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가지 마
(130/210)
130.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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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가지 마
2022.11.27.
아서가 웃었다.
“……작별 인사?”
그가 레이나의 머리 위를 팔로 짚은 채 고개를 내렸다.
아서가 그녀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나는 당신이 아내라고 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내 아내인 줄 알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
아서가 웃는 낯 그대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다른 사람한테 가겠다고 하면, 얌전히 보내주고 다른 여자한테 가면 되는 사람인가?”
“…….”
들었구나.
테일러한테 한 말.
들리길 바라고 한 말인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애써 주먹 쥔 손 안에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
제가 저질러 놓은 끔찍한 사고의 결과를 보는 기분이었다.
“…….”
아서는 단정하고 냉막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나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레이나는 지금부터 그에게 상처 입힐 일이 두렵고 가슴이 아파 떨리는 손을 꽉 틀어쥐었다.
매정하고 뻔뻔하게 굴 생각이었는데도 몸이 떨리면서 숨이 막혔다.
아파.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하지만 해야 했다.
레이나는 눈을 감았다.
“죄송해요.”
목소리는 침착하게 나왔다.
하지만 고여 있는 줄도 몰랐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레이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손으로 밀어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됐다.
레이나는 그저 별 의미도 없는 눈물이라는 듯이 손바닥으로 눈물을 쓸어내고 천천히 말했다.
“이렇게 마음 주실 줄 몰랐어요.”
레이나는 그를 피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저도 이제 평범하게 행복하고 싶어요.”
“…….”
계속 고개를 숙여 그를 외면한 채 레이나는 말을 이었다.
“아시잖아요. 테일러 같은 사람은 제 평생에 없을 거라는 거. 아마 제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겠죠.”
“…….”
아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레이나는 멈추지 않았다.
“놓치고 싶지 않아요.”
“…….”
레이나는 소리 없이 심호흡한 뒤, 표정을 산뜻하게 환기하고 웃었다.
눈매와 입가를 모두 끌어올려 최대한 밝게 만들었다.
약간 쓴웃음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뻔뻔하고도 미안한 얼굴로 보이기를 바랐다.
“함께 할머니를 돌봐줄 수 있고……. 많은 사람 책임질 필요 없이 저만 생각해 주는. 두렵고 마음 졸일 일 없는 사람이랑 그렇게…….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
“아마 저한테 마지막 기회일 거예요. 평범하게 좋은 남자를 만나서, 아이를 많이 낳고 평화로운 가족에 둘러싸여 조용히 늙어갈 수 있는…….”
“…….”
“테일러랑 계속 같이 있으니까 알겠더라구요. 제가 원한 게 그런 삶이었다는 거요.”
“…….”
레이나가 아서를 응시했다.
“저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아서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언제나 보는 표정 같았다.
하지만 처음 보는 표정 같기도 했다.
“…….”
레이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팔을 잡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눌렀다.
“…….”
그와 닿으니, 심장이 아프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나가 작게 말했다.
“잠깐 당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역시 저는 당신의 정부로 살고 싶지는 않아요.”
“…….”
레이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너무 대단한 사람이고, 정말 멋진 사람이지만, 저한테는 너무 벅차요. 애초에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었고요.”
“…….”
레이나는 약한 힘으로 그의 팔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저 한 번 안아주시고…… 인사해 주세요.”
“…….”
“그리고 우리 서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요.”
한동안 아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
레이나는 그런 형식적 작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서가 마지막으로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절당한다 해도 고개를 들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내가 혼자서 진정하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물러날 수 있을까.
“…….”
그러나 늦기 전에 그가 움직여 주었다.
아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고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 작게 속삭였다.
“오늘도 부인은 일방적이네.”
“…….”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약하게 웃고 말았다.
그의 가슴이 자신의 눈물로 젖고 있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말할 수가 없게 목이 메고 있었다.
“…….”
아서가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난 당신한테 정부가 돼 달란 소리는 한 적 없는데. 누가 그래?”
“…….”
“이 집안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나한테 정부를 들이게 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
순간적으로 작게 헛웃음이 나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 밖으로 내서 묻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에게 정부를 들이라 종용했을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
레이나는 조용히 그에게 안긴 채로 젖은 숨을 들이켰다.
“…….”
아서 경.
후작님이 내 아버지일까요?
사실 그 말을 듣고 난, 당신이 줬던 혼인 계약서를 봤어요.
혹시라도 당신 옆에 있을 수 있게 될까 봐.
만약 그분이 내 친부면…….
후작님은 정말 딸도 못 알아보는 나쁜 사람인데.
그분이 크리스티나 아가씨에게 재떨이나 던지는 아버지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도 그랬으면 했어요.
내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던 할머니의 말이 혹시 그런 뜻이었을까.
혹시 후작님이었던 걸까.
그분이 내 아버지였으면…….
“…….”
그때, 아서가 조용히 그녀의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정부가 아니면 어때?”
“…….”
레이나가 가만히 멈추었다.
아서가 레이나를 안은 채 물었다.
“부인으로라면, 재고의 여지가 있어?”
“…….”
레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흩어져 달아날까 두려운 것처럼 그는 레이나를 품에 꽉 안은 채 말했다.
“……나와의 일이 당신한테 혼인이 아니었던 걸 알아.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던 것도, 재회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도 알아.”
“…….”
“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당신에게 진짜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한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조금 위험하더라도.”
“…….”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일러 로렌슨이랑 같은 선에서. 당신, 나를 상대로 고려해 줄 수 있나.”
“…….”
침묵이 내려앉았다.
솨아아.
바람에 부서지는 나뭇잎 소리가 산란했다.
레이나는 그 모든 것에서 귀를 막고 싶어졌다.
“레이나 아스타린.”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 다시 없을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결코 닿을 수 없을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는 미래를 말하는 순간.
“나랑 다시 결혼해.”
제발, 듣고 싶지 않았다.
“평화롭게 조용히 늙어갈 수는 없겠지만……. 마음 졸일 일이 많겠지만.”
“…….”
“비록 당신이 바라는 조용한 평화는 아니겠지만. 내가 잘생겨서든……. 나한테 사기 결혼을 하러 온 게 미안해서든.”
“…….”
아서가 그녀를 안은 채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안타깝게 움켜쥐었다.
“……하다못해 당신이 아내인 줄 알고 당신한테 마음 준 내가 불쌍해서라도.”
“…….”
아서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애원했다.
“……당신이 위험을 무릅써 준다면. ……당신과 할머니를 최선을 다해 보호할게.”
“…….”
레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서가 꾹 눌러둔 말을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
“…….”
“……테일러 로렌슨한테 가지 마.”
“…….”
아서가 눈을 감고 속삭였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
레이나는 그의 품 안이 달콤하고 끔찍해서 눈을 감아 버렸다.
이대로 죽어도 좋으니 시간이 멈춰 버리길 바랐다.
당신이 어떻게 쌓아 온 5년인데.
이럴 순 없다.
나 같은 것 때문에 망치게 둘 수 없었다.
그의 지난 오 년을 속속들이 아는 레이나만은 그럴 수 없었다.
당신과 함께한 전우들은.
당신이 돌아와서 가장 먼저 만나러 갔던 유가족들은?
고작 사기 결혼으로 얽힌 나 같은 거 때문에 무너뜨리지 말아요, 제발.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달려 있는데.
그러나 시간은 멈추질 않았다.
레이나는 창에 부딪치는 나무가 저를 때려 모조리 닳아 없어지게 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이나는 끝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꾹 눌러 그를 밀어냈다.
“…….”
입을 열자, 한결 정제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법정에 나갈게요. 아서 경을 위해서 증언할게요.”
“…….”
레이나가 고개를 들고 어둠 속에서 그를 응시했다.
어둠에 익은 눈은 흐릿하게나마 레이나에게 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저…… 이만하면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지 않았나요? 줄리어스 후작님과 대화…… 아서 경을 다시는 우습게 보지 못하게. 이젠 만족스럽게 되셨잖아요. 이만하면 충분하시잖아요.”
레이나는 그를 망칠 용기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나를.
“…….”
레이나는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내렸다.
레이나가 조용히 스스로를 억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저한텐 꿈도 못 꿀 사람이었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착각했어요. 하지만 잠시 떨어져서 생각해 보니, 당신을 향한 건 그냥 유명인을 동경하는 마음이었고. 당신은 현실적으로 절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없으세요.”
“…….”
레이나가 잠시 후 고개를 들고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한테 지은 죄라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지만, 저한테도 그 밤은 상처로 남았어요.”
“…….”
닿아 있는 그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서가 천천히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레이나는 그를 외면했다.
“과분하게 마음 주시고 절 각별하게 생각해 주신 거……. 알아요. 평생 영광으로 생각할 거예요.”
“…….”
레이나는 힘겹게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사랑할 사람, 저를 치유해 줄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이젠 알았어요. 더 늦기 전에……. 그 사람한테 가고 싶어요.”
“…….”
잔잔하게 가라앉은 아서의 눈에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 담겨 있었다.
레이나가 시선을 내리고 숨을 고르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저 테일러랑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
내가 끝을 내야 했다.
“저희 여기까지만 해요.”
“…….”
이게 맞아.
이게…….
제발…….
이 사람하고 미래를 그릴 생각하지 마.
평생 그를 후회하게 만들지 마.
아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레이나는 마지막 말과 함께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그만 보내 주세요.”
그는 그냥 묵묵히 레이나 앞에 서 있었다.
다만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뚫어져라 레이나를 보았다.
“…….”
그는 그러나 끝내 다시 레이나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손을 움켜쥐며 물러섰다.
“…….”
그 표정에 떠오른 참담한 침묵이 레이나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 * *
나한테 진심이었던 적이 없어?
당신한테는 내 옆에 있던 시간이 내내, 마지못해 머물렀던 시간이었을 뿐이었어?
……당신은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한 적이 없어?
* * *
숨 쉬는 것마저 아플 때까지, 한참을 주저앉아 울다가 일어난 레이나는 새벽빛 속에서 멍하니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다.
테일러가 오면 달려가서…….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달라고.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
그러다 레이나는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노트를 보고 멈칫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의 몸에 가려져 있어, 레이나는 보지 못했던 곳.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조명이 그곳에 작은 빛을 비추고 있었다.
레이나는 굳은 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그림을 그리던 자리였다.
그곳에는 새로 기름을 채워 둔 등잔불이 채 꺼지지 않고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레이나의 눈이 흔들렸다.
“…….”
방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서는 내내 이 방에 있었다.
저걸…….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등잔불 앞에, 아서를 그린 페이지로 가득한 그녀의 노트가 펼쳐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