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각자의 입장
(134/210)
134. 각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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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각자의 입장
2022.12.11.
항변할 틈은 없었다.
할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그거 가지고 썩 사라져!”
할머니가 매섭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내 아가 눈에 눈물 내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
아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지도 못했지만 할머니의 머릿속에선 이미 결론이 난 듯했다.
아서는 손녀를 현혹하려 드는 나쁜 귀족 놈.
반지는 개수작과 연관된 나쁜 물건.
“…….”
그러면서도 그것이 귀한 물건이라고는 생각하는지, 할머니는 아서가 그것을 노리고 접근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서는 묵묵히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집어 들고는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님, 하지만 이건…….”
찰싹!
할머니는 아서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반지를 쥔 아서의 손을 쳐냈다.
그러나 손이 밀쳐졌을 뿐 아서는 반지를 놓치지 않았다.
할머니는 천하의 원수를 보는 듯이 식식 숨을 몰아쉬며 아서를 노려보았다.
“…….”
노파의 손은 단련된 무인인 아서의 손에 물리적인 아픔을 남기지 못했다.
아서는 오히려 할머니의 손이 걱정되어 시선을 내리깔고 할머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
혼인했다는 말을 괜히 했다.
차라리 잊어 주시면 좋으련만.
‘줄리어스’라는 이름이 문제인지.
혼인했다는 말이 문제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아서는 세 번이나 할머니를 찾아왔지만,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잊지도 않고 화를 내며 아서를 내쳤다.
“나가!”
“…….”
자주 잊으신다더니 왜 나는 잊어 주시질 않는지 알 수가 없다.
반지를 쥔 손을 뒤로 물리고 한 걸음 물러선 아서는 침착하고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낮추어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할머님. 하지만 이건, 50년이나 간직하신 할머님의―.”
“간직 같은 소리!”
할머니가 눈을 부라리며 노기를 드러냈다.
“그딴 반지, 나한텐 아무 의미도 없다! 써억 가지고 꺼지지 못해!?”
격한 소리를 연거푸 낸 할머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노기와 흥분을 쏟아내는 할머니의 힘이 소진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할머님.”
“내 아가한테 반지 따위 내밀면서 개수작하기만 해!”
“…….”
반지 내밀면서 상처 준 것도 그 여자입니다…….
하지만 어떤 해명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를 흥분하게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
·
·
“…….”
쓰레기 같은 반지 내다 버리라면서도, 할머니가 평생을 간직해 온 물건임을 알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반지가 사라진 것을 아시면 마음이 바뀌실지도 모른다.
“…….”
할머니의 형형한 눈빛을 떠올리며 아서는 씁쓸하게 웃었다.
반지를 내던지고 화를 내면서도, 할머니는 그것을 감추어 두고 손녀를 애지중지 키우셨다.
그런 마음이실 것이다.
언젠가 급하게 돈이 필요해졌을 때를 위해 남겨두셨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언젠가 그분의 딸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며 물려주려 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랬다면 언젠가 그 반지가 그녀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
하지만 할머님.
그 여자는 저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그 저택에서 상한 생선을 먹었고, 두 번이나 겁에 질린 채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마에는 뭐에 맞은 상처가 있었어요.
딱히 축제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아쉽지도 않은 건지, 축제는 즐긴 적도 없이 자발적으로 남아 일만 했답니다.
할머님이 허락한 1할이나 2할의 그녀를 위한 즐거움이 있기는 했을는지.
……제가 그런 환경에서 자란 놈이라.
이런 게 필요하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아서는 물끄러미 읽을 수도 없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녀가 가질 수도 있었을 어떤 권리에 대하여 다투기 위한 문서들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
아서는 조용히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는 연기가 퍼져나가는 어두운 방 안에 앉은 채 눈앞의 보고서들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읽을 수 없지만, 보이는 것처럼 만들기 위해 그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보고서들이 매일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케이가 설립할 참전 용사 재단에 대한 서류들과 혼인 계약서에 대한 자문 서류들.
상이군인 재단. 유족 연금 재단.
문제 없는 사람이라면 일상적으로 확인했을 여러 가지 소식지들.
“…….”
아서는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추기 위해 매일 방에 조명을 밝히고 있었지만.
근래는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보이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불을 밝히는 일도.
무의미한 노동력이 들어가는 서류를 만들어 받는 일도.
계속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전부 의미 없는 짓들로 느껴졌다.
아서는 묵묵히 어두운 방 안에서 시가를 태우며 눈의 통증을 견뎠다.
피로하고. 피로하고. 피로했다.
똑똑.
“각하.”
“들어와.”
케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함께 들어온 트리스탄이 어두운 방 안에 불을 밝혔다.
아서가 익숙한 피 냄새를 느끼고 물었다.
“오늘은 몇 명이야.”
“세 명입니다.”
“…….”
집무실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서가 마지막으로 시가를 한 번 빨아들인 뒤 재떨이에 눌러 끄고 몸을 일으켰다.
“네 명으로 정정해.”
그리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가 커튼을 걷고는 방구석에 죽어 있는 자객을 보여주었다.
* * *
“여기까지 들어오도록 허용해서 죄송합니다.”
“됐어. 어차피 이게 업인 놈들은 못 막아.”
아서가 덤덤히 말하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심문은?”
“실패했습니다. 전부 자결했고 살리지 못했습니다.”
아서는 혀조차 차지 않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예상한 일이었다.
마리아 황후인가.
아니면 적국 놈들.
자결은 배후를 숨겨야 하는 암살자의 미덕이었으며, 적국 놈들의 문화이기도 했다.
레이나를 내보낸 후 아서의 근처에 나타나기 시작한 암살자들은 개선식을 알리는 황실의 전령이 도착한 후 신호탄이 오른 것처럼 그 빈도와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마리아 황후의 자객인 척 적국의 암살 시도가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었고, 적국의 암살 시도인 척 마리아 황후가 자객을 보내기 시작한 거라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쪽 모두 부인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마리아 황후는, ‘인망 높은’ 마리아 황후고.
적국은 전쟁 배상금 지불 이행의 보증으로 황태자 편에서 데려간 왕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으니까.
암살자를 보냈느냐고 추궁해봤자 서로 적국에서 보낸 것 아니냐, 당신의 정적이 보낸 것 아니냐며 상대방의 핑계를 대고 발뺌할 것이다.
이래서 적이 많은 것은 좋지 않았다.
“저택 안에서 목격자는 없나?”
“네.”
아서가 트리스탄을 바라보며 왼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소매 깃을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트리스탄이 제 소매에 묻은 피를 뒤늦게 알아채고 손수건을 꺼내 닦았다.
‘가만. 어떻게 보신 거지. 아. 온도를 통해서 볼 수도 있다고 하셨나?’
뒤늦게 멈칫하고 생각하지만.
대체 저런 아서가 눈이 멀었다고 어떻게 눈치챈단 말인가.
그들은 아서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함구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들이 작위를 받아야 하는 개선식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마리아 황후와 신경전이 있는 뉘앙스를 주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레이디.”
곤란해하며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오넬이었다.
탁.
막아서는 그를 밀쳐내는 여자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내 남편이 결백하다면 막아설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가 막고 있는 ‘레이디’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벌컥.
아서의 침실 문을 예고 없이 벌컥 열며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남편의 불륜 현장을 급습하는 본처처럼 들이닥쳤다.
그리고 기사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는 자객의 시체를 발견했다.
“……오.”
크리스티나는 조금 놀란 눈을 하고, 바닥에 있는 자객의 시체에 한동안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눈을 들어 올려 아서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
아서가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덤덤히 말했다.
“대체로 세 분 가족께서 비슷한 습성이 있으시군요.”
“…….”
그녀가 어머니, 아버지에 뒤이어 허락 없이 방에 들이닥친 것을 비꼰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서를 보며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실례했어요.”
무언가 약점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들이닥친 모양인데.
이런 모습을 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듯했다.
아서가 몸을 일으켜 응접실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가시죠. 이제 수도로 떠나야 하니 슬슬 이것에 대해 레이디에게도 말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
아서가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향한 곳을 느끼고 무감하게 미소 지었다.
“레이디께서 보실 만한 것은 아니지요. 금방 치우겠습니다.”
* * *
둘은 마주 보고 앉아 차 대신 시가를 들었다.
짧은 침묵을 깨며 크리스티나가 먼저 물었다.
“……자객인가요? 설마 마리아 황후의?”
「마리아 황후의 견제가 시작되면 아서에게 줄리어스의 비호가 필요하리라.」
어머니도 하녀장도 말했고, 그녀 역시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라고 생각했지 당장 자객의 시신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서가 담담하게 담배 연기를 내쉬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증거를 잡지 못한 상태라서요. 적국에서 보낸 것일 수 있으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적국이요? 공주와 왕자가 인질로 잡혀 있는데 당신에게 자객을 보낸다고요?”
“그럴 수 있지요. 레이디께서 방금 생각하신 것처럼 마리아 황후 짓이라고 생각하게 하면 되니까요.”
크리스티나는 아서의 태도가 지나치게 태연한 것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자객이 든 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요?”
“네.”
아서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자세히 말해 주세요. 내 저택에 자객이 들었는데 나는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아서가 미소 지었다.
“써 보기만 하셨지 당해 보신 건 처음인가 보군요. 당황하시는 걸 보니.”
크리스티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죠?”
아서가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담배를 빨며 물었다.
“해결사 길드에서 레이디를 중요한 고객으로 모시던데요. 뭘 의뢰하셨습니까?”
크리스티나가 냉소했다.
“증거도 없이 아내를 이렇게 몰아가네요? 신중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아서가 웃었다.
“없을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