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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찾아온 사람 (109/210)


#109. 찾아온 사람
2022.09.15.


주변에 위험이 없는지 눈으로 훑어 확인한 렘브란트가 레이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다시 만나게 돼 다행입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

레이나의 눈이 순간 흠칫하며 그의 뒤로 움직였다.

다음 순간 렘브란트의 웃는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등 뒤에서 기척 없이 가까워진 누군가가 그의 목에 서늘한 칼날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

분명 주변을 확인했는데도 칼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수준이 높은 상대라는 의미였다.


“물러납시다.”

“…….”

루칸이 그의 목에 댄 칼날을 위아래로 까딱 움직여 재촉했다.


“두 손 천천히 위로 올리시고.”

렘브란트의 허리에도 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무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담담하게 미소 지은 렘브란트가 양손을 천천히 들고 순순히 뒤로 한발 물러났다.

렘브란트의 등이 루칸에게 가까워지며 그는 레이나에게서 물러서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목 옆을 겨누고 있던 칼날이 그의 목 앞에 들어오며 더욱 위협적으로 바싹 붙었다.

렘브란트가 레이나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납치범인가요? 아니면 레이디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

“…….”

레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서가 자신을 숨겨 두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뒤쪽 사내가 자신을 레이나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듯이 칼을 바짝 당겨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알아챘다.


‘보호자 쪽이군.’

됐다. 그럼 날 해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단 다른 이유로 마음이 놓였다.

도와주러 가겠다고 해놓고 위험에 처한 그녀를 놓쳐 버려 계속 마음이 쓰였는데.

누군가의 보호 하에 있었구나.

레이나가 그를 보고 겁에 질리지 않고, 핍박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상태라는 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짐작을 입 밖으로 내진 않은 채 손을 든 자세 그대로 뒤쪽의 사내를 향해 제 정체를 밝혔다.


“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입니다.”

“…….”

루칸이 눈을 찌푸리며 그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화가 양반?

황태자 전하의 사촌?

얌전히 두 손을 든 채 렘브란트의 말이 이어졌다.


“해치지 말아 달라고 하는 말 맞습니다. 이 칼 사용하시는 거 심사숙고해 주세요. 저한테 그러시면 일이 커질 겁니다.”

“…….”

진짜 렘브란트라면 일이 커진다는 건 사실이었다.

루칸이 찌푸리며 레이나에게 시선을 돌려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

레이나가 부정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의미였다.

루칸이 얕게 한숨을 쉰 후 칼을 거두었다.


“……루칸 러쉬만입니다. 실례했습니다, 렘브란트 경.”

렘브란트가 손을 내리고 칼이 닿아 있던 목을 쓸며 웃었다.

루칸 러쉬만.

아서 경의 최측근 기사 넷 중 하나의 이름이다.

우호적인 태도로 미소 지은 그가 돌아서서 손을 내밀었다.


“루칸 경. 반갑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상대에게 넉살도 좋았다.

루칸이 그의 손을 맞잡고 눈인사했다.


“호위 없이 오신 겁니까?”

겁도 없이 혼자 왔냐는 뜻이었다.


“네, 혼자입니다.”

루칸이 그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턱짓해 가리켰다.


“칼 좀 쓰시나 봐요?”

렘브란트가 솔직하게 뒷머리를 만지며 민망해했다.


“……교양 수준으로 배우기야 했습니다만 제 주제는 압니다. 전쟁 영웅인 루칸 경을 상대로 칼을 뽑았다간 삼 초 안에 바닥을 구를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소탈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답이 마음에 들어 루칸이 웃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 오게 되는 곳이 아닌데.”

렘브란트가 미소 지었다.


“그런가요?”

공작 부인께서는 역시 좀 신비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렘브란트는 공작 부인, 아그네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
·



「……이…… 이 여자……. 어떻게…….」


「……네?」

 
렘브란트의 시선이 얼떨떨하게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 위로 따라갔다.

그녀는 줄리어스 저택을 찾아와 렘브란트의 처소에 들른 참이었다.


「……렘브란트 경!」

 
공작 부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여자의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여자 누구죠? 당신,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렘브란트의 이젤 위엔 레이나의 그림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후작이 발뺌하지 못하도록 그려두었던 그림을 마무리해 완성하던 것이었다.


「이 여자를 알아요? 어디서 봤어? 어떻게 알아요?!」

 
다급한 질문이 쏟아졌다.


「…….」

 

 
하지만 오히려 렘브란트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어제 도착한 공작 부인이야말로 어떻게 레이나 아스타린 양을 아시는 겁니까?

·
·
·

렘브란트는 펄 공작 부인에게 ‘레이나 아스타린’에 대해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털어놓았다.

그녀가 아서에게 해가 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펄 공작 부인이 사기 결혼 사태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심지어 레이나의 얼굴까지 알고 온 상황이었기에 뭘 숨길 수가 없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펄 공작 부인이 그 일이 공개되는 것이 아서에게 해가 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기에 렘브란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내놓았다.

확실한 것뿐만 아니라 아직 조사 중인 내용까지 전부 다.

거기엔 브로디에게서 전달받아 사실을 확인 중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브로디가 이야기한 ‘레이나가 후작가의 사생아일 가능성’을 렘브란트에게서 전해 들은 펄 공작 부인의 눈에서 번쩍 빛이 튀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황실 기만이고 엄청난 모욕이었지만, 어쨌든 후작의 사생아라면 후작의 딸인 것이 맞으니 혼인 계약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 혼인 계약서는 ‘후작의 딸’과의 혼인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니까.


「후작의 사생아? 확실한가요? 근거 확인했어요?」

 
물론 크리스티나를 결혼시킬 것처럼 말해 놓고 몰래 제 사생아를 들이밀었다는 건 황실을 기만한 것이니 기가 막힌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계약상 아서의 혼인에 문제가 없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불확실합니다. 정보가 잘 나오지 않더군요. 사람을 시켜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진실일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그 외에도 공작 부인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공작 부인이 근래 꽤나 레이나 아스타린에게 근접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흑발이요? 아뇨. 그분은 금발입니다. 얼핏 보면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렘브란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질문이 암시하는 바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하지만 흑발 상태로 마주치셨다면, 어쩌면 머리카락을 위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색 중인 경비병들이 ‘젊은 금발 여자’를 찾고 있거든요.」

 
공작 부인은 그렇게 그녀에 대해 몇 가지를 묻다가 어느 순간 뚫어져라 렘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이 일. 마리아 황후에게 보고했나요?」

 
렘브란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보고하지 않았고, 보고할 예정도 없습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황후 폐하께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부탁도 있었지만, 저 혼자 개인적인 이유로 그쪽을 돕고 싶기도 해서요.」

 
렘브란트는 잠시 ‘레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끊어가며 말했다.


「아서 경이 저를 신뢰해 주시거나 의지하고 있지는 않으신 상태입니다만, 황태자 전하께 아서 경의 뒤를 살펴 달라 부탁받았습니다.」


「그런 일이야 없길 바랍니다만, 혹시 황후 폐하와 관련한 무슨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면 보고해 달라는 말도 들었고요, 기꺼이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신부가 바꿔치기 된 일은…… 아서 경도 숨기고 계신 것 같고, 아무래도 결혼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비화될 수 있으니 황실에 들어가면 곤란할 것 같아서 웬만하면 황태자 전하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사실 그 일을 황태자에게도 알리지 않고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서보다는 레이나의 부탁이었기 때문이었지만…….

렘브란트는 대충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걱정되실 테니, 아그네스 님께서 아시는 걸 제게 말씀해 주시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아그네스 님께서 근래 이분을 목격하신 것 같아, 이것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데요.」


「건강해 보였습니까? 어디 상한 것으로 보이진 않던가요?」

 
그 말을 들은 공작 부인은 빤히 그를 쳐다보다 말했다.


「그 여자를 만나고 싶은데요.」


「……? 네……. 저도 찾고 있긴 합니다만.」

 
공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렘브란트가 멈칫했다.


「네?」

 
공작 부인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가긴 그렇군요. 그 여자, 날 보고 도망쳤습니다. 내가 누군지 아는 거겠죠. 얽히고 싶지 않아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시 만난다면 또 도망칠 거예요.」


「렘브란트 경. 내가 위치를 알려준다면 당신은 그래도 그 여자와 대화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맞나요?」

 

·
·
·

그렇게 된 일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곳에는, 진짜로 레이나 아스타린이 있었다.

* *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기사분들께서 구해 주신 건가요?”

레이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묵묵히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네.”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의 방침은 ‘미지의 괴한들에게 납치당하던 레이나를 아서의 기사들이 구조하여 숨겨 두었음’으로 하기로 정해 두고 있었다.

그 뒤에 선 리오넬이 말했다.


“줄리어스 저택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게 되어서요. 비밀리에 보호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머릿속에도 ‘해결사 잭’의 납치 의뢰에 관한 일이 떠올랐다.


“해결사 길드 짓인가요? 아서 경도 아시고요?”

“상세한 내용은 기밀로 분류되어 있는지라 상부 허락 없이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입장이 미묘한 상태이니 비밀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해합니다.”

렘브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에 보고하십시오. 괜찮으시다면 대화하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필요하다면 상부 대답이 올 때까지 전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레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신 전 레이디와 잠시 따로 대화하고 싶은데요.”

기사들이 자리를 비켜줄 수 있는지 묻는 말이었다.

리오넬과 눈이 마주친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넬과 루칸이 레이나의 의사를 확인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렘브란트는 잠시 두 기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

렘브란트가 레이나를 보고 콧잔등을 찡긋하며 미소 지었다.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미소였다.


“이제야 당신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됐네요. 이렇게 한참 돌아오게 될 줄 몰랐는데.”

레이나는 조심스러운 심정이었지만, 마음이 편해지며 따라서 미소 짓게 되기는 했다.


“……다시 뵙게 될 줄 몰랐어요.”

렘브란트는 조금 소리 내 웃었다.


“그런가요? 전 다시 보게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긴 했어요. 괜찮은 거 맞죠? 다친 곳 없구요?”

이번엔 레이나도 조금 더 웃었다.


“네. 정말 괜찮아요. 걱정해 주셨을 줄 몰랐어요. 이렇게 와 주실 줄도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렘브란트가 미소 지은 채 짧게 틈을 두고 문가를 한 번 본 뒤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레이디.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화가고, 눈썰미가 좋은 편이에요. 당신이 납치되던 날, 제가 당신을 봤습니다. 납치범들도 함께요.”

그리고 슥 고개를 갸웃하며 묘하게 문밖을 눈짓했다.

바깥에 있는 루칸과 리오넬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니 혹시나 싶은 게 있네요.”

“…….”

레이나는 조금 놀라서 렘브란트를 바라보았다.

렘브란트는 지금, 그녀를 납치했던 것이 리오넬과 루칸이라는 것을 자신이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 당신의 의지가 반영된 게 맞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정말 괜찮습니까?”

“…….”

렘브란트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에게 전에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나는 당신 사정에 대해 듣고 싶고,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요. 어떤 종류의 도움이든 말이에요.”

아서 경이 당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건 당신이 원하는 방향과 일치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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