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명불허전 아가씨 (35/210)

#35. 명불허전 아가씨2021.12.30.

포로롱…… 짹짹.

16549662492024.png“…….”

레이나는 뺨에 느껴지는 선선한 가을바람과 오전의 햇살, 그리고 새소리 속에서 눈을 떴다. 조금 늦잠을 잔 아침에는 늘 그렇듯. 아서가 없고, 브로디가 있고, 문 앞에는 기사님이 한 명. 그리고 로렌슨 선생님이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내리며 레이나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달콤한 아침이었다.

16549662492024.png“…….”

십 년 넘게 하녀 생활을 했는데도 그새 익숙해졌다고 깨끗하고 포근한 남의 침대에서 늦잠을 자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책 없는 몸이 놀라웠다. 행복해하며 조금이라도 더 여기 있고 싶다고 이불 속에 파묻혀 있고 싶어 하는 몸에게 새삼 미안했다. 세 시간 자는 삶으로 돌아가면, 일주일 만에 적응해낼 수 없겠지. 썩은 나무 침대의 눅눅한 이불 위로 돌아가면 이 깨끗하고 포근한 침대가 그리워질 것이다.

16549662492024.png“…….”

레이나는 인기척을 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브로디가 다가와 그녀가 기사와 의사 앞에서 잠옷 차림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숄을 걸쳐 주었겠지만…….

16549662492024.png“……?”

레이나는 꽁꽁 싸맨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숨결에 희미하게 남은 와인 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서히 간밤의 기억이 돌아왔다. · · · 르나하 뭐라더라. 아주 귀하고 비싼 최고급 와인이라고 했다.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께서 결혼하시기 사흘 전 밤, 황후 폐하의 오라비이신 카를 클라인 공께서 직접 공수해 와 세 분이서 함께 기울인 바로 그 와인이라고.

16549662492024.png「…….」

  그런 이야기까지 듣자, 레이나는 차마 황태자가 권하는 잔을 에둘러 거절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아서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리고 이 자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시고 죽을망정.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이름을 걸고 앉은 자리에서 그 잔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16549662492049.png「아서와 같은 나이예요, 이 와인.」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황실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해에 담근 와인을 아이가 장성해 결혼할 때에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고. 아서에게 선물하고 싶어 그 와인을 구하느라 꽤 고생했다며 웃었다. 와인의 총본산인 르나하에서도 가장 귀하고 비싼 와인으로, 옛 왕조가 몇백 년 동안 싹쓸이하며 개인적으로만 마셔서 어지간한 귀족들도 맛볼 수 없었다던. 지금은 매년 황실이 싹쓸이하고 있다는 어떤 유명한 포도밭의 와인이라 했다. 그런 와인이 내 입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는 의심이 되었지만……. 모르겠다. 이미 피하기는 늦은 일이었다. 황태자는 그렇게, 몹시 귀하고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와인을 아서와 레이나에게 한 잔씩 따라 건네주었다. 그 자신의 잔도 채운 뒤. 황태자는 빙그레 웃으며 잔을 살짝 위로 들고 짧은 건배사를 말했다.

16549662492049.png「아서와 레이디를 위하여.」

  적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이 찰랑이는 루비처럼 보였다.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황태자는 잔을 제 쪽으로 당겨 웃으며 덧붙였다.

16549662492049.png「그리고 라이언 달튼을 위하여.」

  아서도 결국 피식 웃고는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알싸하고 향기로운 술이 크리스털 잔 안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레이나는 두 사람의 템포에 맞추어, 잔을 입술에 대고 와인을 입안에 머금었다. 독특한 나무 향과 섬세하고 부드러운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 · ·

16549662492024.png“…….”

그래, 뭐 어떡하겠어. 난 최선을 다했다. 레이나는 그냥 초탈해 버렸다. 그래도 그 한 잔은 받아 마셨다. 의무를 다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건지 이걸 난감해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16549662492064.png“아가씨, 괜찮으세요?”

브로디가 다가와서 물어봐 주었다.

16549662492024.png“아, 응.”

16549662492064.png“불편하게 옷을 다 입고 주무시구…….”

브로디가 조금 곤혹스러워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16549662492064.png“원래 아서 경께서 아가씨 옷 입고 주무신 날은 갈아입혀 달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오늘은 별다른 말씀을 안 해 주셔서요. 제가 늦게 와서 몰랐어요. 죄송해요. 불편하게 주무셨겠네요.”

16549662492024.png“아…….”

아서 경이? 그러고 보니 아서 경은…….

16549662492064.png“갈아입으시는 거 도와 드릴까요?”

16549662492024.png“어, 응…….”

레이나는 어색하게 브로디의 손을 잡고 일어나 가림막 뒤로 가서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16549662492024.png“…….”

아서 경은 어제 황태자 전하랑 이야기 잘 나누셨을까? 잘 마무리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어제 그렇게 또 잠들어 버려서…….

16549662492024.png“…….”

아서 경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시는 분 같던데……. 지금 아서 경은 황태자 전하랑 계실까? 레이나는 브로디의 도움을 받아 어제부터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었다. ……오늘도 황태자 전하를 만나게 되려나? 황태자 전하 때문에 ‘크리스티나’ 아가씨처럼 보이는 메이크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의식하다 보니 오늘 와준 하녀가 마리나가 아닌 것이 신경 쓰였다. 오늘 메이크업은 브로디가 해 주는 걸까? 마리나가 도와줘야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아가씨처럼 보이는데……. 레이나는 브로디가 입혀주는 편한 실내용 드레스에 팔을 끼워 넣으며 살짝 물어보았다.

16549662492024.png“마리나는?”

브로디가 조그맣게 소리를 낮추어 입 모양만으로 속삭였다.

16549662492064.png‘크리스티나 아가씨한테.’

아…….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니, 아닌가? 레이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태자 전하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마리나를 보내 달라고 강하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비상 상황인 거잖아. 아직 황태자가 와 있다는 이 모든 급한 사정을 후작 부인 쪽에 전달하지 못한 채였다. 어떡하지? 레이나는 짧게 고민한 후 일단 브로디를 따라서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16549662492024.png‘……메이크업. 마리나가 필요해.’

순간 브로디가 드레스의 끈을 당겨 주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레이나의 눈치를 보다가 조그맣게 물어보았다.

16549662492064.png“왜……? 내 메이크업 별로야……?”

……응? 생각지 못한 반응에 레이나가 얼떨떨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초조한 빛이 돌던 브로디의 얼굴이 이내 간절해졌다.

16549662492064.png“나 아가씨한테 가기 싫어……. 마리나가 아가씨한테 시달리는 거 보고 내가 네 담당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16549662492024.png“…….”

레이나의 눈이 멍해졌다. 브로디가 불쌍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49662492064.png“뭐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주면 안 돼? 내가 고칠게. 메이크업? 메이크업이 별로야? 어디를 어떻게 고치면 맘에 들까?”

16549662492024.png“…….”

아……. 솔직히. 브로디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레이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만 해도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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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62548804.png“황태자가 아서랑 있었다고?”

집사장 짐이 면구스러운 얼굴로 뻘뻘 땀을 흘리며 말했다.

1654966254881.jpg“네……. 아서 경의 전용 응접실에서 아침에 아서 경이랑 같이 나오셨답니다.”

후작이 띵해진 머리를 짚고 비틀거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귀빈이 한 지붕 아래 있었던 걸 코앞에 두고도 몰랐구나! 기껏 렘브란트 경을 통해 보낸 호의가 황태자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니!

16549662548804.png“지금은?!”

1654966254881.jpg“지금은 헤어지신 것 같습니다. 같이 나가셨지만 아서 경 혼자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가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군 쪽으로 돌아가신 게 아닐지…….”

후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집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문이 막혔다가 버럭 소리쳤다.

16549662548804.png“아니, 아서는, 황태자랑 있었으면 나한테 귀띔을 좀 해 주었어야지!”

1654966254881.jpg“…….”

그걸 애꿎은 집사장에게 일갈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겠지만. 후작은 억울한 얼굴로 집사장을 향해 소리쳤다.

16549662548804.png“내가 저번에 자기가 바라는 대로 개선 축제도 한 번 더 열어 주고! 참전 용사 포상금에, 유족 연금까지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처리해 주었잖아!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비록 그 후에 ‘참전 용사’와 ‘유족’의 인정 범위 같은 부분에서 나랑 의견이 다른 것 같기에 대화를 좀 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나! 내가 이만큼 해 주었으면, 자기도 적당히 굽히고 나와 뭔가 보여 주는 게 있어야 마땅한 거 아냐?! 그 정도 해 주었으니 이번에는 아서가 먼저 대화를 걸어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16549662548804.png“서운한 게 있어도 이 정도 호재가 있으면!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나한테 연결해 주기도 하고! 그러면 나도 뭘 더 기분 좋게 고려해 주고! 이런 맛이 있어야 가족이지!”

어떻게 이렇게 싹 입을 씻고! 후작은 너무 억울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후작의 포마드에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서랑 더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을 해 두었어야 했나? 좀 무리하더라도 어차피 나간 돈, 인심 쓰는 김에 좀 더 확실하게 써 주었더라면……. 그럼 아서가 어떻게든 황태자랑 다리를 놓아 주었을 텐데! 아서와의 관계를 빨리 풀어 두지 못해서 놓친 기회가 너무 아까웠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바람에 내 집에까지 굴러 들어온 황태자를 소개받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야!

16549662548804.png“너!”

결국 화풀이의 화살이 화장대 앞에서 메이크업을 받으며 시가렛 홀더에 끼운 담배를 태우던 크리스티나에게로 향했다.

16549662548804.png“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여태 아서한테 얼굴 비추지도 않고 뭐 하는 거야! 아서의 기분을 풀어 준다며!”

크리스티나가 싸늘하게 후작을 향해 냉소했다.

16549662577241.png“아버지. 아버지가 아서 경의 부하에게 그날 손찌검만 하지 않았어도 제게 진작 아서 경을 찾아갈 염치가 남아 있지 않았을까요?”

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 있던 후작이 일갈했다.

16549662548804.png“어디 내 핑계를 대!”

16549662577241.png“아버지야말로 어디 제 핑계를 대세요? 양심도 없이.”

후작이 재떨이를 움켜쥐며 눈을 부라렸다.

16549662548804.png“이게 진짜!”

히익!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조심조심 붓터치를 하던 마리나가 기겁을 하고 몸을 움츠렸다. 크리스티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싸늘하게 후작을 쳐다보았다.

16549662577241.png“얻다 대고 이거 저거 하세요. 출가외인인 딸이 누구 소유인지 아버지가 직접 저한테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이제 아버지 딸이 아니라 아서 경 소유라면서요.”

16549662548804.png“너, 이! 뚫린 입이라고!”

거울 너머로 그녀가 우아하게 속눈썹을 깔며 재떨이에 시가를 털었다.

16549662577241.png“그거 던지실 건가요?”

16549662548804.png“뭐?”

크리스티나가 후작을 올려다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16549662577241.png“아버지가 던진 재떨이에 맞은 상처를 갖고 가서 아서 경한테 보이면 경의 기분이 좀 풀리실 것 같아서요. 이왕 던지실 거라면 생색나는 위치에 부탁드려요.”

16549662548804.png“야!”

챙그랑! 재떨이가 날아가 거울을 깼다. 들어오던 후작 부인이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리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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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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