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그녀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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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그녀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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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그녀의 할머니
2022.11.17.
“레이디.”
렘브란트가 산책이라도 온 듯 가볍게 웃는 얼굴로 걸어오며 손을 위로 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렘브란트 경.”
레이나도 이제는 그를 보면 당황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인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음? 그림을 그리고 계셨나요?”
렘브란트가 관심을 보였다.
나무에 기대앉아 있는 레이나의 손 아래 있는 엽서에 설핏 풍경을 스케치한 듯한 연필 그림이 보였다.
“아……. 그냥 낙서예요. 소일거리 삼아서…….”
레이나는 민망한 듯 슬그머니 엽서를 손으로 덮어 그림을 감추었다.
렘브란트가 웃었다.
“모처럼 제 전문 분야인데 관심을 가질 기회를 주지 않으시네요.”
레이나가 웃으며 엽서를 가린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전문가시니까요. 보실 만한 게 못 돼요. 제건 정말 그냥 낙서 수준이거든요.”
레이나가 감추며 민망해하는 말을 듣고 렘브란트는 오히려 레이나의 그림이 궁금해졌다.
겸손의 말을 하며 보이기 부끄러워한다는 건 더 잘 그리고 싶어 한다는 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나름대로 정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니까.
레이나가 뭘 그리고 있던 건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 할머니가 안락의자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는 장면이 사뭇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렘브란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름답네요.”
“…….”
레이나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잠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던 렘브란트가 불쑥 제안했다.
“할머니 옆에 가 보실래요? 간단히 한 장 그려 드릴게요. 할머니랑 같이 있는 모습.”
“네?”
레이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그림을 받는 게 상당히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은 황실이나 클라인 공작가 밖으로 거의 반출되지 않기에 희귀했다.
그는 인물화를 자주 그리는 화가도 아니고 아무나 그려 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꽤 오래 그림을 중단했었다.
그런 렘브란트가 자기를 그려 준다는 걸 후작이 귀족들에게 얼마나 자랑삼았는지 레이나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렘브란트 경이 클라인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화가로서 그의 명성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이나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저랑 할머니를요?”
렘브란트가 살짝 소매를 걷으며 그녀의 손 아래를 눈짓했다.
“연필과 남는 종이를 빌려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요.”
레이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홀린 듯 그에게 빈 엽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엽서를 받는 순간 엽서를 쥔 손을 놓지 않고 힘을 꽉 주며 황급히 말했다.
“저, 저 돈 없는데요.”
그의 그림이 수천 골드를 호가한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간단한 연필 데생이어도 레이나가 감당할 수 있을 가격일 것 같지 않았다.
렘브란트가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30코퍼 없어요?”
“!!”
안 비싸다!
유화가 아니라 연필 데생이라서 싼 건가?!
“있어요!”
레이나는 얼른 주머니를 뒤져 그에게 동전 세 개를 내밀었다.
“…….”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렘브란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동전 세 개를 받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맛있는 거 사 먹을게요. 가서 앉아요.”
렘브란트는 손 안에서 연필을 굴리며 미소 지었다.
레이나는 다음 순간 렘브란트가 농담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30코퍼를 주고 소식지를 샀던 일로 장난을 친 거였다.
“……렘브란트 경. 평소에 연필 데생…… 그림값 얼마 받으세요?”
그가 웃었다.
“그림에 항상 돈을 받진 않아요. 하지만 차액이 있다면 모델료 드린 셈 치죠. 물론 모델료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거절하실 권리도 있어요.”
“…….”
얼굴이 붉어졌지만 레이나는 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에 붙은 풀 조각들을 털고 할머니 옆으로 가 빙글 돌아서 렘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간단한 데생이라도 30코퍼에 저명한 화가인 렘브란트의 그림을, 그것도 할머니와의 그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렘브란트는 빙그레 웃고는 시선으로 답하며 레이나가 있던 자리에 기대었다.
사실 그는 레이나에게 그녀의 부모님에 대해 물어 볼 생각이었다.
후작 저택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데 알고 있냐고.
하지만 할머니를 그리고 있는 레이나를 보니 그런 건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렘브란트는 엽서를 책으로 받치고 연필을 들었다.
* * *
레이나는 애써 안 그런 척하려고 하면서도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림을 받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듯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
레이나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본다는 듯한 얼굴로 렘브란트가 준 그림을 열중해 바라보았다.
눈이 그림 속에 빨려 들어갈 듯 깊어졌다.
표정에 감정이 정말로 솔직하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각을 잡고 오래 그리는 것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 적당한 선의 완성도에서 건네주었는데.
저런 표정으로 보다니.
렘브란트는 그녀에게 준 그림을 슬그머니 빼앗아서 좀 더 꼼꼼하게 다시 그려 주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림을 보여 주며 이런 기분을 느껴본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너무 멋있어요…….”
“…….”
그림에 대한 찬사에 이렇게 머쓱함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이었더라.
그는 화가였다. 그것도 꽤 인정받는.
당연히 그림으로 칭찬의 말을 들은 적은 많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귀족적이고, 품위 있고, 세련된 방식이었다.
저런 날것의 표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무 대단해요. 너무 멋있어요. 어떻게 순식간에 이렇게……. 정말 잘 그리시네요…….”
저토록 직설적인 칭찬의 말이라니.
렘브란트가 민망해하며 웃었다.
“좋아해 주니 내가 더 고맙네요. 정말 그림을 좋아하나 봐요? 아니면 할머니와 함께 있는 그림을 받아서 더 좋은 건가요?”
“둘 다요!”
레이나가 감동한 얼굴로 자기 가슴에 엽서를 가까이 댔다.
그림이 망가지지 않도록 완전히 대지는 않는 모습에서 그림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읽혔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평생 가보로 간직할게요.”
“…….”
농담이었다면 유쾌하게 받아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진담인 표정과 목소리여서 렘브란트는 정말 머쓱해졌다.
“……가보로 간직까지 하겠다니. 다음 기회에 좀 더 제대로 다시 그려 드려야겠네요.”
레이나는 고마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기회가 있으면요.”
하지만 진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 크게 감격해하지는 않은 채 그녀의 시선이 다시 손 안의 그림으로 향했다.
“…….”
레이나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
렘브란트가 묘하게 생각이 많아진 레이나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요?”
레이나가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네?”
“눈빛이 슬프네요.”
레이나는 멍하니 있다가 할머니를 다시 바라보고는, 힘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을까. 그런 걸 좀…… 요새 생각하게 돼서요.”
레이나는 근래 펄 공작 부인이 그녀에게 해 준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펄 공작 부인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 알면서도 그것을 차마 직시하지 못하던 레이나에게는 새삼스러운 슬픔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따로 조용한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하지만 레이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면, 넌 혼자 남은 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해.」
「너의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
「언제까지고 너의 곁에 있어 주시지 못해.」
“…….”
레이나는 머쓱한 듯 찡그리며 웃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소리를…….”
렘브란트가 물끄러미 할머니를 보다가 레이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레이나와 함께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렘브란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저한테 형이 있었어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
“형의 초상화를 제가 그렸어요. 형이 스물네 살 때였죠.”
레이나는 클라인 공작가의 장남이 7년 전쯤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떠올렸다.
렘브란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게 진짜 장례식 초상화로 쓰일 줄 알았으면 그렇게 형과 말다툼을 하며 그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렘브란트는 슬쩍 미간을 만지곤 조금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하며 미소 지었다.
“……다른 가족들에 대해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준비할 시간이 있었고. 투병하던 누이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했었죠. 전쟁에 종군한 아우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했었어요. 다행히 그쪽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
“하지만, 형의 죽음은 준비하지 못했어요. 형이 그렇게 갈 줄은 몰랐거든요. 형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많은 대화를 했는데…….”
“…….”
렘브란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게 마지막 시간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무의미하게 다투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천천히. 신중하게 시간을 보내고.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했을 텐데. 그게 형과의 마지막 시간이었는데.”
“…….”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
렘브란트가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런 말이 위로가 안 될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이 시간을 슬퍼하면서 보내기보단……. 의미 있는 시간으로 잘 보냈으면 좋겠어요. 후회하지 않게…….”
“…….”
렘브란트가 레이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이별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소중한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
레이나의 눈이 젖어 들고 있었기 때문에 렘브란트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레이나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흘리지 않은 채로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렘브란트가 웃어 주었다.
* * *
그 후 렘브란트는 레이나에게 그녀에게 관해 돌고 있는 저택 내 소문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당신의 소지품에서 특별한 반지가 나왔는데, 알고 있냐는 질문이었다.
레이나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아서에게 돌려주려다 거절당한 결혼반지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읽은 렘브란트는 심각해졌다.
……진짜 그 반지가 당신 것이었단 말이야?
“그 반지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레이나는 조금 창백해졌다.
“……네. 물론이죠. 하지만 저는……. 제가 그걸 일부러 그걸 숨겨서 가지고 있으려고 한 게 아니라요…….”
어렵게 입을 연 레이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입을 다물었다.
“…….”
렘브란트는 조금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심 둘이 혈육이라는 데에 충격을 받은 렘브란트가 최대한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럼, 당신의 친아버지가 정말로 줄리어스 후작인 겁니까……?”
눈을 한 번 깜박인 다음, 레이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네?”
“네?”
레이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했고, 렘브란트는 그녀가 줄리어스 일가의 인장 반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그 반지는 가짜인가?
흔들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꾸벅꾸벅 졸다가 뜨개질하던 털실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