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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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직면
2022.12.22.
“저 애가, 저 애가 왜 여기에 있어! 저 애 후작 저택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후작가에서 알아?!”
앨빈 로렌슨의 목소리에 믿을 수 없는 노기가 서렸다.
“누구니! 후작 부인이나 하녀장이 너한테 시켰니? 저 애를 너한테 책임지래?!”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
레이나는 초조하게 약 창고의 문 안쪽에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테일러가 레이나를 약 창고에 들여보내며 할머니 드릴 약재를 찾고 있으라 했지만, 레이나는 문 앞에서 곧바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너, 너 이……! 너 이 미친 녀석! 저 애 빼돌린 거 네 짓이니?!”
손이 떨렸다.
테일러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후작가에선 모르는 일이라고 로렌슨 선생님에게 목소리를 낮춰 달라는 말을 한 것 같다.
어후, 어으. 허. 어유!
탄식과 끓는 소리에 이어 퍽 퍽 소리가 들렸다.
그 온화한 앨빈 로렌슨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슴을 치는 소리였다.
“너, 너 몰라? 너 저 애가 거기서 뭘 했는지, 너, 네 손으로 저 애한테 그 약을 갖다줬으면서!”
“…….”
레이나는 꾹 입술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다.
내가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하지만 자상하고 좋은 사람인 로렌슨 선생님의 반응을 직접 마주하자 그제야 정말로 확 실감이 났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상대인지…….
애끓는 로렌슨 선생님의 목소리에 레이나는 그냥 이 자리에서 부서지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싶어졌다.
“…….”
레이나는 머릿속으로 테일러를 잘 설득해 좋은 사람에게 떠나보내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애써 심호흡한 뒤 억지로 문에서 몸을 일으켰다.
“…….”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일단은 할머니의 약을 찾는 게 급했다.
레이나는 발을 움직였다.
로렌슨의 약 창고는 레이나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기에 구조를 알고 있었다.
레이나는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약 창고의 안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끼익― 턱.
“?”
약방의 문을 미는데 안에서 뭔가가 걸렸다.
레이나는 무심결에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가 숨을 멈추었다.
‘사람?’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바닥에 앉은 채 문에 기대어 있었다.
“!”
아래로 떨구고 있는 그의 뒷목에, 산 사람의 몸에는 있어선 안 되는 뭔가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
얼굴이 새파래진 레이나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
두려움으로 벌벌 떨리던 레이나의 몸이 굳어졌다.
익숙한 손이었다.
“조용히.”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번에 레이나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소리 지르면 당신이 여기 있는 걸 들킬 수 있어.”
“…….”
그의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레이나를 진정시켰다.
“그럼 좀 곤란해질 수 있으니.”
“…….”
“놀랐겠지만, 안전하니까 걱정 말고.”
“…….”
“보지 말고 물러나요.”
“…….”
끼익.
탁.
레이나가 뒷걸음치며, 문이 닫혔다.
* * *
옆 방으로 자리를 옮긴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레이나의 몸이 충격으로 떨렸다.
‘안전하다는 건, 죽었다는 뜻인가요?’
묻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서 경이 죽인 걸까?
대체 저 시체는 뭔지, 개선식 준비에 정신없이 바빠야 할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죽은 사람은 나쁜 사람인지.
당신은 사정을 아는지.
우리는 달아나지 않아도 되는지.
옆에 시체가 있는데 안전하다는 건 무슨 말인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갑작스럽게 목에 칼을 맞은 사람을 본 심리적 충격은 레이나를 침착해지기 어렵게 만들었다.
치익.
성냥을 긋는 소리가 나고 방 안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
담배에 불을 붙이는 아서의 얼굴이 흔들리는 불빛 아래 드러났다.
아서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뒤이어 촛대에도 불을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생각되며 레이나의 마음속엔 순간 이상한 기분이 스쳤다.
꿈속의 한 장면이 그 위로 겹쳐졌다.
그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편지를 읽는 장면이었다.
“…….”
“왜 여기 있어?”
아서가 먼저 말을 걸었을 때 레이나는 흠칫했다.
아서는 레이나를 보지 않고 옆에 있는 도기를 끌어다 담뱃재를 떨며 조용히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묻고 있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졌기에 그와의 대화를 피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할머니가 아픈데. 약이 떨어져서요.”
아서가 물끄러미 레이나를 보았다.
“테일러 로렌슨은 뭘 하고.”
“…….”
레이나가 한 템포를 쉬고 말했다.
“테일러가 모르는 약이라서…….”
“…….”
아서는 살짝 웃으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묵묵히 담배를 입가에 가져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서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약인데.”
약서랍들이 붙어 있는 벽 쪽으로 가는 것이, 제가 직접 약을 찾아다 주려는 것 같았다.
“…….”
레이나는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가 터지듯 말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
레이나가 숨을 몰아쉬고 그를 보며 물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 뭐예요? 자객인가요? 죽은 거예요?”
“…….”
덜컹.
현관 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나.”
테일러의 목소리였다.
당황한 레이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가 여기 있는 걸 로렌슨 선생님이 봐도 될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서는 조용히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
테일러는 몰라도, 로렌슨 선생님에겐 아직 안 돼.
레이나는 허둥지둥하면서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가장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응. 테일러.”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어? 아버지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응. 괜찮아. 여기 있을게.”
레이나는 시선을 돌려 저쪽 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로렌슨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앨빈 로렌슨은 나무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이곳을 보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 사람 보내서 기사분들 이쪽으로 오시라고, 너 지켜 달라고 할게.”
“아냐. 그러지 마.”
레이나의 시선이 다시 테일러 쪽으로 향했다.
“기사분들이 이상하게 움직이면 눈에 띌 거야.”
레이나는 짧게 망설이다가 테일러에게 작게 말했다.
“……안에 그 사람이 와 있어.”
테일러는 그가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놀라지는 않았다.
“…….”
레이나는 좀 더 길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도 잘 파악하지 못한 이야기를 섣불리 꺼내 테일러를 걱정시키거나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레이나는 그저 침착하게 테일러를 보며 대답했다.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레이나는 굳은 얼굴로 테일러를 마주 보며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잘 나누고 와.”
테일러는 잠시 그녀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알았어. 그 사람에게 보호해 달라고 해. 약을 찾거든 할머니한테 가 있어.”
* * *
레이나는 등 뒤로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에게 보호해 달라고 하라는 테일러의 말이 가슴에 무겁게 걸렸다.
아서가 방에서 나와 있었다.
“…….”
레이나가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
아서는 왠지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팔짱을 끼고 문설주에 기대어 답했다.
“괜찮아.”
그는 어떻게 보면 여유롭고 나른하게 보였고, 어떻게 보면 다소 피곤하고 어둡게 보였다.
“몸싸움…… 뭐 그런 거. 하지 않으신 거예요?”
아서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가볍게. 다치지는 않았어.”
“…….”
어디서 가볍게 운동이라도 하고 온 사람 같은 대답이었다.
역시 그가 처리한 거구나.
사람을 죽인 걸 저렇게 표현한다는 것에 레이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레이나는 심호흡했다.
그가 전쟁 영웅인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마주하고, 사람을 죽여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건 그의 의무였고, 그가 살아남은 방법이었다.
레이나는 아서가 두렵지 않았다.
새삼 그걸로 두려워하기엔 레이나는 아서를 너무 잘 알았다.
레이나가 분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객이 누굴 노린 건가요?”
“…….”
“아서 경을 노린 건가요?”
그렇다면 마리아 황후일 수 있다.
레이나는 빠르게 머릿속으로 그에게 자객을 보낼 가능성이 있는 다른 사람들이나 세력들을 생각했다.
아서는 전쟁으로 사람을 죽인 총사령관이다.
사실 그는 누구의 원한을 샀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적국에서 보낸 해결사이거나, 후작님쪽 의뢰일 가능성도 있었다.
쉽지 않겠지만, 아서는 자객을 좀 더 확실하게 조사해서 증거를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서는 문설주에 기대어 조용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
아서가 대답하지 않자 레이나가 말을 이어갔다.
“아서 경에게 자객이 있는 건…… 놀라긴 했지만 이상하지 않긴 하네요. ……하지만 아서 경을 노렸다면 자객이 여기에 있다는 건 이상해서요.”
“…….”
여긴 로렌슨 선생님의 약방이다.
자객이, 로렌슨 선생님이나 테일러를 노릴 이유가 있나?
의사라면 겁주고 협박해서 아서 경에게 독을 처방하거나 하는 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좀 더 쉬운 해명이 있다.
“……혹시 자객이 노린 게, 전가요?”
“…….”
레이나가 아서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저를 지켜주신 거예요?”
아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대답은 듣지 못하고 처리해서. 글쎄.”
그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약을 찾지. 당신 할머니 건강에 대한 건 내가 책임지기로 했으니까.”
“…….”
그리고 그는 약재가 있는 가장 큰 안쪽 끝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 삐걱.
아서가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
레이나는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을 직감했다.
발밑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레이나가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 그 자객 보여 주세요.”
“…….”
아서가 돌아보며 눈을 찌푸렸다.
“……뭐?”
“…….”
솔직히 무서웠다.
레이나는 죽은 사람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떨면서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전하다고 하셨잖아요. ……죽었으니까.”
그리고 레이나는 아서의 허락을 기다리는 대신, 그의 눈빛을 외면하고 몇 걸음 걸어가서 그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레이나가 문을 밀었다.
아서가 단숨에 성큼 걸어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눌렀다.
아서가 그녀의 손을 막은 채 레이나를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당신이 왜 그런 걸 봐? 내가 당신을 왜 내보냈는데.”
“…….”
레이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정말 나를 보고 있나요?
레이나는 아서의 시선과 눈을 맞추었다.
“혹시 제가 알아야 하는 일이면, 저는 피하지 않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