 선 볼래?”

16549660271719.png“아뇨?”

표정이 변한 정색하는 즉답. 로렌슨 선생은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1654966030148.jpg“왜? 맥더프 경이라고, 제법 괜찮은 젠트리* 가문에 작은딸이 열아홉이라는데. 그 집에서 너한테 관심 있다고 하더라만.”

테일러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16549660271719.png“과분한 관심 감사하네요. 하지만 아직 귀족 사교 모임 금지잖아요? 귀족 금혼령도 안 풀렸고.”

로렌슨 선생이 맞받아쳤다.

1654966030148.jpg“어차피 아서 경이 수도에 가서 개선식을 마치면 곧 사교 모임 금지도, 귀족 금혼령도 풀릴 거 아니냐. 다들 벌써 물밑 접촉 시작했지. 너도 나이가 딱 좋으니까…….”

테일러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16549660271719.png“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리고 누군지는 안 알려드릴 겁니다.”

1654966030148.jpg“…….”

16549660271719.png“…….”

아들과 눈싸움을 하던 로렌슨 선생이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1654966030148.jpg“……혹시 저택 하녀 애들 중 하나냐?”

16549660271719.png“…….”

테일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렌슨 선생은 안경을 들고 손가락 끝으로 구겨진 미간을 눌렀다. 말 안 해 준다니 뻔하구만.

1654966030148.jpg“솔직히 넌 젠트리 아가씨도 만날 수 있어. 그건 알지?”

16549660271719.png“…….”

테일러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로렌슨 선생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귀 끝이 붉어진 아들놈이 한심해 보였다. 아무리 대륙에서 제일 대우 좋은 하녀라도, 하녀는 그냥 하녀다. 그가 줄리어스 가문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그다지 신분과 관련된 편견이 없기는 해도. 혼인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놈은 귀족 가문에도 명함 내밀 수 있는 녀석인데.

1654966030148.jpg“…….”

30년 줄리어스 가문에 헌신하며 의사로서의 명성을 쌓고, 많은 귀족들과 관계 맺으며 이제 스스로도 젠트리라 할 만한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기껏 아들이 마음에 둔 게 하녀라니 못마땅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성정이 누굴 닮았는지 뻔하기도 했다. 앨빈 로렌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4966030148.jpg“……사고는 치지 말고. 나중에 데려와 봐라.”

테일러의 눈이 바로 반짝였다.

16549660271719.png“진짜요?”

로렌슨 선생은 얄미운 눈으로 아들의 등짝을 때렸다.

1654966030148.jpg“보기만 하겠다는 거다. 아무나 허락한단 뜻은 아니다.”

  * * *

16549660210889.png“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바로 수도로 가신다면서요.”

황태자가 포크를 들더니 아서의 접시 위에 하나 남은 양송이를 찍어 먹었다.

16549660210889.png“…….”

16549660210857.png“……미안. 레이디가 먹는 걸 보니 맛있어 보여서.”

아서가 한숨을 내쉬며 자기 머리를 손 갈퀴로 쓸어 넘겼다.

16549660210889.png“카일.”

16549660210857.png“좀 봐 줘. 미루고 싶다고.”

16549660210889.png“…….”

16549660210857.png“‘사생아에게 구해져서 돌아와?! 차라리 명예롭게 전사했어야지!’”

누구 흉내를 내는 건지. 목소리를 바꾸어 연극 조로 이야기한 황태자는 ‘으으.’ 하며 과장 섞인 몸서리를 쳤다. 대체 누가 황태자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거지?

16549660210857.png“렘브란트도 보고 가야지. 와 있다며.”

그러더니 레이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16549660210857.png“내 사촌입니다. 알죠? 같이 볼래요?”

16549660210852.png“아, 아뇨!”

그렇구나. 황태자 전하의 외사촌 형제였지, 렘브란트 경은……. 순간 레이나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추었다. 누군가 아서의 개인 정원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응? 저 사람은……. 렘브란트 경의 수행원이잖아. 나한테 황실 소식지를 팔았던……. 레이나는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멀뚱멀뚱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16549660210857.png“아, 미안. 사실 이미 오라고 했어.”

황태자가 레이나의 시선을 따라 그를 보더니 손짓했다.

16549660210857.png“렘브란트.”

레이나가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16549660210852.png“네?!”

저 사람이 렘브란트 경!?

16549660210889.png“……하아.”

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 *젠트리: 귀족 가문의 사람. 넓은 의미에선 작위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고, 보통은 귀족의 자제이면서 작위가 없는 차남 이하를 가리킨다. 귀족의 문장을 사용하며, 사회의 지배계층이다. 하급 귀족이나 귀족 아래의 부유한 중소 지주, 지방의 유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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