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할머니에게
(86/210)
86. 할머니에게
(86/210)
#86. 할머니에게
2022.06.26.
“마님. 기침하십시오.”
후작 부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후 일정 맞추시려면 이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마님.”
하녀장의 눈에 비친 후작 부인은 현실감이 없는 얼굴이었다.
“……올가.”
후작 부인이 얼이 빠진 목소리로 하녀장에게 말했다.
“내가 글쎄 엄청 황당한 꿈을 꿨지 뭐야……? 남편이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 전 재산을 데릴사위한테 갖다 바치는 꿈이었는데…….”
“…….”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커튼을 치며 대답했다.
“마님. 주인어른께서 아서 경이 요청한 유족 연금 재단 설립 건에 사인하신 일이라면 꿈이 아닙니다.”
“……뭐?”
“그리고 황후 폐하께 황궁 하녀들을 허락해 주셔서 감읍하다는 답장을 쓰신 일도 꿈이 아닙니다. 황궁 하녀들을 맞이할 준비도 마무리하셔야 합니다.”
후작 부인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게 꿈이 아니라고?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듯 두통으로 머리가 콱 죄어들었다.
후작 부인은 파르르 입술을 말아 씹으며 머리를 짚었다.
하녀장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오. 주인어른께서 오늘 아서 경을 만나러 동쪽 숲 사냥터로 나가셨습니다. 또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오실지 모르니 마님께서도 대비를 하시고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후작 부인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당신 미쳤어?!」
「미친 건 당신이지! 이제 개선식인데 수도로 갈 때까지 아서를 저렇게 내버려둘 거야? 우리한테 시간이 많은 줄 알아?」
「그렇다고 이걸, 이걸 사인 해? 협상 한 번을 안 하고?」
「아서 녀석이 만나 줘야 협상을 하지! 당신이 아서를 협상 테이블에 끌고 나와 보든가! 이 정도 아니면 그 잘난 놈이 눈이나 깜짝할 것 같아?」
후작은 논리적인 척 큰소리쳤지만 그와 30년을 함께한 후작 부인의 눈엔 후작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허세와 인정 욕구였다.
「그래서 그 잘난 놈 눈 한번 깜짝하게 하고 싶다고, 이런 서류에 사인을 해?!」
“…….”
후작 부인은 가주를 금치산자로 지정하는 망상을 하며 천정의 레이스 무늬를 헤아렸다.
차라리 이쪽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미친 집구석에 들어와서 이 꼴을 보는지.
후작 부인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정신을 차리면 뭐 하나?
미친 남편이 데릴사위에게 죄다 퍼 줘서 이제 더 빼앗길 것도 없는데.
대비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벌어진 일이니, 후작 부인은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전부 꼬인 일들을 수습하고 크리스티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한 희생이니,
최소한 안토니오가 오늘은 크리스티나 이야기를 해결하고 오겠지.
그러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다.
아서도 양심이 있다면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틀림없이 더 나은 방식으로 협상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목 안이 부글부글 끓고 화가 났지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황제의 초대장까지 온 마당에 확실한 한방이 필요하긴 했을 것이다.
확실히, 분위기는 좋게 풀 수 있겠지.
사인한 건 물러지지 않겠지만 좋은 분위기에 편승해 재단 이사장으로 크리스티나를 넣어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그때, 다급하게 뛰어드는 발소리와 급한 목소리가 짓쳐들어왔다.
“주인마님!”
울먹이는 목소리로 겁에 질린 브로디가 소리쳤다.
“큰일 났어요! 지금, 레, 레이나가……! 이상한 괴한들한테 끌려갔어요!”
후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어떡해요? 어떡해!”
브로디가 발을 동동 굴렀다.
* * *
레이나는 마차를 전복시킬 기세로 저항하며 몸부림을 쳤다.
실제로 마차가 거의 뒤집어질 뻔했다.
“아오, 젠장! 그만, 쫌!”
“해치지 않아요, 레이디! 진정…… 진정을!”
“악! 내 손! 물었어!”
달리던 마차가 인적 없는 숲길에 접어들었음을 마부가 알리자마자 다급하게 리오넬이 복면을 벗었다.
“잠깐만요, 레이디! 저흽니다!”
하지만 레이나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리오넬은 황급히 루칸의 복면도 끌어 내리면서 소리쳤다.
“진정하세요! 안전합니다! 저희 모두 연기한 거예요!”
루칸과 리오넬은 재빨리 두손을 들고 가장 무해해 보이는 모양새로 마차 벽에 바짝 붙어 손바닥을 펼치는 항복 자세를 취했다.
“!”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워져 두 기사를 몇 대 더 정신없이 때려 주고 나서야 둘을 알아본 레이나는 저항을 멈추었다.
“헉……. 헉…….”
리오넬…… 경?
루칸 경?
흥분한 레이나의 가슴이 거세게 오르내렸다.
두 기사는 한참이나 맞아주면서 항복을 했지만,
여전히 레이나의 온몸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 * *
“아주 야무지게도 씹어 놓으셨네.”
복면을 벗은 루칸이 장갑을 벗고 선명하게 잇자국이 난 손을 털며 투덜거렸다.
“손가락을 물렸으면 절단됐겠습니다.”
“…….”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는데도 레이나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깨물어 놓았다.
“…….”
꽤 아파 보였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레이나는 여전히 의심과 불안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리오넬이 조심스럽게 레이나의 안색을 살폈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리오넬도 저항하는 레이나에게 몇 대를 걷어차이고 팔꿈치로 얻어맞았다.
“…….”
하지만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차 구석에 몸을 옹송그린 채 털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는 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의심을 온전히 거두지 못한 것 같았다.
“…….”
두 기사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많이 놀랄 만한 일이었구나.
어차피 연기는 잠깐이니, 작전만 성공시킨 후 얼른 얼굴을 드러내고 사정을 설명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레이나가 너무 놀란 것 같아 루칸은 물린 손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리길 멈추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리오넬이 다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레이나는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듯 웅크린 채 떨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진짜 납치처럼 꾸며야 해서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안전한 곳에 접어들자마자 말씀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불찰입니다.”
“…….”
“……많이 놀라셨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
레이나는 대답이 없다.
망설이다 어설프게 담요를 건네주는 리오넬의 손에도 레이나가 경계심을 보이며 흠칫하자, 루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짧게 고개를 저으며 관두라고 눈짓했다.
리오넬은 도로 담요를 거두었다.
루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통수만 벅벅 긁었다.
이런 정도의 위험은 별것도 아닌 전장에서 구르다 온 두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레이나의 두려움을 미처 미리 짐작하지 못했다.
리오넬이 설명을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우선 저흰 할머님 거처로 가고 있습니다. 줄리어스 저택으론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줄리어스 저택에서 레이디의 납치 사주가 있었던 걸로 추정돼서요.”
“…….”
“일단 레이디가 거기 계시는 게 그리 안전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마침 이 타이밍에 납치를 당하셨다고 하면 줄리어스를 제 발 저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
납치?
레이나는 뚫어져라 둘을 쳐다보았다.
“다음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 한동안 거기서 할머님과 함께 안전하게 머무르실 겁니다. 이제 눈치 보지 마시고 산책도 편하게 하시면서 푹 쉬십시오. 저희 기사들이 경호하겠습니다. 테일러 로렌슨 씨가 함께하실 겁니다.”
“…….”
레이나의 눈빛엔 별다른 안심의 빛이 떠오르는 기색이 없었다.
“음……. 그러니까.”
루칸이 애쓰는 리오넬을 슬쩍 당기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괜히 지금 더 겁먹을 만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거였다.
가뜩이나 잔뜩 경계하고 있는 레이나의 머릿속엔 이 갑작스러운 이야기들이 믿을 만하게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루칸이 레이나에게 양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시겠죠? 나중에 도착해서 진정되시면 다시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놀라게 해 드린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좀 봐주십시오.”
“…….”
그리고 루칸은 허리띠에서 작은 단검을 끌러내서 날을 잡고 레이나 쪽으로 손잡이를 내밀었다.
“…….”
레이나의 시선이 의심스럽게 루칸을 향했다.
“저희를 향해 들고 계십시오. 마음에 안정을 줄 겁니다.”
“…….”
레이나는 경계하는 기색이었지만 루칸이 주는 단검은 순순히 받아들었다.
루칸이 웃었다.
“오. 자세 좋은데요?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놓치거나 베이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레이디가 다치시기까지 하면 저희 진짜로 아서 경이나 케이 경한테 무지막지하게 혼날 것 같거든요.”
너스레를 떠는 루칸의 항복한 손엔 레이나에게 힘껏 물린 잇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보인 것이었다.
“…….”
레이나의 기색은 조금 누그러졌다.
* * *
교외로 빠져나간 마차는 한동안 사람 없는 마찻길을 달렸다.
단풍 든 숲을 통과하고, 개울을 몇 개나 건너고, 한적한 교외의 오솔길을 지나,
다시 우거진 활엽수 사이로 한참 인적 드문 숲길을 달려갔다.
“…….”
단검을 쥐고 여전히 의심이 가득하던 레이나의 눈빛에 처음으로 변화가 나타났다.
마차 차창에,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개울가의 외딴 통나무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
유리창 너머로 향한 레이나의 시선이 집 앞에 나와 있는 작은 노인과 젊은 남자에게 가 닿았다.
그들은 집 앞을 산책하며 레이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먼저 마차를 발견한 젊은 남자가 날아가는 잠자리를 쳐다보고 있는 노인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고 레이나가 탄 마차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어라 말을 했다.
‘으응?’ 하며 할머니의 시선이 마차로 향한다.
‘아…….’
갑자기 레이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비로소 모든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가 마차 안의 레이나를 발견하고 환히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레이나!”
할머니가 없었다면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 같은 기쁜 얼굴이지만, 테일러는 뛰어오는 대신 할머니의 어깨를 다시 감싸며 무어라 말을 한다.
할머니도 지팡이를 짚은 채 테일러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울컥 목이 메어왔다.
마차가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앗, 레이디! 위험…….”
마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레이나는 비틀거리며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넘어질 듯 말 듯 급하게 달려가, 두 팔에 할머니와 테일러를 와락 끌어안았다.
레이나는 비로소 긴장이 풀렸는지 으허엉, 으허어어엉.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
테일러는 당황한 얼굴로 할머니와 함께 레이나를 안고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레이나?”
레이나가 진짜로 납치되는 줄 알고 마차에서 겁에 질려 칼을 꼭 쥔 채 달려왔다는 걸 알게 된 테일러는 레이나를 껴안고 달래 주며 기사들에게 몹시도 화를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