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공작 부인의 방식
(117/210)
117. 공작 부인의 방식
(117/210)
#117. 공작 부인의 방식
2022.10.13.
레이나는 긴장한 채 공작 부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
공작 부인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레이나는 이 자리에 나왔다.
* * *
케이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레이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뜬 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는 그녀가 거절하려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서 경이 함께할 거예요.”
가능하면 레이나가 응해 주길 바라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애초에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만나 뵐게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공작 부인이 자신을 찾는다면 당연히 나가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레이나는 아서의 최대 조력자인 펄 공작 부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펄 공작 부인은 자애로운 듯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고, 소탈한 듯하면서도 엄격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상당한 권위를 가진 원칙주의자라, 아서의 혼인 맹세를 어지럽힌 레이나는 불호령을 들을지도 몰랐다.
모두 아서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며 알게 된 것들이었다.
‘무서워.’
그럼에도 레이나는 서둘러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원치 않으면 몸이 좋지 않다고 전하거나 대역을 내보내는 방법도 있으니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함께 전해져 왔지만, 레이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뇨, 제가 나갈게요.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나가는 게 맞을 것 같아요.”
펄 공작 부인. 두려워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공작 부인이 원하고, 아서 경이 만나게 해도 좋다고 결정했다면.
그분은 아서 경에게 큰 힘이 되어 줄 사람이니까.
……그리고 더 이상 대역은 안 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레이나는 아서에게 드러내지 않은 공작 부인의 호의를 짐작하고 있었다.
절대 북부에서 움직이지 않던 분이 친히 이곳까지 행차해 주신 것만 봐도 그랬다.
황태자 전하는 이미 수도에 입성했고, 줄리어스 후작에겐 렘브란트 경이 왔다.
모두 황실의 호의와 권력이 밀접하게 이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아서 경은 황제의 부름, 즉 개선식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아서 경은 황제 폐하의 외면으로 오랜 세월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셨잖아요.”
레이나가 가라앉은 눈으로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공작 부인께서 먼 길을 와 주신 덕분에 이번에는 아서 경도 황제 폐하께서 불러 주시길 일방적으로 기다리지 않게 됐어요.”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별일은 없을 거예요.”
레이나의 눈빛에 의연한 의무감이 떠올랐다.
“대역은 없어요.”
그런 분이 두렵다고 대역을 내보낼 순 없는 거다.
루칸이 눈을 굴리다 물었다.
“그거, 공작 부인이 각하를 정치적으로 도와주고 있다는 의미예요?”
레이나가 약간 수줍은 듯 말하면서도 눈을 빛냈다.
“폐하의 부름을 기다리며 줄리어스 영지에서 대기하는 아서 경에게 ‘펄 공작 부인’이 왔다는 건, 아서 경에게 황실 힘을 보태 준다는 의미잖아요.”
레이나의 눈동자에 별빛이 돌았다.
“폐하의 누님이신 공작 부인이 함께한다는 건 황제 폐하가 격식을 갖추어 아서 경을 맞이할 거라는 약속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마치 몇 년 동안 누가 그런 걸 물어봐 주길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레이나는 기쁜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북부에선 수도가 훨씬 가까운데도, 공작 부인은 수도로 바로 가서 기다리지 않고 일부러 하녀들과 함께 줄리어스로 와 주셨어요. 그분께선 사람들의 관심을 좋아하지 않으시는데도…….”
그 어떤 신문에도 그렇게까지는 이야기가 다뤄지지 않았지만 늘 기사를 찾아보며 아서의 상황을 염려하고 있던 레이나의 눈에는 아서에게 힘이 되어 주려는 공작 부인의 의도가 어렵지 않게 읽혔다.
“…….”
이 정도로 섬세한 해석을 들어본 적 없는 기사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혀 그런 거 모를 것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이상했다.
“그렇게 아서 경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니까……. 음……. 하지만…….”
신나서 말을 이어가던 레이나가 말끝을 흐리다 멈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
트리스탄과 기사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제풀에 취해 주절주절 말한 것을 깨닫고 레이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해요. 제가 무심결에 주제넘은 말을 했네요.”
“……아닙니다.”
“그, 그럼 나갈 때 말씀해 주세요. 전 준비할게요.”
레이나는 민망해하며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은 기사들이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음 뭐였을까?”
“그러게요. 마저 말해 주고 가시지.”
“…….”
트리스탄은 묘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 * *
“휴우…….”
레이나는 갑자기 말문이 터진 듯 늘어놓은 것이 창피해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관심 있는 내용으로 화두가 던져지자 저도 모르게 줄줄 늘어놓고 말았다.
그나마 공작 부인 이야기라 다행이었다.
그분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정도는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아서 경의 최대 조력자.
하지만 공작 부인은 냉정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서가 받은 호의는 그분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레이나는 아서가 아그네스의 호의를 계속 누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레이나는 그분에게 잘 혼나고, 아서의 미래에 흙탕물이 튀지 않도록 공작 부인이 자신의 일을 잘 정리해 주시길 바랐다.
“…….”
레이나는 긴장한 얼굴을 찰싹 가볍게 두드리며 눈빛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나는 신중하게 옷을 골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와 격식을 갖추었다.
레이나가 고른 것은 단정한 드레스였다.
* * *
끼익.
격식을 갖춰 드레스를 입고 나온 레이나를 보고 루칸은 예쁘다며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반면 일반적 귀족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리오넬은 좀 우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격식을 갖추는 것도 좋습니다만, 평민 복식으로 입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평민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리오넬의 염려를 이해했지만,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정도는 입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제가 아서 경에게 충분히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걸 아실 텐데, 일부러 그런 옷을 입는다면 도리어 동정을 사려 드는 걸로 보여서 좋지 않을 거예요.”
하녀 몇이 달려들어 입혀야 할 정도로 화려하게 입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초라해서도 안 된다.
공작 부인은 죄를 저질러 끌려와 놓고 일부러 높은 분들 앞에서 보란 듯이 초라하게 입은 영악한 마름을 엄벌한 과거가 있었다.
모두 레이나의 검정 표지 스크랩북에 ‘펄 공작 부인’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아서가 사 준 드레스들 가운데 적당한 것이 있어 레이나는 공작 부인 식의 예법에 맞게 격식을 갖출 수 있었다.
케이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공작 부인을 잘 아시는군요?”
케이 경이 그렇게 말해 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 * *
“…….”
하지만 정작 그녀를 보고 싶다던 공작 부인은 레이나를 한번 보더니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
공작 부인을 앞에 둔 레이나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레이나는 펄 공작 부인이 그러는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안 그래도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을 텐데, 며칠 전에 마주친 무례한 평민 여자가 그 사기 결혼 상대라는 걸 아셨을 테니…….
공작 부인은 날 보고 더 화가 나신 거야.
레이나는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공작 부인을 불쾌하게 했을까?’
‘당연히 그랬겠지?’
‘차라리 나오지 말아야 했을까?’
제 존재가 아서 앞의 조그만 진창이라도 될까, 레이나는 초조하게 움켜쥔 손을 치맛자락에 눌렀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레이나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기가 막혀 있는 상태였다.
‘정리했다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며?’
‘아니 얘가 어쩌려고 이러지?’
눈 하나 깜짝 않고 싱긋 웃는 얼굴로 거짓말을 하던 게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네 어머니가 배우였지.
새삼 피의 위력을 통탄하게 되었다.
근데 지금은 왜 그렇게 감쪽같이 관리를 못 하는데?
레이나의 곁에 선 남자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아서를 보고 당혹한 공작 부인은 아서에게서 시선을 떼며 레이나 주변의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의 시선이 테일러에게 향했다.
특히 아서의 적의가 강하게 느껴지는 쪽이었다.
“한 분은 아는 분인데. 한 분은 낯선 분이군요.”
아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적의를 갈무리하고 깔끔한 무표정이 되었지만 더 이상 가치 있는 포커페이스가 아니었다.
렘브란트가 그를 간단히 소개했다.
“로렌슨 씨는 아서 경의 참모진과 함께하는 동료이자 레이디의 오랜 친우이시고, 지금 아서 경과 함께 레이디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이셔서 함께 나왔습니다. 레이디 레이나와 가족의 건강을 돌보고 있습니다. 의사입니다.”
레이나를 에스코트할 만한 사람이라는 암시가 있었다.
아그네스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와 함께 이 여자의 보호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테일러 로렌슨 씨라고 했나요.”
“네, 공작 부인.”
“내가 사교계 소식에 밝은 편이 아닌데도 당신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요. 맞나요?”
테일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명성을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30년째 줄리어스 가문에 몸담고 계신 의사이십니다.”
무표정에 가깝던 공작 부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으로도 들었던 것 같군요. 닥터 로렌슨이지요?”
“예. 공작 부인께서 아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아버지께서 무척 영광스러워하실 것입니다.”
공작 부인이 미소 지었다.
“내가 들은 건 당신 이름이지만 당신의 아버지가 의사들의 스승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테일러 경.”
테일러는 조금 얼떨떨하게 다시 인사했다.
“……영광입니다, 공작 부인.”
닥터 로렌슨.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의사가 30년 충성으로 모시는 가문이라고 줄리어스가 유명해졌었지.
그 외에도 의사 ‘테일러 로렌슨’이라면…….
‘그 일’로 작위를 받은 사람.
아서가 보내준다는 의사가 이 사람이었나?
그런데 아서가 저 의사를 저런 눈으로 본다는 건…….
공작 부인이 무심결에 그 옆의 레이나에게 시선을 돌리자, 레이나가 무릎을 굽히며 공손히 예를 표했다.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펄 공작 부인.”
그 말을 듣고서야 펄 공작 부인은 새삼스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우리 초면이 아니죠?”
공작 부인은 그렇게만 말한 뒤 레이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가엾다는 마음으로 용서했다…….
불쌍한 평민이다.
혼인은 문제없게 만들겠다.
아서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서.
“…….”
아그네스는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빛이 눈부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아그네스는 레이나에 대한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웬 낡은 산장에서 할머니랑 숨어 지내고 있다기에, 허름한 옷을 입고 와서 불쌍한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나를 만난다고 신경 쓴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서의 주변엔 남자들 뿐이라 그런 조언을 해 준 사람이 없었을 텐데.
본인이 아닌 내게 맞추어 불편했을 옷을 단정하게 입고,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차마 염치없어하는 죄인 같은 태도에 동정심이 일었다.
비록 첫 만남에서 그녀에게 손을 뿌리쳐졌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혼자 몸으로 열심히 살며 할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것도 기특해 보였다.
사원에 자주 출석했던 모습을 이미 봤기에 호감이 가는 것도 있었다.
공작 부인이 굳은 표정을 풀며 미소 지었다.
“레이나 양. 당신 이름을 이제 듣네요.”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 레이나는 흠칫하며 반짝 눈을 떴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차 한 잔, 오늘은 마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