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렘브란트의 제안2022.03.10.
“하지만 그렇다고 후작 부인 쪽에 우리 하녀들을 따로 들이고 싶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그건 그거대로 불쾌해할 테니.”
“그건 그렇지.”
케이가 소파에서 머리를 젖히며 팔짱을 꼈다. 어떻게 해야 후작 부인의 손을 타지 않은 하녀를 마찰 없이 저택에 들일 수 있을까? 프랜시스가 눈짓했다.
“영 난감해?”
“……뭐, 그렇죠…….”
케이는 열의 없이 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방문에 이런저런 다른 목적도 있긴 했지만, 겸사겸사 프랜시스의 조언을 얻고 싶은 마음도 반 정도는 진심이긴 했다. 어쨌든 이런 쪽에선 수완이 좋다고 평가받는 형이었으니. 하지만 프랜시스도 케이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른 말을 해 줄 수 있는 건 없는 모양이었다. 프랜시스가 빤히 그를 쳐다보다 미소 지었다.
“도와줘?”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케이는 별 기대 없는 눈빛으로 흘깃 형을 쳐다보았다.
“형이요?”
뭘 어떻게 도와주려고.
“마침 ‘렘브란트 경’이 여기 계시니 쓸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것 같은데.”
프랜시스가 찻잔을 들며 툭 던졌다.
“황실의 호의.”
“……?”
갑자기 조금 기대감이 올라왔다. ‘들어나 봅시다.’ 정도의 기대감이긴 하지만.
“무슨 말이에요?”
프랜시스는 간단하게 말했다.
“‘렘브란트 경’ 쪽에서 아서 경을 위해 하인 하녀들을 선물했다. 끝.”
……음? 케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프랜시스는 별소릴 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케이는 묘한 눈으로 프랜시스의 말을 곱씹었다.
‘렘브란트 경이 하녀랑 하인들을 보내 준다고?’
“아서 경의 귀환으로 새 식구가 늘어 일손이 부족해진 줄리어스 저택을 위해서라고 포장해 주면 그림 예쁘지. 나름 명예롭고.”
“…….”
“그리고 실제로 일손 부족으로 굉장히 바빠서 하녀들이 죽어나고 있기도 하거든.”
의외로 그럴싸하게 들리는 제안이었다. 이쪽의 자기주장이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후작 부인이 거부하긴 애매해 보이는 명분. 지금 딱 필요한 것이었다. 프랜시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후작가는 이 와중에 새 하녀들을 고용하는 건 조심스러운지 피하고 있더라고. 선제후가 된 줄리어스를 트집 잡고 싶어 벼르는 사람들이 꽤 있으니 요새는 첩자가 섞여 들어올 확률이 높잖아. 그래서 익숙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존 하녀들로 어떻게든 꾸려 가려고 애쓰고 있는 모양이야.”
새 하녀들을 고용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이유. ‘사기 결혼 건’과 ‘레이나’를 숨겨야 하는 상황이니 그런 것이라는 점을 케이는 쉽게 짐작했지만, 프랜시스가 짚은 것도 대외적으로 적당한 이유였다. 프랜시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아서 경을 챙겨 줄 겸, 새 식구 늘어서 바쁜 줄리어스를 배려하는 황실의 호의라고 하면 줄리어스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게다가 후작이 렘브란트 경을 꽤 좋아하거든.”
의심스러운 와중에도 케이의 눈빛에 신중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후작 내외는 레이나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할 테니 렘브란트의 하녀들도 거북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지만, 괜찮게 들렸다. 어쨌든 ‘대외적으로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게 중요했다. 프랜시스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원하는 하녀들 명단 뽑아서 넘겨주면 우리가 티 안 나게 섞어서 들여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키면 고려해 보든가.”
케이는 신중한 눈빛으로 턱을 괴고 형을 바라보았다. 기대치를 훌쩍 상회할 정도로 괜찮게 들렸다. 마음에 걸리는 점 하나만 빼고는 다 좋았다. 바로 그게 ‘렘브란트’ 측의 제안이라는 것 말이다. 아서는 그가 마리아 황후 쪽 사람이라며 그녀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경계하라고 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쪽의 도움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프랜시스가 샐쭉 눈을 흘기며 웃었다.
“‘렘브란트 경’은 마리아 황후의 조카인데 아서 경한테 줄리어스보다 이로울까, 뭐 이런 거 생각 중인 얼굴이네?”
“…….”
정확했다. 프랜시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백하게 말했다.
“렘브란트 경은 중립. 굳이 말하자면 마리아 황후보단 황태자 전하와 더 비슷한 입장이야. 황태자 전하 쪽 스탠스야, 나보다 너희가 더 잘 알 거고.”
프랜시스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눈짓했다.
“뭐 내가 증명해 봤자 네가 믿진 않을 거 같으니, 내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는 네가 재주껏 알아봐. 말 안 해도 그러겠지만.”
황태자 전하와 같은 스탠스라면, 렘브란트 경은 아서 경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고, 오히려 황후로부터 지켜 주려 한다는 뜻이었다. 사실이라면 솔깃했다. 케이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움직임 없이 형을 쳐다보았다.
물론 ‘렘브란트 경’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기 전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셈이었지만. 일단 케이는 이것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제안인지를 한 번 더 타진했다.
“……윗사람 의향을 묻지도 않고 맘대로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렘브란트 경께서 그런 걸 해 주실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형이 어떻게 알아요?”
프랜시스가 지겹다는 표정으로 손을 휙 내저었다.
“안 되는 걸 말하겠냐?”
그리고 프랜시스는 동생을 축객했다.
“가. 어차피 지금 당장 해 달라고 할 것도 아니잖아.”
“…….”
“가서 조사해야지. 내 말이 진짠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고. 꽂고 싶은 하인 하녀들도 엄선해야 할 거 아니야?”
프랜시스는 피식 웃었다.
“다 되면 와라.”
동생이 틀림없이 저를 다시 찾아올 것임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케이는 조사 결과 프랜시스의 말이 진실이라 판명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직감했다. 케이는 형을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형이 도움이 되네. 그리고 잠시 프랜시스를 내려다보다 물었다.
“……‘레이나’에 대해선 왜 알아보고 있어요?”
“……?”
프랜시스는 조금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 여자를 어떻게…….”
프랜시스가 말꼬리를 흐리다 활짝 웃었다.
“너도 관심 있는 거냐? 웬일로 네가?”
“…….”
얼마 전에 주군 앞에서 형의 여성 편력에 대해 변명해야 했던 수치를 떠올린 케이의 한쪽 눈썹이 구겨졌다. 속도 모르고 프랜시스는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자식, 보는 눈은 있네. 근데 나랑 겹친다? 하긴……. 보기 드문 미인이지? 그 아가씨.”
형을 향한 놀랍고도 고마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케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가늘게 뜬 눈으로 프랜시스를 바라보았다.
“미인이면, 앞뒤 안 가려요?”
자리에서 일어난 프랜시스가 태연하게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흠. 아직 하수네? 미인 앞에서 그런 거 가리면서 어떻게 연애를 하냐? 미인한테는 모름지기 언제나 구애하는 남자들이 많은 법이야. 적극적인 남자가 기회를 잡는 법이고.”
“…….”
케이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냉소적인 표정에 프랜시스는 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동생을 쳐다보았다.
“뭐냐? 그 얼굴.”
케이가 힐긋 프랜시스를 곁눈질했다.
“그 여자 들쑤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형의 어깨를 툭, 짚고 지나가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형이 죽을까 봐 해 주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 * *
“흠…….”
케이가 떠난 뒤. 턱을 괴고 있던 프랜시스가 자세를 고쳐 소파 등받이 위로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톡 톡 두드렸다.
“…….”
‘레이나’는 ‘아서 경’ 귀환 이후 여태 봤다는 사람이 없는데……. ‘아서와 함께 돌아온’ 케이가 어떻게 ‘레이나’를 알까? 프랜시스는 팔짱을 풀고 다리 위에 손을 내렸다. 그리고 케이가 나간 문을 힐긋 쳐다보았다. ‘미인이지? 그 여자.’에 반응했다. 이건 ‘본 적’이 있다는 건데?
* * * 똑똑.
“렘브란트 경. 계십니까?”
“네, 프랜시스. 들어와요.”
렘브란트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찾아온 수행원 프랜시스를 맞이했다. 서류철을 가지고 들어온 프랜시스가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케이가 다녀갔습니다. 아서 경 쪽 이야기를 전하러 왔더군요.”
“아, 그래요?”
렘브란트가 온화한 관심을 보였다.
“동생이라고 했죠. 이야기 잘 나눴습니까?”
렘브란트는 황태자를 보내고 돌아온 후 ‘아서’와 한 번쯤 대화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어 하던 참이었다. 단, 후작을 통하지 않고 따로. 하지만 아서는 개선장군으로서의 공무 외의 사적인 만남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는 게 공식 입장이었으므로, 렘브란트는 상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 방식으로 접근하기 위해 적당한 타이밍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지난번 만남으로 렘브란트가 아서에게 썩 좋은 인상을 주었다곤 할 수 없으니 더 신중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만나려면야 만날 수 있었지만, 렘브란트는 그들을 오래 보고 싶은 만큼 최대한 아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랜시스의 손아래 동생인 케이가 아서의 최측근이라는 걸 듣고, 그쪽을 통해 이쪽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마침 케이가 먼저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렘브란트의 뜻을 알고 있던 프랜시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프랜시스는 케이와 나눈 이야기를 전달했다.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렘브란트가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하녀들을…….”
“네. 어떤 사람들을 넣어 달라고 데려오는지 보면 더 분명해지겠지만, 아무래도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가까이서 보살필 시중 하녀나 몸종을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조용히 입가를 만졌다. 그렇군. ‘레이나’에게 후작 부인의 하녀가 붙어 있을 테니, 우선 그녀한테서 후작 부인의 손을 끊어 내려는 건가. 프랜시스의 입에서도 묘하게 다르면서도 비슷한 해석이 나왔다.
“후작 내외와는 마찰이 있지만,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아서 경의 편에 설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후작 부인, 그러니까 크리스티나의 어머니이자 이 저택 안주인의 사용인들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아서 경의 명령만 받는 하녀들을 따로 들이고 싶다는 건……. ‘크리스티나’와 후작 부인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만들고, 그녀를 아서 경 쪽으로 끌어들여 독립적으로 운신하고 싶어 하는 의향이 읽혔다.
“…….”
이건 ‘레이나’가 원하는 방향과 일치할까? 지금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사람이 줄리어스인지 아서 경인지 양쪽 다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물음에 레이나는 대답하지 않았으니. 어쨌든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뒤이어 아서 경 쪽에서는 렘브란트 경을 통해 황실에 이쪽 상황이 전달될 거라 전제하고 있더라는 프랜시스의 말이 이어졌다. 렘브란트가 곤란하고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를 황후 폐하 쪽 감시책으로 보는군요.”
프랜시스가 말했다.
“네. 그래서 일단은, 적당히 하인 일은 도와줄 수 있겠다고만 흘려 놨습니다. 아서 경이 저택에 들이고 싶은 하인이 있으면 렘브란트 경께서 ‘황실의 호의’를 표방해 꽂아 줄 수 있으니 관심 있으면 한번 알아보라고요.”
렘브란트가 웃었다.
“잘 풀렸군요. 이쪽이 우호적이라는 뜻도 전달된 건가요?”
프랜시스도 으쓱하며 따라 웃었다.
“네. 경께선 중립이시고, 마리아 황후 폐하보단 황태자 전하와 비슷한 입장이시니 알아보라 했습니다. 제가 말해도 믿지 않을 녀석이라서요. 지금쯤 자기 수단으로 조사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렘브란트는 솔직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당신이 있어서 참 편하네요.”
“별말씀을요.”
그리고 프랜시스가 옆구리에 끼고 온 서류철을 렘브란트에게 넘겼다.
“겸사겸사, 마침 맡기셨던 것도 다 됐습니다. 어차피 아서 경 쪽 대답을 기다려야겠지만요.”
그가 프랜시스에게 맡긴 일들은 몇 가지가 있었지만, 마침 다 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건네는 말들을 보니 이것이 어떤 일의 결과물인지 알 수 있었다. 받아 든 렘브란트가 그것을 펼쳐 보며 웃었다.
“오늘은 제가 대접해야겠는데요.”
“사양 안 하죠.”
프랜시스가 만들어 온 것은, 렘브란트가 후작 저택에 들여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하인, 하녀들의 이력서와 추천장이었다. 사실 그들은 케이가 찾아오기 전부터 줄리어스 후작 저택에 하인들을 꽂아 넣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자신의 수족이자 줄리어스의 감시역으로 부릴 하인들의 필요성을 느끼고 저택에 들일 사람들을 모으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랜시스가 케이에게 ‘황실의 호의’를 표방한 렘브란트의 제안을 건넬 수 있었던 이유였다. 렘브란트는 레이나를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