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 그럴싸한 가족 (95/210)


#95. 그럴싸한 가족
2022.07.28.


케이가 짧게 헛기침을 하고 아서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들었습니다.”

아서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아서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함께 걸어가던 케이가 잠시 침묵하는 시간을 둔 후 말했다.


“아직 안 됩니다. ……아시겠지만.”

“뭘? ……아.”

제 침실을 찾아와 달라는 말?

그녀에게 사기 결혼에 대해 사적인 복수나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는 핍박을 했다는 식으로 비칠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생각하지도 않았어.”

케이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서가 담담히 말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다시 올리도록 후작가에 제안을 넣어. 적당한 조건 다시 달아서.”

“네.”

미래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에게 직접 해도 괜찮을 말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조금 피곤했다.

눈이 아프다.

아서는 묵묵히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 * *

방에서 레이나의 물건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받은 브로디가 레이나가 입었던 옷들과 몇 안 되는 그녀의 개인 소지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

브로디가 슬그머니 아서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레이나의 물건들은 따로 챙겼는데요. ……이 옷들은 어떻게…… 같이 정리할까요?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옷인데, 레이나가 한 번 입었던 것들이거든요.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다시 입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

아서가 짧게 끄덕여 긍정했다.


“원하는 대로 처분해.”

“네…….”

브로디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옷장에 걸려 있던 드레스들을 빼내었다.


“…….”

옷장에서 한 무더기의 옷들이 빠져나갔다.

옷들을 하나하나 고르며, 레이나가 입었던 옷들을 골라내 또 한 무더기를 빼낸다.

그 옷들을 걸치고 있던 레이나가 하나하나 떠오른다.

새삼스럽다. 저렇게 많은 옷들이 있었나.

남의 옷을 입고 안절부절못하는 걸 알고 있었는데.

좀 더 빨리 옷을 사줄 것을.

방 여기저기 있던 그녀의 물건들이 정리되어 트렁크에 들어갔다.

텅 빈 옷장의 빈자리가 휑했다.

* * *



“뭐?! 사생아?”

후작 부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불면증에 시달린 안색이 파리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진정하세요. 어머니. 너무 화내시면 몸에 안 좋아요.”

크리스티나가 후작 부인을 진정시켰다.

후작 부인은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고 씩씩거리다 눈 밑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네 아버지가 그 애를 사생아로 속여 우리 집안에 집어넣을 방법을 찾더라 이거니?”

후작 부인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남편의 사생아라는 단어나 상황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다음으로는 크리스티나의 혼인 계약에 얽힌 문제가 떠올랐다.

가문 입장에선 고려해 볼 만한 해법이긴 했다.

그것이 후작 부인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엄마.”

후작 부인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갔다.



“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후작의 방을 박차고 들어온 후작 부인이 그에게 윽박질렀다.


“그 앨 사생아로 위장한다고? 그럼 우리 크리스티나는! 크리스티나느은!!”

후작이 자신의 팔을 잡아챈 후작 부인의 손을 떨쳐 내며 짜증을 냈다.


“원, 어느 놈이 이렇게 입이 싼지! 누가 한대? 그냥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생각만 해 본 거뿐이야!”

후작 부인은 기가 막혀 소리쳤다.


“방법? 그게 방법이야? 그런 생각을 왜 하는데!”

이유는 알고 있었다.

후작 부인은 그녀의 남편이 돈과 가문의 영달을 크리스티나 위에 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작이 쏘아붙였다.


“당신 못 들었어? 렘브란트 경이 그 애를 다 봤다고! 이 일을 수습해야 할 거 아냐!”

후작 부인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수습은 우리 애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방법으로 수습을 해야지! 당신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당신이 그러고도 아비야?!”

후작이 치뜬 눈을 부라렸다.


“당신은 도무지 일의 우선순위가 가늠이 안 돼? 지금이 우리 가문에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이 와중에 내가 그 계집애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어야겠어?!”

후작 부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맞섰다.


“뒤치다꺼리는 크리스티나가 당신 뒤치다꺼리했지, 당신이 언제 크리스티나 뒤치다꺼리를 했어!”

후작이 눈을 부릅뜨며 이를 드러냈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목소리 낮추지 못해?!”

후작 부인은 후작의 눈에 손가락을 들이밀고 눈알을 찌를 듯이 따졌다.


“크리스티나가 매일 아서를 찾아가서 두 시간씩 기다리는 거. 당신 알아, 몰라? 당신이 저지른 실수를 수습한다고 딸은 남편의 기사들 앞에서 매일 그 수모를 견디고 있는데, 아비라는 작자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상황을 더 개판으로 만들어?!”

눈이 뒤집힌 후작 부인의 막말에 후작이 길길이 뛰었다.


“이 정신 나간 여자가 어디 하늘 같은 지아비한테!”

와장창!

재떨이가 날아가 괘종시계를 깼다.

후작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결코 유력한 의견이 아니었다.

이왕 있는 가능성이니 눈살 찌푸리며 알아나 본다는 정도일 뿐, 거부감이 더 컸다.

그러나 분노로 머릿속이 달아오른 후작의 머릿속은 후작 부인에 대한 반발감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 * *



“…….”

정원으로 내려온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들어 줄리어스 저택의 휘황한 본관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달칵, 손에 든 가방을 열어 시가와 시가렛 홀더를 꺼내곤 담담히 고개를 숙여 시가에 불을 대었다.


“……아서 경의 구역인 줄 알았습니다.”

앞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놀라지도 않은 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시가에 마저 불을 붙인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후. 담배 연기를 뿜어낸 후에야 그녀는 남자를 향해 대답했다.


“나도 알아요. 그이의 구역인 거.”

“…….”

크리스티나가 다시 시가렛 홀더를 입가로 가져가며 리오넬을 향해 고갯짓했다.


“피워요. 당신이 먼저 온 모양인데 실례했군요.”

“…….”

크리스티나가 그를 응시하며 다시 시가렛 홀더를 물고 빨아들였다.

등 뒤에 손을 숨기고 고민하던 리오넬은 포기하고 크리스티나 앞에서 감추었던 시가를 꺼냈다.

하지만 시가에 불을 붙이는 대신 그는 자리에서 옆으로 물러섰다.


“아닙니다. 비켜주시면 나가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정원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입구를 완전히 막은 건 아니지만, 가족이 아닌 레이디와 남자가 가까이 스쳐 지나가기엔 무례가 될 수 있는 거리였다.


“…….”

크리스티나는 그를 쳐다보며 다시 담배를 물었다가 후 연기를 불어내곤 말했다.


“그이의 구역에서 그분의 기사를 쫓아낼 생각은 없어요. 내가 결례를 범하게 하지 마세요.”

“…….”

결국 둘 다 서로 빌미 잡힐 일을 하지 않겠노라는 선언이었다.

리오넬은 불편한 표정으로 잠자코 섰다.

크리스티나가 픽 웃더니 자신의 시가를 까닥 들었다.


“불 빌려 드려요?”

“아뇨.”

리오넬이 거절했다.

무슨 빌미를 잡히려고.

게다가 시가 피울 기분 따위 떠나간 지 오래였다.


“이전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불 정도는 빌려줄 수 있는데. 아쉽군요.”

“…….”

리오넬이 담담하게 답했다.


“사과라면 후작 각하께 받았습니다.”

“…….”

크리스티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비켜주지 않아 결국 리오넬은 자신이 서 있던 구석 자리에 도로 물러나 그녀를 외면한 채 팔짱을 끼고 섰다.

담배에 불을 붙이진 않고, 그저 거리를 둔 채 크리스티나가 자리를 뜨길 기다리듯이.

두어 번 더 시가에 입을 대고 담배 연기를 들이켠 크리스티나는 그 자리에서 시가 하나를 반 정도 태운 뒤 흥이 식은 듯 꺼 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정보다 조금 더 빨리 물러서 준 것인지 타다 만 시가가 눈에 들어왔다.


“…….”

리오넬이 몸을 돌리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서 경은 이쪽으로 안 다니십니다.”

크리스티나는 떠나가며 말했다.


“알아요.”

 

 

* * *

 
트리스탄을 통해 아서의 부관으로서 복귀 의사를 밝힌 딜런 오스본은 휠체어에 앉은 채 아서를 찾아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채.


“…….”

“…….”

트리스탄을 제외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후.

딜런 오스본이 뿌득 이를 갈았다.


“사기 결혼이라뇨.”

“…….”

분을 못 이긴 딜런이 틀어쥔 주먹으로 휠체어의 팔걸이를 쿵 내리쳤다.


“……실명이라뇨!”

“…….”

다행히 오러로 살핀 결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아서가 어색하게 트리스탄을 한 번, 딜런을 한 번 보고는,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


“음……. 일단 복귀해 줘서 고맙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루칸한텐 비밀로 해 줘.”

아서의 최측근 기사의 자격으로 그가 처해 있는 어려움의 이야기를 들은 딜런 오스본은 놀라운 속도로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비록 아직 걸을 수 없을망정, 그의 완고한 아버지를 뿌리치고 맹렬히 휠체어를 굴려서.

다행히 음독으로 인한 딜런 오스본의 시력 상실은 어느 정도 개선이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딜런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기꺼이 아서의 실명 진료의 대외적 핑계가 되기를 자처했다.

아서는 좀 난감해했지만 딜런의 복귀는 환영했다.

아끼는 동료가 삶의 의지를 되찾길 바랐고, 그들에겐 상이군인의 상징이 될 사람도 필요했다.

* * *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리어스 외성에 도착했다.


“부인! 드디어 줄리어스가 보여요.”

우아한 모자 아래로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중년의 귀부인이 마차 창 너머로 풍요로운 가을빛에 물든 영지를 내다보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외모의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줄리어스로군요. 오랜만이네.”

“고생하셨어요. 마차를 오래 타서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괜찮아요. 자네들도 고생했어.”

“고생은요. 부인께서 함께 와 주셔서 저희는 힘든 줄도 모르고 왔는데요.”

시녀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차 안에 흘렀다.

* * *



“주인어른!”

집사장이 황급히 달려와 고했다.


“렘브란트 경이 모신 황실 하녀분들이 오셨습니다. 그, 그런데 하녀분들의 인솔자로, 퍼, 펄 공작 부인이 오셨습니다!!”

“뭐? 누가 와?”

후작이 눈을 크게 뜨고, 후작 부인이 후다닥 일어섰다.

펄 공작 부인.

황제의 누이로, 아서를 ‘로아스 자작가’에 입양시킨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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