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첫 번째 첩보2022.01.02.
날 아가씨한테 보내지 말아 줘. 브로디는 간절하게 레이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레이나는 브로디에게 해명하려다가 ‘마리나의 메이크업’이 필요한 사정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대충 브로디도 마리나도 이제 나랑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자리를 바꾸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고, 함구 명령을 받은 것 같지만……. 솔직히 이런 일은 자세히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나. 레이나는 조심스럽게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오늘만 메이크업에 마리나가 필요한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안 그래도 억울한 인상의 브로디는 서러운 얼굴이 되었다.
“……날 교체하려는 거구나……?”
뭐? 레이나는 당황했다. 교체라니. 그럴 리가? 어차피 나한테 선택권이 있는 게 아니잖아?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브로디를 지목하면 나한텐 마리나가 오는 거고, 아가씨가 마리나를 지목하면 브로디가 오는 거 아니야? 내가 마리나를 한 번 부탁해서 잠깐 불렀다고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마리나를 원한다는데 시중 하녀가 교체될 리가 없는걸. 하지만 브로디는 얼마나 아가씨한테 가기 싫은 건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급기야 울먹이려는 브로디를 레이나는 황급히 말렸다.
“새, 생각해 보니 꼭 마리나가 안 와도 될 것 같아. 그냥, 화장을 조금 더 아가씨처럼 화려해 보이게 해 줄 수 있을까?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더 닮아 보이게…….”
브로디가 눈을 반짝이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해 줄 수 있어!”
정말 남 일 같지가 않네……. 레이나는 브로디한테 미안한 듯 웃었다.
“고마워, 잘 부탁할게…….”
……그래. 쪽지를 전달하고 나면 후작 부인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주시겠지. 사실 내가 메이크업을 신경 쓰며 용을 써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이미 황태자 전하께는 얼굴을 여러 차례 보이고 말았다. 그것도 상당히 가까이서……. 황태자 전하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 이제 어떤 신묘한 메이크업으로도 돌이키긴 글렀다.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위험 부담을 줄여 보고 싶어서 이러고 있지만.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레이나의 목숨은 사실상 그녀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았다. 후작님과 아서 경이 최대한 얘기를 평화롭게 끝마쳐 주길 바라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레이나가 무사히 할머니에게 돌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
혹시 나중에 문제가 돼서 연루된 사람들 모두 교수형에 처해 지고, 아서 경 상대로 사기 결혼을 한 하녀를 찾아내라고 황실이 발칵 뒤집혀서 쫓기게 되고, 그런 일이 있지는 않겠지……?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할머니랑 같이 도망치는 건 무리인데…….
“…….”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아서 경이……. 자비를 베풀어…… 내 목숨 정도는 살려 주시지 않을까?
“…….”
레이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스스로의 뻔뻔함에 기가 막혀 눈을 감아 버렸다. ……염치없긴. 레이나는 후작 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침대 밑에 숨겨둔 쪽지를 생각하며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은 레이나에게 로렌슨 선생이 드레싱 도구를 들고 다가왔다. 이마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 시간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레이나의 이마에 난 상처는 희미해져 있었다. 이제 거즈를 핀셋으로 떼어 낼 때의 미미한 통증도 없었다. 가만히 주치의의 처치를 받으며 레이나는 문가에 서 있는 리오넬 경을 한 번 곁눈질해 보고, 침대 헤드 쪽에 숨겨둔 쪽지에 대해 생각했다. 침대에 옆으로 앉아 있는 지금의 자세에서, 그저 살짝 몸을 기울여 쿠션 밑에 손을 넣는 정도의 움직임만으로도 숨겨둔 쪽지를 꺼낼 수 있었다.
“…….”
로렌슨 선생님이 그녀의 상처를 봐 주기 위해 레이나의 앞에 서자 레이나는 리오넬 경의 시야에서 티 나지 않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가려졌다. 지금……. 지금인데.
“…….”
레이나는 눈앞이 캄캄해져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서 경에 대해서는 해가 되는 얘길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막상 몰래 그런 일을 하려고 하자 죄책감으로 몸이 굳어졌다. 황태자 전하를 만났다는 거……. 초대를 받았다는 거. 전하가 내 얼굴을 봤고 크리스티나 아가씨인 줄 아신다는 거. 전해야 한다. 전해야 하는데…….
“…….”
못 움직이겠어. 그때, 레이나의 상처를 살핀 로렌슨 선생님이 흠, 하며 입을 열었다.
“이마 상처는 다 나았네요. 흉터 남지 않고 잘 아물었습니다. 드레싱은 이제 그만 해도 되겠어요.”
“…….”
그 일상적인 말이 순간적으로 레이나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레이나는 잠깐의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로렌슨 선생님.”
로렌슨 선생은 오늘따라 표정이 굳어 있는 레이나를 느끼고 조금 그녀를 동정했다. 오늘 로렌슨 선생은 레이나의 옆구리를 찔러 뭐라도 압박을 가하라는 후작 부인의 명령을 받고 온 참이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로렌슨 선생은 가벼운 말로 슬쩍 분위기를 환기해 주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아가씨 얼굴은 제국의 보배 아닙니까.”
“…….”
크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레이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억지로 웃을 뿐이었으니까. 앨빈 로렌슨이 약상자를 정리하며 본론을 꺼냈다.
“다음에는 제 대신 아들놈이 봐 드리러 한 번 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다음 주에 출장 강의가 있어서…….”
“……네?”
로렌슨 선생이 처치의 흔적을 정리하며 말했다.
“제가 없을 때 대신 아가씨 봐 드릴 겸, 감사 인사도 드릴 겸. 찾아뵈라고 하겠습니다. 아들놈을 믿고 새 일자리까지 주셨는데, 그동안 미처 인사를 못 드렸지 않습니까.”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할머니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어제 보고 왔는데, 녀석이 제법 일터에서 잘 적응하고 있더군요.”
레이나는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리오넬 경이 보고 있다는 것마저. 레이나는 간신히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하며 물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어려운 점은 없다고 하나요?”
로렌슨 선생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는 듯 레이나에게서 뒷모습을 보인 채 차를 내리며 대답해 주었다.
“네. 무엇보다도 환자분께서 늘 기분 좋게 대해 주셔서 힘들지 않게 일하고 있다더군요.”
“…….”
로렌슨 선생이 돌아섰을 때, 굳어 있던 레이나의 표정에는 모든 것을 뒤로한 안도감이 퍼지고 있었다. 로렌슨 선생은 그 불쌍한 하녀 애에게 살짝 웃어 주고는, 검붉은 물을 손에 든 채 망설였다.
“…….”
일주일을 푹 쉬며 피로에서 회복한 데다 그의 해독환을 함께 먹었기 때문에, 레이나는 비교적 검붉은 물을 잘 받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젊은 여자애가 오래 먹을 만한 약은 아니었다. 아무리 해독제와 함께 먹어도 이렇게 약을 마시다간 레이나는 확실히 몸을 망칠 것이다. 의사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로렌슨 선생은 슬쩍 입을 열었다.
“아가씨. 늦잠을 주무신 걸 보니,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요? 그렇다면 약차는…….”
“아니에요. 주세요. 마실게요.”
레이나는 망설임 없이 선뜻 손을 내밀었다. 후작 부인을 안심시켜 드리는 것이 할머니에게 주어지는 호의에 대한 자신의 의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마시지 않으니 허전해요.”
레이나는 말하며 웃기까지 했다.
“…….”
로렌슨은 씁쓸해하며 찻잔을 쟁반에 올려 레이나에게 내밀었다. 하긴……. 이 애는 약으로 망칠 건강이 문제가 아니지. 순간적으로 후작 부인의 명령만 생각했지만. 사생아를 배어 인생을 망치느니, 한동안 약을 먹는 게 차라리 이 애한테는 나을 것이다. 어제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면 검붉은 물은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약을 마시겠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잠자리를 한 모양이었다. 이 애의 인생을 어쩌면 좋담……. 레이나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하며 순간 그녀의 표정이 가려졌다. 그리고 레이나가 쟁반을 받아드는 순간, 그것을 건네는 앨빈 로렌슨의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살짝 끼어 들어왔다. 레이나가 쟁반 밑으로, 무언가를 건넨 것이었다.
“…….”
로렌슨 선생은 평정을 유지한 채 자연스럽게 그것을 자신의 옷소매 속에 갈무리했다. 후작 부인이 기다리던, 첩보 쪽지였다. * * *
“드디어……!”
로렌슨 선생으로부터 첫 번째 첩보 쪽지를 건네어 받은 후작 부인은 의기양양해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것 보란 듯이 눈을 흘기며 로렌슨 선생을 쳐다보았다.
“흥. 영악한 것. 역시 지 할머니 얘길 꺼내니 곧바로 가져오는군?”
로렌슨 선생이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웃으며 변호해 주었다.
“그렇진 않았습니다. 이미 드리려고 준비해 두고 있었더라고요. 그래도 할머니 얘기를 해 주니 확실히 좋아하긴 하더군요. 다음엔 아마 더 열심히 해 올 겁니다.”
후작 부인은 이미 희열에 들뜬 얼굴로 작게 접힌 쪽지를 펼치고 있었다. 부인이 너무 기대하는 눈치라 실망할까 걱정이 된 로렌슨 선생은 슬쩍 덧붙여 주었다.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한 내용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 애가 주인마님이 시키는 건 뭐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잖아요.”
후작 부인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완전히 펼친 조그만 쪽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
그리고 깜짝 놀란 듯이 숨을 멈추며 표정이 변했다. 【 황태자 전하를 만났어요. 】 【 갑자기 저택에 찾아오셨어요. 피할 틈이 없었어요. 】 【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데뷔탕트에 초대하겠대요. 】 【 제 얼굴을 봤는데, 어쩌죠? 】 【 전하께서 저를 크리스티나 아가씨인 줄 아세요. 】
“……!”
기대한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후작 부인은 당혹한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처음부터 읽었다. 【 제 얼굴을 봤는데, 어쩌죠? 】 【 전하께서 저를 크리스티나 아가씨인 줄 아세요. 】 레이나가 황태자를 만났다고? 얼굴을 봤다고? 데뷔탕트에 초대했다고? 레이나를?
“……!”
후작 부인은 파랗게 변한 얼굴로 뻐끔거리다 황망히 고개를 들어 로렌슨 선생을 쳐다보았다.
“왜요? 무슨 중요한 내용입니까?”
부인의 얼굴이 심상치 않자 앨빈 로렌슨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후작 부인이 다급하게 반문했다.
“레이나가 이거 전하면서 다른 소린 없었어?”
뭔가 진짜 심각한 내용을 적어 온 건가? 로렌슨 선생은 당황한 채 고개를 저었다.
“네,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아서 경의 측근 기사가 항상 방 안에서 감시하고 있어요. 쪽지나 간신히 전하지 무슨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왜요?”
후작 부인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레이나가…… 레이나가 황태자를 만나 버렸대.”
“예?!”
누, 누구? 황태자?
“황태자가 걔 얼굴을 봤고 크리스티나인 줄 안대! 그리고 그 애를 데뷔탕트에 초대하기까지 했대!”
로렌슨 선생도 떡하니 입이 벌어졌다. 어디서 황태자를 만나? 여기서? 대체 언제?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
부인은 퍼레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나서 얘기해 봐야겠어. 어떻게 만나지?”
며칠 전 리오넬인가 하는 기사 때문에 그 난리가 난 이후로, 후작이고 후작 부인이고 아서의 허락 없이 그에게 배정된 공간으론 아예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아서한테 만나고 싶다고 허락을 받아야 하나? 하지만 이번에 만나야 하는 건 아서가 아니라 레이나였다.
“내, 내가 지금 레이나를 급하게 만나고 싶다고 하면 아서가 들어줄까?”
로렌슨이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들어줄 리가……. 스파이로 쓰고 계시잖아요? 아서 경도 걔가 첩자인 거 안다면서요?”
“위급 상황이잖아!”
로렌슨이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한테나 위급하지 아서 경한테 위급합니까? 아니 그러게 빨리 아서 경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주고 얼른 아가씨 원상 복귀시키라니까요! 이게 무슨 촌극이에요!”
미치겠네! 누가 그걸 몰라? 로렌슨 선생이 말하고 있는 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아서한테 사기 결혼이랑 부실 보급 건이랑, 그간 서운하게 했던 것들에 대해 사과를 하고 용서받은 뒤 허심탄회하게 이 일에 대한 타개책을 상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서가 요구한 부실 보급 건에 대한 배상이 생각보다 너무 큰 출혈이었다고! 게다가 아서의 요구는 거기서 끝이 아니란 말이야!”
부인이 참고 있던 말들을 쏟아냈다.
“아서가 요구한 ‘참전 용사’와 ‘유족’의 범위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고! 아서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었다간 우린 빈털터리가 될 거야!”
아무리 줄리어스라도 그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었다. 어떻게 하지? 이쪽이 아쉬운 상태에선 당장 협상이 될 문제가 아니었다. 뭐라도 그쪽의 아쉬운 점이나 약점을 잡지 않으면……. 후작 부인이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레이나 그 기집애는 우리가 지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 이딴 걸 첩보라고 가져와! 사고만 쳐놓고! 아서의 약점을 가져오랬지 누가 이딴 보고 듣고 싶댔어?!”
그때, 재떨이에 사뿐히 담배를 비벼 끄고 걸어온 크리스티나가 하얀 손가락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
크리스티나는 묵묵히 어머니가 읽은 내용을 따라 읽었다. 그러더니 툭 손가락을 굴려 뒷면을 보았다.
“……뭐. 약점이라고 알아내 온 게 있긴 하네요. 여기 따로 했네.”
“뭐?!”
번쩍 고개를 든 후작 부인이 후다닥 달려와서 그 쪽지를 낚아챘다. 그리고 미처 보지 못한 뒤에 짧게 적힌 내용을 다급하게 읽어 보았다.
“……!”
그리고 후작 부인은 분노로 보라색이 된 얼굴로 빽 소리치며 쪽지를 집어 던져 버렸다.
“이딴 걸 약점이라고 가져와!?”
【 ― 아서 경은 버섯을 편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