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 속 (126/210)


#126. 속
2022.11.13.


아서는 시력을 잃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눈치채이지 않기 위한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 왔다.

그에게는 오러가 있었고, 아서 자신은 딱히 재능이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연기를 잘했다.

아그네스가 끝내 아서의 시력 문제를 눈치채지 못하고 돌아간 후.

아서는 묘한 기분으로 웃었다.


“…….”

오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들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눈치챈 사람은 카일뿐이었다.

아닌 척하지만 사실 그를 꽤 걱정해주고 있는 그의 대모, 펄 공작 부인도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

아서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심 자신이 충분히 준비했다는 것을 확인받은 기분이 되어 안심했다.

공작 부인조차 모를 정도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읽어야 하는 일만 없으면 된다.

그럴 상황이 올 것 같으면, 미리 다 외우면 되는 일이고.

다른 사람 앞에서 뭔가를 읽어내야 하는 빌미만 주지 않으면 된다.


“…….”

후작저에서는 아마 문제가 없을 것이고.

황궁에서 일이 있다면, 카일과 케이가 도와줄 것이다.

아서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 * *

시녀와 함께 마차에 오르기 직전.

아그네스는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멈추었다.


“펄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

아그네스와 시녀는 멈추어 돌아섰다.

뒤에서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무릎을 굽혀 공손히 인사했다.


 


“…….”

태양 같은 금발과 윤기 나는 피부, 화려한 드레스에 얹은 반짝이는 보석 가루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몹시도 인상적이었다.

과해 보일 법한데도 조금도 그런 느낌 없이 소화해내는 모습이 대단했다.

모든 꾸밈이 그녀의 화려한 이목구비에 몹시도 잘 어울리고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공손한 것은 인사하는 자태뿐이었다.

윗사람이 먼저 시선을 주며 인사해도 좋다는 신호를 주기 전에는 아랫사람이 먼저 다가가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사교계의 법도였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감히 뒤에서 불러세워 저를 돌아보게 하다니.

아그네스의 시녀가 즉시 불편한 기색으로 지적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윗사람을 뒤에서 불러세워 돌아보게 하는 법도는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미소 지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저택에 황실의 웃어른께서 방문하셨는데 오신 줄 알면서도 인사조차 올리지 않고 보내드리는 무도함과 감히 부인의 뒤에서 인사 올리는 무례를 저울질하였습니다. 떠나시는 모습이 보이기에 다급하여 실수를 하고 말았네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사근사근한 사교계 언어로 돌아온 대답에 시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지금 아그네스가 ‘제 저택’에 찾아와 데릴사위만 만나고 가문의 원래 주인에게는 인사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가는 건 무례가 아니냐는 대답으로 받아친 것이었다.

‘줄리어스 저택’에 왔으면서 집주인에게 인사를 전하고 가지 않는 것이 굳이 따지자면 아그네스의 실수이긴 했다.

데릴사위를 집주인으로 여기는 태도가 드러났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감히 새파랗게 젊은 조카며느리가 공작 부인을 뒤에서 불러세우고 ‘저는 안 만나고 가시네요?’ 하며 그것을 지적하는 배짱은 대단하긴 했다.

아그네스는 발끈하는 시녀를 저지하며 미소 지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그대가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기에 나에게 인사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방문하였는데 그대에게 인사할 기회를 주지 않고 떠나려 해서 서운했다니 미안하군요.”

크리스티나는 아름다운 금발을 수줍은 듯 손으로 쓸며 웃었다.

머리카락에도 보석 가루를 장식한 듯 움직임에 따라 빛이 산란했다.


“아뇨. 별말씀을요. 남편의 대모님이신 부인께 충분히 살갑지 못했던 부족한 제가 죄송할 뿐입니다.”

아그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내 앞으로 그대를 더 다정하게 지켜보겠습니다. 특히 결혼식에서요.”

아그네스가 짧은 틈을 두고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지난번의 결혼식에 내가 미처 참석하지 못했죠.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말속에서 뼈를 느낀 크리스티나가 묵묵히 웃다가 입을 열려고 했다.

눈썹을 한 번 으쓱인 아그네스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덕담하듯 말을 이었다.


“사원에서 미사를 볼 때, 귀빈석의 방음에는 좀 더 신경 쓰도록 해요. 다른 귀빈이 들을 수도 있으니까.”

“…….”

침묵하던 크리스티나가 짧게 웃으며 답했다.


“주의하겠습니다, 대모님. 관심 어린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귀족어였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아그네스가 아서에게 그리 살갑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 보호자인 척 군다는 비아냥이었다.

귀빈석의 방음 이야기는 시녀는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 비아냥은 아그네스만이 알아들었다.

아그네스가 냉랭하고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대가 보낸 카드는 받았습니다. 답장을 하지 못한 건 미안해요. 손가락이 피곤했던지라.”

크리스티나의 티타임 초대를 무시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유연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만나 인사드릴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공손함과 비아냥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대답에 시녀는 기가 찼지만 아그네스가 이미 한 번 저지했기에 더 나서지 못하고 침묵했다.

어쨌든 크리스티나의 몹시도 공손한 자태는 그것을 공손함 쪽으로 잘 포장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사뭇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 제게 한 번 대모님을 따로 초대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대모님과 티타임을 함께할 영광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곧 수도까지 여정을 함께할 텐데요.”

위축되기는커녕 천연덕스럽게 그녀를 초대하는 크리스티나의 배짱과 뻔뻔함에 시녀는 속으로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그렇게 비아냥대 놓고, 부인께서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공작 부인은 부드럽고 품위 있게, 아주 가볍게 거절했다.


“결혼식을 먼저 다정하게 지켜보겠습니다. 살가운 티타임은 그 후에 가져도 괜찮을 것 같군요.”

크리스티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이며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혔다.


“예, 대모님. 아쉽지만 그럼.”

“양해해 주어서 고마워요.”

“종종 편지 드리겠습니다.”

“가능하면 답장하도록 하지요. 손가락이 피로하지 않다면.”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네, 대모님. 살펴 가십시오.”

아그네스는 시녀와 함께 마차에 올라 떠났다.

크리스티나가 떠나는 마차 뒤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마차가 저택의 정문을 통과하자, 아그네스의 시녀가 기가 차서 탄복했다.


“저런 줄 몰랐는데.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성격이 대단하네요. 솔직히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성격에 대한 소문을 믿지 않았었는데, 적어도 후작 영애에 대해선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났던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하지만 아그네스는 그저 “내 실수가 맞긴 하지.” 하며 별 표정 없이 창밖을 보았기에 시녀는 혼자서 식식 분을 삭였다.

크리스티나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진 시녀는 크리스티나의 화려한 차림새도 트집 잡으며 불평을 이어갔다.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다더니 집 안에서 그렇게 반짝반짝 화려하게 꾸미고. 그렇게 하고 부인께 인사 올리러 온 저의가 뭘까요?”

“…….”

반짝반짝 꾸몄다고?

속으로 의문을 느끼던 공작 부인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

레이나에게서 쏟아지는 빛에 익숙해진 공작 부인은 뒤늦게 크리스티나가 화려하게 꾸미고 나왔던 것을 인지했다.

아그네스의 눈에는 크리스티나보다 레이나가 훨씬 인상적인 반짝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아그네스는 심란하여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어차피 아서의 아내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되어야 한다.

마리아 황후를 대비해야 하는 아서를 위해, 그리고 기사들과 병사들의 안녕을 위해서도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분명한데.

나 자신마저 우습게 만들며 이 눈은 왜 자꾸 그 애를 제 속에 담는지.


「―제 오러나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연관 있기 때문입니까?」

 
그 후에 이어진 아서의 미소가 아그네스를 괴롭게 했다.

「―대모님. 저를 위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선택권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외람되나 대모님 것도 아니겠지요.

그건 그 사람의 것입니다.

그녀를 압박하지 마십시오.

단두대가 제일 무섭다는 사람입니다.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30골드면 꿈속에서도 행복한 사람이고요.

그럼에도 대모님께서 말씀하시면 거절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저한테 얽히면 속수무책일 겁니다.

돈으로든, 권력으로든, 동정심으로든.

그 무엇으로든 얼마든지 그 사람을 눌러 앉힐 수 있으실 것임을 알기에 부탁드립니다.

그 사람에겐 저와의 일이 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실 필요도 없지만, 설령 필요가 있어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이변이 일어나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제 곁에 남아 주겠다 한다면 그때야 다시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보내주어야 합니다.

전장에서 오 년 동안, 나름대로 의지가 되었던 말을 해 준 사람입니다.

돌아온 후에는, 이런저런 모든 사정에도 저를 위해 주느라 많이 애썼습니다.

그렇게라도 보답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 *

줄리어스 외성의 상업지구.

신문 가판대의 점원이 뒤를 향해 물었다.


“이 신문들은 어떻게 해요? 계속 쌓아 둬요?”

“응?”

“왜 그 애 있잖아요. 늘 소식지 전부 종류별로 빠짐없이 가져가는……. 걔 가져가라고 남겨 둔 신문이요.”

“아.”

중견 점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게. 돈을 선불로 받은 데다가 걔 생각해서 남겨 뒀는데. 어째 요샌 받으러 오지 않네? 늘 매진인데도 일부러 챙겨 두었는데……. 한 달이 넘게 안 오는데 계속 쌓아 둘 수도 없고……. 무슨 일 있나?”

전술가 아서 특집이 맨 위에 실린 기사가 바람에 팔락였다.

【 ……그것은 전쟁이 몸에 익은 총사령관 아서의 습성이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전략을 검토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어떤 가능성도 죽이지 않았다. 실행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전술도 그는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즉시 실행이 가능하도록 준비했다. 그것이 그를 수많은 승리로 이끌었다. 전장의 여건과 군의 능력에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모르되, 가능한 상황이라면 그는 어떤 전술도 포기하지 않고……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