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 정리했습니다 (116/210)


#116. 정리했습니다
2022.10.09.



 
펄 공작 부인이 루모스 상단의 호텔에 머문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그곳에는 매일같이 산더미 같은 편지들이 쇄도하고 있었다.

주로 용무는 아서 경의 귀환을 축하드린다, 저도 마침 줄리어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펄 공작 부인께서도 이곳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고 기쁜 마음에 인사드린다는 편지들이었다.

모처럼의 우연에 눈도장을 찍거나, 공작 부인에게 인사 올릴 기회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었다.

시녀들은 대부분의 편지를 걸러내고 이미 안면이 있거나 중요한 사람들의 편지만 남겼지만 그럼에도 은쟁반 위에 올려진 편지는 수십 통이었다.

쟁반 위에 쌓인 편지를 본 공작 부인은 시녀에게 말했다.


“렘브란트 경, 란델 대주교, 줄리어스로부터 온 것만 남기세요.”

그 후 펄 공작 부인의 은쟁반 위에 남은 편지는 네 통이었다.

렘브란트, 대주교, 후작 부인, 그리고 아서에게서 온 것이었다.

답장은 자주 보내지 않았지만 아서의 편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항상 쟁반에 올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시녀는 없었다.

공작 부인은 언제나처럼 아서의 편지를 제일 먼저 집어 들었다.

내용은 짧았다.

【 친애하는 대모님. 】

【 편찮으시다 들었습니다. 】

【 편하신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

【 찾아뵙겠습니다. 】

【 아서 줄리어스. 】

아하.

아그네스는 묵묵한 얼굴로 편지를 보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

사원에서 인사도 없이 사라진 공작 부인을 위해 시녀가 적당히 둘러대었을 말이었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서로선 안부를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긴 했다.

바쁜 사람 번거롭게 했군.

그래도 줄리어스와 별개로 황실 사람과 교류하는 모습을 한 번쯤 사람들에게 보여 두는 것은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서가 가진 권력이 ‘줄리어스’뿐인 건 아니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줄리어스, 그리고 줄리어스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

결정은 빨랐다.

그러나 편지를 보던 아그네스는 묘한 위화감에 물끄러미 아서의 편지를 바라보았다.

아서의 글씨가…… 원래 이랬던가?

급하게 썼는지 필체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녀는 편지 한구석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곧 그 위화감을 넘겨 버렸다.

* * *



“아서.”

“대모님.”

호칭과 미소는 친근했지만 아서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편찮으셨다는 말씀을 듣고 염려했습니다.”

허락을 받고 왔으면서도 실례를 무릅쓰고 왔다며 정중하게 안부를 확인하는 모습이 예의 바르고 거리감이 있었다.

언제나와 똑같은 아서였다.

아그네스는 미소 지었다.


“염려해야 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다행입니다.”

아그네스는 그의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

무인들 가운에서도 드물 정도로 큰 키.

절제된 태도임에도 위압감이 숨겨지지 않는 무인의 아우라.

자세는 곧고 미소는 흔들리지 않으며 표정은 귀족적으로 정제되어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완벽하게 황실의 관리하에 자라난 황자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어떤 의미에서 아서는 그녀의 또 다른 조카인 황태자 카일보다 더 귀족적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완벽하게 자라게 만들었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 옳았는지는 어차피 알 수 없다.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쉰 뒤 미소 지었다.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맙구나. 앉으렴.”

아서가 싱긋 웃었다.

아그네스가 먼저 자리에 앉고, 티 테이블 너머에 자리한 아서는 잠시 뜸을 들이며 펼친 손을 짧게 마주 대었다가 떼며 물었다.


“피로해 보이십니다. 아직 불편이 있으시면 의사를 보내 드릴까요?”

여독으로 몸이 좋지 않다는 건 시녀가 말한 핑계였다.

하지만 오히려 사기 결혼 건을 알게 된 후 잠 못 이룬 밤들이 그녀의 몸에 피로를 남겼다.

아그네스는 눈썹을 으쓱하며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그래 보인다면 그냥 잠을 설쳐서 그런 모양이야. 의사는 필요 없다.”

아서가 미소 지은 뒤 틈을 두고 물었다.


“루모스 호텔이 불편하시면 후작 저택에서 모실까요? 이미 줄리어스 후작의 같은 제안을 거절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대자의 제안이라면 다른 대답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오만을 허락하실지 모르겠군요.”

그의 표현에 아그네스가 웃었다.


“후작이 이제 수도로 떠난다고.”

“예.”

“흠…….”

아그네스는 작게 웃음이 남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

“네. 대모님.”

“내가 굳이 이곳에 머문 이유가 있다는 걸 네가 짐작할지도 모르겠구나. 만일 그렇다면, 네가 짐작하는 바가 맞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아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서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비록 황후의 자식이 아니라 해도 너는 황제의 맏아들이야. 그 누구도 감히 너에게 그런 식으로 할 수 없다. 선제후 줄리어스라 해도 감히 그럴 수 없어. 후작은 황실과의 정략혼과 네가 세운 공훈으로 지금 그 자릴 얻었다. 그런 너와 황실을 기만했다면, 그건 그를 선제후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는 사안이야. 나는 후작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너를 위해서건, 황실의 권위를 위해서건, 내 개인적인 신념을 위해서건.”

위선적으로 느껴져도 상관없다.

아그네스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홀로 장성하기까지 거리를 두었던 긴 세월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침묵하는 이유가 있겠지. 너는 신중하니, 여러 가지 관계를 생각한다는 걸 안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구나.”

아서가 그 말에 아그네스를 물끄러미 보더니 피식 작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고 고개를 숙였다.

조금 민망해하는 투였다.


“걱정 끼쳤습니다.”

“…….”

아서는 고개를 들고 공작 부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혼인은 문제없게 만들겠습니다.”

공작 부인이 가만히 아서를 바라보았다.


“문제없니?”

“네. 더 이상 실수 없게 하겠습니다. 혼인은 다시 진행할 겁니다.”

아서가 말했다.


“…….”

믿기 어려웠다.

아그네스는 아서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안정된 오러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완벽하게 정리된 아서의 표정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자신이 본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아서의 태도는 너무 단정하고, 담백했다.

그 어디에도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

아그네스가 말했다.


“……그 아이를 만나 보고 싶구나.”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답은 준비한 듯 담담하게,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요. 부인의 위엄을 감당해낼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그네스는 가만히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는 시종일관 무정하도록 담백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고용주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주도했다기보단 휘말린 사람입니다. 두려워하며 제게 죄스러워하더군요. 저는 가엾다는 마음으로 정리했습니다.”

가엾다는 마음으로 정리했다…….

아그네스는 거리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의 모습을 생각하며 아서를 바라보았다.

분명 한때는 그 애에게 마음 썼을 모습이었는데.

아서가 싱긋 웃었다.


“아랫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괘씸하다는 마음이 드시겠지만, 대모님께서도 딱하다는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더 이상 일이 잘못되지 않게 정리하기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

아그네스는 가만히 아서를 바라보다가, 조금 허탈하고 공허한 기분으로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아서는 자신이 당한 모욕과 기만에 분노하기보다 아랫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아서의 담담하고 성숙한 태도는 그녀의 분노마저 다독이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정말로.

아그네스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

공작 부인의 눈빛이 너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지를 묻고 있었다.

아서가 조용하게 답했다.


“줄리어스의 징집병들에게 온당한 대우를 돌려주려면 줄리어스가 큰 피해를 입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요. 제 혼인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아그네스는 깨달았다.

이 아이를 움직이는 것은 그런 것이구나.

의무. 책임감. 동정심.

이 아이는 정말 그런 사내로 자랐구나.

정말이지 아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이가 황실의 울타리 안에서 태어났더라면.


“불쌍한 평민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빙긋 웃으며 쉽게도 감싸는 말이.

정말 무감하게 들렸다.

아그네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았다.”

아그네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그 애는 한번 보고 싶구나. 만나게 해 주렴.”

아서에 대한 일을 한 발 떨어져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고,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은 대주교가 그녀에게 내린 보속이었다.


“내가 네 혼인성사의 증인이었다. 최소한 내 눈으로 그 사람을 확인할 의무가 있어. 그 아이를 탓하지 않을 테니, 그 이상 모른 척 외면해달라 하지는 말렴.”

“…….”

아서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무릎 위에서 손을 깍지끼고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며 절제된 대답을 내놓았다.


“네.”

그래.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괜찮다면, 그러면 되었다.

아서가 정리했다면.

모두를 위해 그러기로 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 * *

단정하게 입은 레이나는 긴장한 태도로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공작 부인의 시선을 받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펄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이미 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기에 레이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일전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

아그네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환상으로만 여러 번 다시 보았던 그녀를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이 놀라웠기 때문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를 닮았기 때문도,

가늘게 떨면서도 견뎌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초조하게 치마를 움켜쥔 레이나에게서는 전보다 더 눈부신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

공작 부인은 황망히 아서를 쳐다보았다.

아서.

너…….

그리고 아서의 표정을 본 공작 부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공작 부인 앞에서 완벽하게 관리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아서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노려보는 듯한 시선.

옆에 있던 갈색 머리의 청년이 인사를 올렸다.


“테일러 로렌슨입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옆에 있던 렘브란트가 미소 지으며 예를 표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아서의 시선은 그녀와,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데리고 온 두 남자를 향해 꽂혀 있었다.

오러가 끓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친 감정이 너무 투명하고 쉬워 공작 부인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아서, 너…….

거짓말이잖아?

대체 뭘 정리했다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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