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의존2021.12.05.
렘브란트가 활짝 웃었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영광입니다, 레이디.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레이나는 새하얗게 질린 채 숨을 멈추었다. 저 사람이 렘브란트. 수행원이 아니라, 렘브란트. 죽었다. 난 이제 죽었다……. 「렘브란트 경은 절대 안 돼.」 「이미 날 봤어.」 「날 알아봤을까.」 「크리스티나입니다.」 「돈을 드려야 될까요?」 「많이는 어렵지만…….」 「저한테 버리시면 안 될까요?」 갈팡질팡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레이나는 차마 평소처럼 ‘크리스티나입니다.’ 소리를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
레이나의 이상을 감지한 아서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부인?”
“네?”
아…….
“아.”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는 레이나를 보고 아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원인을 찾듯 렘브란트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다시 레이나를 보며 더 가까이 부축하듯 잡았다.
“부인.”
이 정도로 레이나가 겁에 질릴 거라 예상하지 못해 당황한 렘브란트가 얼굴을 굳혔다. 창백해진 레이나가 비틀거리듯 뒷걸음쳤다. 레이나가 넘어질 것 같자 렘브란트가 얼른 다가가 그녀의 반대쪽 팔을 잡으며 몸을 숙였다.
“레이디.”
“…….”
두 사람의 눈높이가 가까워졌다. 렘브란트가 작게 목소리를 낮추어 빠르게 말했다.
“놀라지 말아요. 괜찮아요.”
레이나가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 렘브란트가 달래듯 작게 반복했다.
“괜찮아요.”
당황한 아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기묘하게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 아서 경.”
렘브란트가 아서를 바라보았다.
“잠깐 부인과 대화해도 되겠습니까?”
“…….”
자신의 부탁이 실례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안다는 듯이, 굉장히 정중하고 미안해하며 예의 바른 태도였다.
“저쪽에서, 보이는 곳에서 대화하겠습니다. 부인께서 오해가 있으셔서 놀라신 것 같습니다.”
“…….”
그는 정말로 조심스러워 보였다. 남편인 아서가 거절한다면 자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고, 정중히 사과하겠다는 듯이.
“아서 경과 부인의 명예에 해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
아서는 렘브란트와 레이나를, 그리고 그녀의 팔을 틀어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나의 팔을 구속하듯 강하게 쥐고 있는 자신과 달리, 렘브란트는 부축하는 의미 이상으로 레이나에게 손을 대지도 않은 채였다.
“…….”
그는 그저, 정중하고도 간곡했다.
“…….”
아서는 한참 만에 굳은 얼굴로 레이나의 팔을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서 경.”
“…….”
렘브란트는 처음의 즐거워하던 얼굴을 싹 거둔 채, 배려 깊은 태도로 레이나를 에스코트했다. 레이나는 떨면서도 그의 손을 잡고 그들의 시야에 닿는 저편 작은 분수대 쪽으로 멀어져 갔다. 렘브란트는 놀란 레이나를 배려하여 그녀의 발밑을 봐주며 아주 느린 속도로 걸었다.
“…….”
황태자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서? 왜 그래.”
“아. 네.”
아서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누구의 질문에, 무슨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지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서는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얼음처럼 앉아있다가. 잠시 후 태연하게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
황태자는 가만히 그런 아서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아서의 시가에 불을 대어 주었다. 아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황태자가 불붙여 주는 시가를 빨아들였다.
“…….”
테일러 쪽만 진짜인 줄……. ……저쪽은 아닌 줄 알았는데.
“……후우.”
황태자의 반대 방향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담배를 물면서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다.
“…….”
일전에 떠보았을 때. 레이나의 반응이 떠올랐다. 테일러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명백히 크게 뛰던 심장 소리. 렘브란트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저 약간의 동요. 그래서, 그쪽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
트리스탄이 보고했던 것이 떠올랐다. 레이나에 대해 조사하던 남자. 이곳에 머문 지 겨우 2주 된, 황실 귀빈 렘브란트 경의 수행원. 위험한 남성 편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경계하셔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잘도 홀려놓았다.
“…….”
여러 가능성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레이나’에 대해 조사하던 건 ‘렘브란트’인가, ‘렘브란트의 수행원’인가. 혹은 둘 다일 가능성도 있는가.
“…….”
아서가 심상찮은 얼굴로 찻잔의 금테를 노려보았다.
“아서.”
황태자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살피듯 그를 불렀다. 아서가 싸늘하게 냉소했다.
“정숙한 내 부인한테.”
아서가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빨며 말을 맺었다.
“왜 이렇게 자꾸 외간 남자들이 꼬이지.”
아서가 오러를 펼쳤다. · · · [미안합니다. 이렇게 놀랄 줄 몰랐어요.] [괜찮아요?] […….] [혹시……. 도움이 필요해요?] * * *
“혹시……. 도움이 필요해요?”
그 말에. 레이나의 멍해진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후두둑. 당황한 렘브란트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녀에게 반걸음 다가갔다.
“레이디.”
“죄송합니다…….”
레이나는 무슨 사과를 하는 건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에서, 그간 그녀의 마음고생이 상당했다는 게 느껴졌다. 아이고……. 렘브란트는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고만 생각한 스스로를 어쩔 줄 모를 정도로 미안해져 버렸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울지 말아요.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죄송해요.”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렘브란트가 당황해서 일단 손수건을 건네었다.
“…….”
레이나는 렘브란트가 건넨 손수건을 사양하고, 자신의 소매 안 손목에 감겨 있던 레이스 손수건을 풀어서 눈물을 닦았다.
“죄송…….”
“사과하지 말아요. 이야기해 봐요. 필요한 게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어요?”
레이나가 붉어진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머뭇머뭇 물었다.
“저를…… 고발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이고……. 렘브란트는 탄식하며 침음을 삼켰다. 진짜 크리스티나 대신 이 자리에 서며 그녀가 홀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제서야 머릿속에 그려졌다.
“고발하지 않습니다.”
레이나는 비로소 안심한 듯 빨갛게 젖은 눈으로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렘브란트에게 감사의 눈인사를 보내고 훌쩍 코를 들이마셨다.
“……후작님이랑…… 주인마님께도…….”
“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게 됐다는 걸 그쪽에서 모르시길 바라시는 거죠?”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렘브란트는 계속 속으로 아이고 소리를 삼키며 안타깝게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께도…….”
“네. 카일 황태자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한테도 알려 주지 않을게요. 그러니 그만 울어요.”
레이나가 살짝 입매를 올리며 웃었다. 눈물 젖은 얼굴로 그러는 게 안쓰러웠다. 표면적으로 남의 아내만 아니면 한 번 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렘브란트가 달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 뚝. 슬슬 저쪽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으니까요.”
“…….”
레이나가 슬그머니 황태자 쪽 방향의 눈치를 보며, 렘브란트를 올려다보았다. 렘브란트가 눈썹을 꺾어 웃으며 레이나를 안심시켰다.
“카일 황태자도 보고 있는데, 아서 경의 아내를 내가 울린 것 같잖아요. 아무 일 없을 테니 울지 말아요.”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미안해요. 당신을 이렇게 놀라게 할 줄 몰랐습니다. 당신한텐 심각한 일이었을 텐데……. 사실 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재미있어했어요.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렘브란트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는 것도 진심입니다. 혹시 곤란에 처해 있습니까? 후작 내외라든가. 아서 경이라든가…….”
렘브란트가 주의 깊게 그녀의 눈을 살피며 물었다.
“누군가 당신을 힘들게 하고 있나요?”
“…….”
레이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말하지 못하고 약하게 웃기만 하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원래부터 아셨던 거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다만 그녀는 머뭇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렘브란트가 피식 웃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레이나가 훌쩍 코를 들이켰다.
“그래야 다음에는 안 들키죠…….”
다른 분께 들켰을 때도 경처럼 봐주실지는 모르는 거고……. 하는 소리가 기어들어 가듯 덧붙었다. 렘브란트는 그녀가 불쌍해서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난 화가잖아요. 그런 걸 알아보는 눈썰미는 남다르거든요. 당신을 이미 본 적 있기도 했고.”
그리고 그는 레이나를 도와주겠다는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
“누구누구 알아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알아 두려고 묻는 겁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신뢰가 부족하고, 혹시라도 말했다가 전부 공범으로 얽혀 들어갈까 봐 그러는 거겠지. 렘브란트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짧게 끄덕였다.
“알았어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일단 지금은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거 같으니까. 음……. 대신 내가 나중에 도와주러, 당신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가도 될까요? 후작 부부가 모르길 바란다면 초상화 핑계는 어려울 거고. 다른 걸로.”
“…….”
레이나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끄덕했다. 렘브란트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이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이제 진정됐어요?”
“네. ……고맙습니다.”
렘브란트가 레이나를 보고 살짝 눈썹을 꺾으며 동정하듯 미소 지었다.
“……어떡하지? 돌아가야 할 텐데. 눈이 붉네요. 운 티가 나요. 뭐라고 입을 맞출까요?”
* * *
“아서.”
황태자가 강하게 아서의 팔을 잡았다.
“그만해.”
“…….”
황태자가 힘주어 다시 말했다.
“오러 쓰고 있지. 그만둬. 악화될 거야.”
“…….”
그의 눈빛엔 강압적이지만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다.
“그거 오래 쓰면 안 돼. 알잖아.”
“…….”
아서가 오러를 거두었다. 공기가 달라진 걸 느낀 황태자가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턱을 괴고 아서를 쳐다보았다.
“……렘브란트가 네 부인이랑 무슨 이야기 했는지는 내가 물어볼게. 허튼짓할 놈 아니야. 왜 그렇게 예민하게 그래? 설마 내 사촌이 네 부인이랑 바람이라도 났을까 봐 그래?”
“…….”
아서는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굳은 표정이었다. 황태자가 짧은 헛웃음과 함께 비아냥거렸다.
“애처가인 건지, 의처증인 건지. 팔려 간 혼인이었으면서 아주 세기의 사랑 났네.”
“…….”
아서가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물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
“마음은 감사합니다.”
태도는 아주 단정했다.
“…….”
잠자코 아서를 쳐다보던 카일 황태자가 그를 불렀다.
“아서.”
“네, 황태자 전하.”
“너무 오러에 의존하지 마.”
“네. 눈이라면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게 아니라.”
황태자가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오러에 의존’하지 말라고. 너, 오러가 있으니까 사람을 믿지 않고 자꾸 시험하잖아.”
“…….”
아서의 얼굴은 시종 단정했다. 하지만 단정하게 굳어 있기도 했다. 카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내기 싫었으면 안 보냈으면 됐잖아. 내 부인이라고, 여기서, 내 눈앞에서 이야기하라고. 말했으면 됐잖아. 왜 보냈어?”
“…….”
“일부러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려고, 둘이 무슨 이야기 하는지 듣겠다고 보낸 거 아냐?”
잠자코 있던 아서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카일.”
“어.”
아서가 언제나 차가운 감이 도는 회색 눈을 들어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오러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날 다 아는 것 같아?”
“…….”
황태자가 가만히 그를 보고 있다 한숨과 함께 네 맘대로 하라는 듯 손을 들고 시선을 돌렸다. 아서는 냉랭한 눈으로 새 시가를 하나 꺼내 그 끝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