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걱정
(74/210)
74.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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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걱정
2022.05.15.
아서는 트리스탄과 케이 앞에서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빛은 인식할 수 있어. 그러니까 실명까지는 아니야.”
케이가 냉정하고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시력 상태를 사람들은 보통 실명이라고 부릅니다. 거의 ‘빛만’ 인식할 수 있는 상태이시잖아요. ”
“아니, 그거보단 조금 더…….”
“…….”
“…….”
……보인다고 항변하기 어려웠다.
케이와 트리스탄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증 환자의 가엾은 현실 부정쯤으로나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케이가 사무적으로 말을 읊었다.
“종종 완연한 어둠 속에 있는 상태만을 실명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사실 실명으로 분류되는 상태 중에서도 빛조차 인식할 수 없는 ‘전맹’은 드뭅니다. 각하의 상태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실명이 맞습니다.”
“…….”
트리스탄이 묵묵히 한숨을 내쉬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는 자신이 ‘실명’이라 규정되는 걸 좀 거북해하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한다기보다, 부하들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싫은 것 같았다.
“……난 그냥 눈이 많이 나쁜 것뿐이야. 선명하지 않을 뿐이지 어렴풋이 보여.”
“네. 상이군인 등급에 의하면 1급 양안실명이신 수준으로요.”
“…….”
아서가 등받이에 기대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일상에 불편이 있을 사람들을 위해서 좀 폭넓게 잡은 기준이지. 평생 지니게 될 장애를 얻은 사람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아야 하니까. 알잖아?”
“…….”
“하지만 난 아냐. 내가 일상생활에 불편이 있어 보여? 이렇게 멀쩡한데 진짜 실명한 사람 앞에서 나도 실명이라고 엄살떨 수 있겠어? 서류 외엔 전혀 문제없다고.”
트리스탄이 입을 열었다.
“각하.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저희의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각하의 곤란이 덜어지지도 않고요.”
“…….”
“그렇게 외면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
아서는 자신이 장애를 갖고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부하가 그걸 지적하려 하는 듯하자 더는 피하지 않고 체념하듯 물었다.
“……그래서? 분류상 실명이 맞으면 뭐?”
트리스탄이 짧게 대답했다.
“치료, 시도하셨으면 합니다.”
“…….”
아서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트리스탄이 말했다.
“상이군인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입니다. 각하께서도 치료를 받으실 권리가 있습니다.”
아서가 난감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말했잖아. 내 케이스에 호전 가능성은 없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트리스탄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실명이나 실명에 준하는 장애를 경험한 병사 수십여 명과 의사들을 면담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실명이라 의심되었던 환자들 중 열에 하나둘은 호전되는 케이스가 있었습니다. 백 명 중 열다섯 명 이상입니다. 다양하게 시도한 치료가 효험을 보인 케이스도 있었고, 그냥 시간이 흘러 자연히 나아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트리스탄이 이어서 말했다.
“의사를 데려오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
아서는 웃음 기운 없이 입매를 늘였다.
“내 시력 문제가 흘러나가면 그게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
“서류 일 외엔, 나한테 시력이 없어도 문제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자네들 둘 다.”
“…….”
케이가 담담히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각하의 눈앞에서 이렇게 욕이나 적국 깃발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어도 구별할 수 없으시지 않습니까?”
“…….”
아서가 허를 찔린 낯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를 바라보았다.
“……트리스탄. 케이가 욕 그려진 옷 입고 있어?”
“……아뇨.”
“…….”
한 방 먹은 걸 깨달은 아서가 쓰게 웃으며 한쪽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케이가 피식 싱겁게 웃었다.
“적국 깃발은 아니라고 믿어 주시는 겁니까?”
“……설마 자네가 그런 걸 입고 있을 리는 없으니.”
“욕일 리는 있는 겁니까?”
……없나?
결국 아서가 항복이라는 듯이 웃으며 두 손을 들어 보이곤 부하들을 달랬다.
“알았어. 정히 그렇다면 개선식 다녀와서. 작위 받고, 여기서 내 자리가 안정되면 그때 치료받을 방법 있는지 찾아볼게. 아직은 위험해.”
트리스탄이 무겁게 말했다.
“각하. 치료에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아서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호들갑 떨지 마. 나는 문제없어. 엄살 부릴 만한 상태 아냐. 딜런이나 신경 써 줘.”
“…….”
트리스탄은 아서가 그저 회피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트리스탄이 물었다.
“왜 가망이 없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서의 시선이 물끄러미 트리스탄을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가만히 바닥에 붙어 있는 시선.
그에겐 무의미한 몸짓.
그저 ‘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버릇을 들인 모습이었다.
트리스탄은 꾹 이를 물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불쑥 질문이 나갔다.
“혹시 황실에서 막고 있습니까?”
“…….”
아서의 시선이 엄준히 올라온다.
역시, ‘보는’ 듯이.
트리스탄은 물러나지 않고 물었다.
“아니면 황실 기밀이라 말씀 못 해 주시는 겁니까?”
“…….”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대답은 못 들으리라 생각했다.
지난 오 년간 그랬듯, 황실과 연관된 기밀이 그의 입에서 쉽사리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서는 짧은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맞아.”
아서가 인정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트리스탄은 흠칫 놀랐다.
케이도 뜻밖의 눈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황실이 치료를 막고 있진 않아. 하지만 기밀인 건 맞다.”
아서가 짧은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치료할 방법이 있었으면 이미 황실이 방법을 찾아냈을 거야. 카일에게 오러 사용이 금지되지도 않았을 거고. 수십 년을 찾아 헤맸을 테니, 방법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알아냈을 것이다.”
“…….”
오러?
케이와 트리스탄은 그것이 아서가 가진 능력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케이가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물어보았다.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아서는 황실 기밀로 분류된 정보를 이렇게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서가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고 의자에 기대었다.
“그래. 카일이 허락했다. 최측근 부관들에게 공개해도 좋다고.”
케이와 트리스탄이 모두 눈을 크게 떴다.
트리스탄이 물었다.
“언제 허락하셨습니까?”
“꽤 됐다. 내가 시력을 잃은 걸 알고 나에게 그대들 도움이 필요하겠다 판단했을 때.”
트리스탄은 좀 배신감 느끼는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걸 이제야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아서가 머쓱한 듯 목을 만졌다.
“……안 물어보길래.”
“그야 황실 기밀인 줄 알았으니까요!”
아서가 미안한 듯이 웃었다.
“기밀 맞아. 그동안은 내가 준비가 안 됐고 카일은 내가 스스로 말하길 기다려 준 거니 카일이 말해 주지 않았다고 너무 나쁘게 생각은 말고.”
아서는 짧게 요약해 이야기했다.
“내 시력 문제는 자네들도 짐작하고 있을 그 능력의 부작용이야. 대충 그게 어떤 능력인지 예상하고 있을 테니 왜 기밀인지는 알고 있겠지.”
“…….”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기밀이다. 밝혀지면 효용성이 크게 떨어지니까. 공간 자체를 감지하는 기능도 있어서 시각을 대체할 수 있기도 해. 덕분에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고. ‘선황제’의 핏줄에 이어져 내려오는 자질이야.”
“…….”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쓸 때마다 시각이 손상되는 건 아니고. 무리하게 쓸 때 크게 손상된다. 무리가 가지 않게 조절하면 문제없는데, 내가 마지막 전투에서 조절하지 못했어.”
“…….”
조절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케이도 트리스탄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아서가 부작용을 축소하고 있을 가능성을 느꼈다.
아서는 거기서 담담하게 말을 맺었다.
“그게 다야. 절제해 사용하면 문제없어.”
“…….”
아서가 손깍지를 끼며 시선을 내렸다.
“이미 손상된 시력은 어쩔 수 없어. 돌이킬 방법이 있다면 이미 밝혀졌을 거다. 선황제 알렉산더 루사익 2세께서 이미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셨을 테니까. 황실로서도 포기하기는 아까운 능력이니 계속 조사했을 거고.”
“…….”
아서가 짧은 틈을 두고 말을 골랐다.
“카일 황태자도 나와 같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능력을 연마하는 것을 금지당했어. 카일은 황제가 될 텐데, 평생 나라의 정무를 봐야 하는 사람이 만에 하나라도 눈이 멀어선 안 되니까.”
“…….”
“아주 어릴 때부터 십 년은 넘게 연마해야 나 정도로 실용 가능한 수준이 되는 능력이고. 그래서 카일은 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어.”
짧은 침묵 후에 말이 이어졌다.
“카일은 사실상 오러를 전혀 쓰지 못해. 그저 내가 오러를 쓴다는 걸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는 정도야.”
카일이 아서만큼 전쟁에서 활약하지 못한 것을 대신 변명해 주는 듯했다.
“…….”
트리스탄이 입을 열었다.
“선황제 폐하께서……. 생전에 눈이 머셨습니까?”
아서가 답했다.
“그래. 하지만 나와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그분에게도 믿을 만한 최측근들이 있었을 테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셨을 거야.”
그리고 아서는 싱긋 웃으며, 그처럼 자네들에게 나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트리스탄이 굳은 얼굴로 먼저 물어보았다.
“외람되지만, 각하. 혹시 선황제 폐하께서 가지신 다른 특성들도 각하께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까?”
아서가 등받이에 기대며 트리스탄을 올려다보았다.
“……뭐. 요절할 가능성이 있냐고?”
아서가 웃었다.
“아니. 오러에 그런 부작용은 없어.”
하지만 트리스탄과 케이는 둘 다 아서를 믿지 않는 심각한 얼굴로 아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숨기지 않는 그 기색이 너무 뻔해서 아서가 떨떠름하게 덧붙였다.
“……진짜야.”
“진짜입니까, 정확하게 모르시는 겁니까?”
“…….”
아서가 대답했다.
“나한텐 별문제 없어.”
완벽한 대답이라 할 순 없었다.
그리고 케이와 트리스탄은 대답이 나오기 전의 짧은 망설임을 기민하게 포착했다.
“…….”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트리스탄이 아주 담백하게 씹어 뱉었다.
“황실 진짜 개새끼네요.”
케이마저 짧게 말했다.
“같은 의견입니다.”
아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자네들 입조심 안 해도 돼?”
“어차피 오러로 아무도 안 듣고 있다는 거 확인하고 계실 거 아닙니까.”
“…….”
트리스탄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저 황태자 전하가 좀 싫어졌어요.”
“저도요.”
케이까지 그렇게 유치하게 말한 건 의외였다.
“…….”
아서는 역시 충성스러운 부하라는 건 좀 귀엽고 키울 만하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그리고 각하는 물러 터졌습니다.”
“…….”
케이는 말없이 동의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는 머쓱하게 눈썹을 긁었다.
카일은 그런 사정은 모르고 자랐다는 얘길 하려다가 포기하고,
아서는 그냥 웃었다.
“…….”
말마따나 물러터져 보이는 데다가.
솔직히 아서도 구김살 없는 카일을.
“…….”
한 점 박탈감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없지는 못했다.
아서는 벌써 댓 번은 쉰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신이 당연히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조사했다.
그들이 실망하게 될 일이라 생각했기에, 자신의 일에 매달렸다가 시간 낭비만 하고 좌절하지 않길 바란 것이었지만.
아서는 부하들의 등쌀에 떠밀려, 괜찮은 의사를 구해 오면,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딜런과 함께 만나는 보겠노라 대답하고 말았다.
어차피 딜런의 치료를 위해 만나는 의사라면, 굳이 저는 싫다며 부득불 거부하는 것이 더 그들을 걱정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