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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만지지 마 (62/210)


#62. 만지지 마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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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기사들을 말렸다.

레이나는 자신과 테일러 사이를 가로막는 기사들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테일러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고 기사들은 그녀의 요청대로 조용히 물러나 주었다.

하지만 테일러는 오히려 그 상황에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드레스를 입은 레이나를 처음 본 순간에도 테일러가 조용히 충격을 감내한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레이나에게 ‘아가씨.’라며 인사할 때까지만 해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확연히 굳어 있었다.

한번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진정된 레이나는 테일러의 굳은 표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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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도 확신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눈치채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것 같았다.

테일러가 굳은 얼굴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뭘 신경 쓰는지는 알 것 같았다.

레이나는 잠시 망설이던 마음을 다잡았다.

크리스티나 아가씨로서 말해야 한다.

기사들 앞에서 레이나로서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기사들에게 다 들켰거나, 전부 털어놓은 상황이라는 걸 들키게 될 것이다.

그럼 테일러는 후작 부인으로부터 날 감싸 주려고 머리가 아파질 거야.

테일러랑 로렌슨 선생님을 끌어들이면 안 되는데…….

아가씨로서 할머니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지?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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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가 가방에서 꽤 두께가 있는 종이 뭉치와 펜을 꺼내며 말했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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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아가씨. 처음이라 조금 버벅였습니다. 제가 많이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니어야 할 텐데……. 괜찮으세요?”

레이나는 얼떨결에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테일러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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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차는 조금 있다가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맡겨 주신 일에 대해서 보고드릴까 하는데요. 그렇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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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던 레이나의 시선이 그가 꺼낸 종이들 위에 멈추었다.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 10월 --일

오늘은 할머니의 기분이 좋으셨다.

오늘도 나는 못 알아보셔서 ‘테일러 로렌슨’이라고 다시 소개를 드렸다.

계단에서 살짝 넘어지실 뻔해서, 혹시 넘어지시더라도 다치시지 않도록 바닥에 부드러운 모포를 여러 겹 깔았다.

……식사로 감자 스튜와 부드러운 빵을 드셨다.

지난번 처방해 드린 단향목 열매의 약을 드시곤 속 쓰려 하시는 것 같아

위장약과 함께 더 부드러운 약을 처방해 드렸다.

식사량은 적으신 편인데, 더 권하면 드시지만, 많이 드시는 날은 더부룩해 하셔서 이 정도가 적정한 양인 듯.…… 】

【 9월 --일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인가 늦게 일어나셨다.

기상 시간이 빠르신 편이라 오히려 많이 주무신 것은 안심.

산책을 하시는 날이 더 기분이 좋으신데, 오늘은 바람이 차서 산책은 건너뛰었다.

산책의 이점이 큰지 찬바람의 부담이 큰지는 고려해야 할 듯.

……식사는 사과 한 개와 팬케이크 하나, 달걀 요리를 드셨다.

내가 해 드리는 팬케이크를 좋아하셔서 가끔 조르시는데, 메이플 시럽은 너무 많이 드시지 않도록 주의.

무릎 관절통이 있으신 듯해서 약을 처방해 드렸다. 】

테일러가 꺼낸 것은, 하루하루 기록한 할머니의 진료 일지였다.

이럴 수가…….

레이나는 입을 가렸다.

할머니가 잘 지내신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레이나는 정신없이 거기 시선을 빼앗겼다.

가슴이 뭔가로 꽉 차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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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기분 좋게 대해 주시는 분이라 행복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테일러가 평온하게 말하며 자신이 쓴 일지로 시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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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렇게 봐 드리고 있고, 보시는 것처럼 일지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펜으로 그 일지의 구석에 메모를 시작했다.

정신없이 테일러가 쓴 일지를 읽고 있던 레이나의 시선이 얼결에 거기로 따라갔다.

테일러의 손이 구석에 빠르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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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손등에 십자 흉터. 연푸른 홍채, 오른쪽 목에 점. 너희 할머니 맞으면, 시선 아래로. 】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테일러는 자신의 메모와 전혀 상관없는 말을 담담히 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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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괜찮을까요? 더 기록했으면 싶은 게 있으시면 보충하려고 합니다.”

 

【 …… 손등에 십자 흉터. 연푸른 홍채, 오른쪽 목에 점. 너희 할머니 맞으면, 시선 아래로. 】

종이를 적신 잉크가, 글씨를 만들자마자 빠르게 휘발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펜촉에 적셔진 것은, 잉크가 아닌 물…… 아니, 색이 없는 알코올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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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로 쓰인 글씨는 씌어지자 마자 몇 초 만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나가 읽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왼쪽 손등에 십자 흉터. 연푸른 눈동자, 오른쪽 목에 점?

레이나는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다가 글씨가 전부 사라진 후에야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떨떨한 눈으로 테일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할머니 맞아. 우리 할머니 맞아.

고개를 끄덕인 듯한 동작이 되었다.

테일러는 자연스럽게 레이나의 동작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커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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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요.”

입으로는 할머니의 증상과 하루의 일과에 대해 조곤조곤 얘기하면서,

테일러가 필담을 시작했다.

【 도움 필요해? 】

테일러가 종이에서 눈을 들어 레이나를 응시했다.

레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원한다면 오늘 밤에 쓰러지게 해 줄 수 있어. 】

레이나는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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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게 맡겨 주신 환자분 건강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테일러는 태연하게 손과 전혀 다른 말을 입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 네가 쓰러지면 내가 보살피러 올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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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판단하긴 이르지만, 제가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연세에 비해 굉장히 정정하신 편이세요.”

그리고 테일러의 손은 전혀 다른 말을 적었다.

【 원하면 목걸이를 만져. 】

테일러와 레이나의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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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넘어지거나 하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거든요.”

테일러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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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은 뼈가 약하고, 회복이 느려서요.”

레이나는 튀어나올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쓰러지게 해 준다고?

아냐, 아냐.

날 쓰러지게 하지 마.

레이나는 비로소 테일러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를 깨달았다.

실종되어 있었음.

아가씨의 대역.

기사들에게 감시받고 있음.

퉁퉁 부은 눈으로 나와서, 테일러를 보자마자 울어 버렸다.

날 걱정하고 있구나.

굉장히 심각한 내용으로!

순간 레이나는 너무 고마우면서도 당황해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테일러가 레이나의 눈을 응시하며 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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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계단에서 넘어지실 뻔해서……. 위험할 것 같아 바닥에 모포를 깔았습니다.”

입으로는 전혀 다른 말을 하면서.

‘원한다면 오늘 밤에 쓰러지게 해 주겠다’는 문장이 스르륵 사라지며 밑에 새 글씨가 빠르게 추가되었다.

【 원치 않으면 귀걸이를 만져. 그러면 내가 내일도 올게. 】

내일도 올 수 있어?

레이나는 거의 숨을 멈춘 채 더듬거리며 귀걸이를 만졌다.

오늘 밤에 쓰러지고 싶으면 목걸이, 원치 않으면 귀걸이.

그러니까 귀걸이를 만진다.

오늘 쓰러질 필요는 없어.

테일러, 날 여기서 당장 빼내야 하는 건가 생각해 주는 거지?

괜찮아. 고마워.

하지만 난 일단 여길 벗어나지 않아야 해.

널 만난 다음에 저분들이랑 얘기하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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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레이나는 순간 눈을 움찔하고 깜박였다.

당황해 버벅이는 손길에 귀걸이가 어딘가에 걸리는 느낌이 나더니 귀가 화끈거렸다.

반사적으로 테일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레이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레이나를 보호하려는 기사들이 순식간에 다가서며 다시 그의 접근을 막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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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입니까.”

모노클을 쓴 귀족 기사가 물었다.

테일러가 뒤늦게, 하지만 빠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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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귀에서 피가 납니다. 귀걸이 때문인 것 같아요.”

레이나의 귓불이 양쪽 모두 붉어져 있고 한쪽에선 피가 나는 걸 보고 기사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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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손을 대도 될까요? 귀걸이를 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된다면 시중 하녀를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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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는 짧게 고민했지만, 시중 하녀를 부르면 오히려 감시에는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듯했다.

기사들이 레이나의 의향을 살핀 뒤 그녀가 끄덕이자 테일러가 다가가는 걸 허락했다.

테일러가 레이나의 귀를 조심스레 살피며 상처가 아프지 않도록 귀걸이를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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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귀를 뚫은 적이 없었다.

상태를 보니 귀를 한번 뚫은 뒤 다시 귀걸이를 하지 않아 반쯤 아물어 가던 상처가 다시 뚫린 상태인 듯했다.

한쪽은 잘못 당겨지는 바람에 피가 비쳤다.

테일러는 침착하게 드레싱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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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걸이 때문에 상처가 났네요. 소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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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가 탁자 위에 면포를 깔고 트레이를 올려 거즈와 핀셋, 소독약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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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침이라 감염 위험은 높지 않습니다만, 이 귀걸이는 상처가 남아 있을 때 하기엔 너무 무겁습니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가벼운 걸 하세요. 귀 만지지 마시고요.”

테일러가 조심스럽게 드레싱을 시작했다.

그걸 두 기사가 양쪽에 바짝 붙어 지켜 보았다.

좀 머쓱하고도 복잡한 심경으로 테일러에게 귀의 상처를 맡겨 놓고 있던 레이나는 문득 눈을 깜박였다.

……바람이 느껴졌다.

쾅!

그리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문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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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이야.”

방에 들어온 아서가 순식간에 걸어와서 테일러를 밀쳤다.

그리고 그녀를 등 뒤에 둔 채 그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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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지 마. 내 아내야. 허락한 건 대화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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