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크리스티나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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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크리스티나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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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크리스티나의 방식
2022.12.15.
크리스티나가 꼬아 올린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웃었다.
“글쎄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아닐는지.”
톡톡,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며, 크리스티나의 말이 이어졌다.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해도 모르는 척해 주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내잖아요.”
아서가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당신은 아직 제 아내가 아닙니다. 바로잡는 건 당신 몫이고.”
“…….”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며 시가를 들고 웃었다.
“아서 경. 제가 섭섭하게 해 드렸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내내 숙여 드리고 있지만,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슬슬 저도 기분이 상하는데…….”
크리스티나의 눈이 휘어졌다.
“우리끼리라도 그만 앙금을 풀고 잘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저택에 당신을 노리는 자객까지 들고 있는 상황인데다, 배후가 마리아 황후일 수 있다면 더더욱요.”
아서는 덤덤한 표정으로 시가를 몸쪽으로 당겨 들며 뒤로 몸을 기댔다.
“자객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리겠는데, 제 사람들에게 장난치지 마십시오. 저와 잘 지내고 싶으시다면 더더욱.”
크리스티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장난을 친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아서가 크리스티나를 보고 있다가 협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크리스티나가 아서의 눈길을 따라 협탁을 바라보았다.
“…….”
크리스티나의 선행으로 곤경을 벗어난 유족의 이야기가 실린 기사가 그 위에 놓여 있었다.
【 유족 인정 불가 통지, 힘겹게 생계 잇던 와중 화재까지…… 잿더미 속 극단적 선택하려던 참전 용사 유족 절망 막은 레이디 크리스티나 】
아하.
그가 뭘 경고하는 건지 눈치챘지만, 크리스티나는 알아들은 척하지 않은 채 거기에 시선을 두고 태연자약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 인사라도 해 주시려고요?”
아서가 감정 없는 눈으로 말했다.
“제게 스캔들이 좋지 않다는 건 사실이지만, 고작 남들에게 문제없는 혼인을 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도를 넘는 사람을 참아내고 결혼하진 않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차갑게 웃고는 사근사근한 투로 말했다.
“모처럼 신경 써 선행을 하고도 이런 말을 듣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뭐…….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에 의견이 다를 수 있겠죠. 좋아요. 맞춰 가 봐요, 우리.”
그리고 자객과 마리아 황후, 개선식에 맞추어 수도로 향하는 일정에 대한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 * *
아서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크리스티나의 얼굴에서 사근사근 협조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차가운 얼굴로 몸을 돌린 크리스티나는 속으로 냉소했다.
충성스러운 아랫사람을 얻는 게 쉬운 줄 아나?
그러니까 전쟁터라는 편한 환경에서 아랫사람들을 휘어잡는 데에 몇 년이나 걸렸지.
크리스티나는 하녀장 허스트 부인을 불러 우선 아서가 경고한 내용에 대한 명령을 모두 그만두도록 지시했다.
이쯤이야.
심기 불편하시다면 맞춰 주지 못할 것도 없다.
허스트 부인이 물었다.
“그럼 신문사에 이미 넘어가 나오기로 한 기사들도 중단시킬까요?”
기껏 작업해 놓았는데 그건 아쉬웠다.
“불운한 사건이 있었던 걸 강조하지 않는 방향으로 적당히 수정시켜.”
“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저택 안에서 자객을 쓰는 지시를 모두 철회했다.
“하녀들을 외진 곳에서 습격당하게 해서 기사들이 구할 기회를 주라는 의뢰도 전부 철회할까요?”
크리스티나는 선선히 옷을 벗으며 대답했다.
“응. 그리고 뒷이야기 안 나오게 잘 정리해 줘. 아서 경에게 이야기 새 나간 걸 보니 무능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것 같으니.”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평소처럼 하녀들과 기사들의 동향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기사들과 하녀들 사이에 슬슬 그녀가 의도한 교류가 생기고 있었다.
쌓이면 아서가 그녀를 무시하기 어려운 흐름이 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크리스티나가 기다리는 큰 건수는 잡히지 않고 있었다.
* * *
케이는 기사들을 불러들여 논의했다.
“각하와 개선군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흠 없는 사람으로 잡히고 있습니다. 이건 위험해요. 아서 경 한 사람도 아니고 기사들 모두를 아서 경 영웅담의 일부처럼 추앙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섭니다.”
루칸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리오넬이 설명했다.
“기사들 중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사고를 치는 사람이 있으면 각하께서 크게 뒤집어쓸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일 줄 몰랐다느니, 기사들이 하는 걸 보니 아서 경도 알만하다느니. 이래서 사생아는 안된다느니.”
루칸이 울컥했다.
“아니 뭐요? 각하가 사생아인 거랑 그런 게 무슨 상관인데? 수백 명이 모여 있는데 사고 안 나는 데가 어딨어요? 교황청 수녀원에서도 그만한 인원이 있으면 사고가 나겠다!”
리오넬이 침착하게 보충했다.
“최소한 작위 수여식이 있을 때까지는 각하에게 상을 내리며 ‘황제의 아들’이라 칭하는 걸 황실이 부담 느낄 정도의 사건이 터지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황후는 건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거야 우리가 어떻게 대비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 터지면 잘 수습하며 갈 수밖에…….”
“그렇죠. 하지만 개선식 전에는 정말로 조심해야 하니 기사들 이해시키고 한동안 저택 벗어나지 않도록 단속해 주세요. 재단 설립도, 작위 수여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트집잡힐 만한 일이 벌어지면 안 됩니다. 일단 다녀오기 전까지는 더 단속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리오넬 경, 루칸 경.”
“네.”
“두 분께선 특히 조심하세요. 눈앞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아가씨, 드레스에 와인을 엎는 레이디, 에스코트를 청하는 레이디를 특히 조심하세요.”
“…….”
리오넬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만 루칸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케이가 답했다.
“당신은 지금 아서 경 최측근 기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추문으로 엮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만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세요. 연애 문제가 아니라 군법 문제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 * *
자신을 통제할 후작과 후작 부인이 사라지자 내실의 유일한 주인이 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집안의 안주인처럼 저택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크리스티나는 하녀들에게 휴가와 상여금을 주고 황실 하녀들처럼 2인실을 마련해 주는 등 하녀들에게 사뭇 친절하게 대해 주기 시작했다.
황실 하녀들이 들어오며 기존 줄리어스 하녀들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후작 부부가 떠난 후로는 아가씨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확연히 없어졌기 때문일까.
아서 경이 돌아온 후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확실히 변한 것은 분명했다.
후작님과 갈등 때문에 아가씨도 괴로웠던 거지, 사실은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인식이 젊은 하녀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신중한 하녀들은 판단을 쉽게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하기에 몸과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아가씨는 딴 사람처럼 하녀들에게 퍽 너그러워졌다.
심지어 아서 경을 맞이하느라 수고했다며 모든 하녀들에게 번갈아 가며 일주일에 삼사일씩은 쉴 수 있도록 넉넉한 정기 휴일을 주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보안상의 문제 때문이라며 저택을 나가 집에 돌아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지만, 하녀들에게 따라붙을 기자들 때문일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하녀들은 저택 안에서 쉬는 휴가도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더욱이 크리스티나는 휴가를 맞은 하녀들에게 와인 저장고를 오픈해 공식적으로 휴일에 술까지 마실 수 있게 해 주었다.
너희만 아서의 개선 축제를 즐기지 못했으니, 늦었지만 저택 안에서라도 즐기라는 뜻이라 했다.
갑작스럽게 후해진 복지에 하녀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은 좋아했다.
그리고 저택을 지키는 마님이 있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 일어났다.
* * *
침대에서 알몸으로 깨어난 검은 머리의 하녀는 얼굴이 새파래져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
지난밤을 함께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름도 모르는 얼굴만 아는 사람.
저택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던 기사였다.
“……!”
남자가 깰까 봐 입을 막고선 마리나는 숨을 삼켰다.
술. 술이 웬수였다.
저는 테일러 생각을 하며, 그는 아마도 다른 여자의 생각을 하며 그도, 저도 술을 마셨고.
술김에 좋아하지만 포기해야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가 좀 테일러랑 닮은 갈색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눈썹을 만져 보았던 것 같다…….
결과는 이 꼴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허겁지겁 널브러진 옷을 챙겨 입으며 마리나는 스스로를 욕했다.
내가 다시 술을 입에 대면 개다, 개!
까치발을 하고 나가기 직전 마리나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렇게 침대에 홀로 남아 잠들어 있는 남자를 한 번 바라보고.
“…….”
마리나는 달아나듯 방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휴게실에서 뛰쳐나와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며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본 마리나는 더욱 울상이 되었다.
‘검붉은 물…….’
검붉은 물을 구해야 했다.
‘어떡하지……? 어떡해…….’
로렌슨 선생님은 장기 출장 중이었다.
죽어도 테일러에게는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 * *
마리나는 입이 무겁고 친한 하녀들에게 ‘아는 동생’ 핑계를 대며 저 대신 검붉은 물을 구해다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리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가씨의 호출을 받았다.
* * *
“검붉은 물을 구하고 있다고?”
크리스티나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던 마리나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 아가씨!”
어떻게 알았지? 설마 하녀들이?
마리나는 감히 아는 동생 핑계를 대지도 못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크리스티나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마리나는 땅에 거의 이마를 대며 빌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용서해 주세요. 살려 주세요.”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무슨 말이니. 어서 일어나렴. 몸에 좋지 않겠다.”
“……예?”
크리스티나가 마리나를 턱짓했고, 하녀장 허스트 부인이 마리나를 일으켰다.
얼떨결에 일으켜진 마리나가 어안이 벙벙해 하녀장을 보고 크리스티나를 보고 창문과 방구석을 보고 하며 두리번거렸다.
“아이 아빠는 누구니?”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마리나는 기겁했다.
“아, 아가씨! 아, 아이 아빠라니요! 저, 저는 아이를 갖지 않았어요!”
“응?”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내 하녀가 ‘아이 떼는 검붉은 물’을 찾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