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땐. (141/210)


#141.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땐.
2023.01.05.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모자를 눌러 쓰고 어깨에 걸친 털외투의 목깃을 여미며 산언덕의 바위 위에 기대어 앉았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숨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레이나는 차가운 손에 입김을 불며 절벽 아래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나무 사이로 개선식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사제의 자격으로 그들이 출발하는 자리에 참석한 펄 공작 부인과 대주교가 황금 수레 앞에 선 아서와 크리스티나, 기사들을 축복했다.

* * *



“피가 튀어 더러워졌네요.”

아서의 검 그립에는 여전히 흰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아서가 무심히 답했다.


“검에 묶으면 그리되는 법이죠.”

크리스티나는 옅게 웃을 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곁에 앉힌 검은 머리의 시녀를 아서에게 소개해 주었다.


“아시죠? 그 애한테도 몇 번 보냈으니. 마리나예요. 그 애가 떠난 지금은 제가 가장 아끼는 시녀입니다. 솜씨가 아주 좋아요.”

“…….”

검은 원피스에 흰 앞치마를 두른 하녀들 특유의 복장이 아닌, 시녀들이 일반적으로 입는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이 된 마리나가 긴장한 상태로 아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트리스탄 경의 부관인 볼튼 경의 연인이에요. 둘이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나요?”

 

* * *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황금 마차에 태운 것은 단 두 사람, 하녀장 허스트 부인과 마리나뿐이었다.

따로 다른 마차에 나누어 탄 하녀들이 시샘하며 마리나를 흉보았다.


“걔는 테일러 좋아한다고 몇 년을 그러더니. 어쩜 기사님 하나 낚아서는 바로 갈아타네? 요령도 좋아.”

“영악하지. 제일 나은 남자만 쏙쏙 골라서. 실속 있잖아. 한 번은 실패했지만 한 번은 성공했네. 어쨌든 신분 상승은 제대로 했어.”

다른 하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얘, 말조심해. 걔 크리스티나 아가씨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잖아. 걔가 차기 하녀장이 될지도 모른다고.”

30여 년을 바뀌지 않았던 하녀장 허스트 부인 밑에서 평생 일한 하녀들이 깜짝 놀라 입을 가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반문했다.


“하녀장?! 그런 말이 있었어? 마리나가?”

“딱 보면 모르겠어? 걔 메이크업 기술이랑 드레스 고르는 법도 허스트 부인한테 직접 전수받았잖아. 지금이야 시녀 일은 은퇴하셨지만, 젊었을 땐 허스트 부인도 후작 대부인의 시녀로 한 시대를 주름잡은 사람이래! 마리나가 그런 허스트 부인의 수제자라구!”

“와……. 하긴 걔만큼 크리스티나 아가씨한테 많이 불려간 애도 드물지? 허스트 부인도 나이가 있으니 은퇴하실 때가 됐고…….”

놀란 하녀가 더욱 목소릴 낮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젊은 나이에 하녀장을 맡는다구? 마리나는 준귀족 신분도 없잖아!”

“남자가 갖고 있잖아. 몰라? ‘내가 다 가지고 있으니 상관없다!’”

하녀들이 풋 웃음을 터뜨리며 큼큼 목소리를 낮추었다.


“세상에……. 그럼 걔가 앞으로 허스트 부인처럼 30년 해 먹는 거야?”

“그보다 훨씬 젊으니 50년도 해 먹겠지.”

“와. 하여간 요령 좋아……. 부럽네. 당연히 저택 안에서 연애하면 마님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아가씨가 그렇게 밀어주실 줄 누가 알았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휴게실이나 뻔질나게 드나들며 기사님이나 하나 잡아 볼걸…….”

“으이그.”

“앞으로 열심히 해보든가. 아무튼 이제 마님이 아니라 아가씨 쪽이 대세야. 마리나한테도 잘 보여야 해. 걔가 조만간 우리 봉급을 결정하게 될지 누가 아니?”

“말 잘못 했다간 부엌방 신세로 떨어지는 건가?”

“그러고도 남지. 으으…….”

 

* * *

아서와 크리스티나가 포함된 개선식의 행렬이 축복을 받고 줄리어스를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아그네스는 묵묵히 옷깃을 여몄다.


“…….”

그것이 황실 기밀이고, 알게 되면 레이나는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그네스는 순간 당혹감을 절제하지 못하고 레이나에게 해선 안 될 질문들을 흘릴 뻔했다.


‘아서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거니?’

‘혹시, 뭘 느꼈니?’

그러나 평생 훈련된 귀족으로서의 육감은 그녀를 적절할 때 저지했다.

아그네스는 평정을 잃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로 레이나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레이나. 아서를 염려해 줘서 고맙구나.」

 
레이나에게는 지켜야 하는 자기의 길이 있었다.

그리고 아서에게도.


「하지만 내가 알기론 아서는 괜찮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하구나.」


「그래도 가까이서 지켜본 네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이야기해 주렴. 내가 아서를 더 주의 깊게 지켜보마.」

 
아그네스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말하자, 레이나는 아서에 대해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하며 망설였다.

영웅이면서도 적이 많은 아서의 정치적 입장상 그의 문제는 함부로 흘러나가선 안 되는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이미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레이나를 보며, 아그네스는 절대로 이 아이와 연락이 끊겨선 안 된다고 확신했다.

혹시라도 아서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이 아이는 자신의 길이 어디에 있더라도 아서를 도우러 올 것이다.

인연이 끊기지만 않으면 된다.

혹 오러가 아서에게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이 아이에게 네가 필요하다고 연락할 수만 있다면.


「잘 모르겠다면 천천히 말해 주어도 된단다.」

 
이미 한 번 저를 뿌리치고 달아났던 레이나를 떠올리며, 아그네스는 겁 많은 레이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 나 몰래 떠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서와 상관없이 난 너를 계속 보고 싶단다. 할머니와도 정들었고.」

 
레이나는 무척 황송해하며 고마워했다.

아그네스는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솔직한 진심을 담아 레이나를 잡았다.


「할머니의 치료에 대해 더 알아봐 줄 테니. 나하곤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꾸나.」


「레이나 너도, 당장은 귀족 신분을 원하지 않아도 일단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 알아봐 두긴 하마.」


「폐라고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연락하렴. 없어도 연락하고.」

 

* * *

부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리고.

관악대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기수들의 손에 들린 깃발이 높이 오르며 북소리에 맞추어 개선군이 수도로 향하는 행렬이 시작되고 있었다.

개미처럼 보일 정도로 멀었지만, 레이나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

그가 처음 전장으로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나뭇잎에 찬 바람이 부서지고, 눈이 내리던 그날의 새벽.

절벽 가에 서서, 레이나는 그를 떠나보내던 5년 전의 어느 눈 오던 날을 떠올렸다.

·
·
·

덜컹덜컹 바람이 창틀을 흔들고 있었고, 유리창 너머에선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고 굵은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지쳐 까무룩 잠들었던 레이나가 깨어나서 처음으로 본 건, 창가에서 손등으로 커튼을 걷고 눈보라를 확인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레이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서서히 실감했다.


「…….」

 
이상한 기분이었다.

레이나는 소리 없이 그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어쨌든, 밝은 곳에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임무 완수의 조건이니까…….


「…….」

 
할머니에게 의사가 갔겠지.

할머니는 무사하실까.

치료를 잘 받으셨을까.

그토록 다급하고 간절했는데, 이상하게 당장 확인해야 한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잠들었다가 일어났기 때문인가.

이미 늦었거나, 아니면 모든 게 잘 끝난 후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렇게나 초조하고 두렵던 마음은 모두 가라앉고 허하면서도 차분한 기분만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로소 받아들인 것 같기도 했다.

레이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가 떠나길 기다렸다.


「…….」

 
그러나 그대로 떠날 줄 알았던 아서는 조용히 가까이 오더니 레이나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겨우 일이 초 남짓의 그 짧은 행동 하나만 하고 물러났지만, 갑자기 가까워진 기척에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숨을 죽였다.


「…….」

 
갑작스럽게 창피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얼굴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레이나는 그냥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깨어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길 바랍니다.」


「…….」

 
크리스티나 아가씨에게 건네진 말이었다.

당황한 레이나는 크리스티나 아가씨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남편을 전장에 보내는 아내라면, 나도 작별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는 척하던 것을 그만두고 어색하게 일어나 그를 마주하고 인사를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눈보라 때문에 어둡긴 했지만 새벽빛이 방을 밝히기 시작한 상태였고, 밝은 곳에서 ‘가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보여줄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계속 자는 척을 했다.
 

 


「…….」

 
그는 잠시 기다리다 말했다.


「힘들어하는 목소리밖에 못 듣고 가는군요.」


「…….」

 
레이나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차라리 일어날까?

자는 척을 계속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레이나는 얼굴이 뜨거워진 채로 계속 눈을 꾹 감고 있었다.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땐…….」


「…….」

 
혹시 들어 두었다가 아가씨에게 전해야 할 말일까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말을 맺지 않고, 그대로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곧 그가 의장을 갖추며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전쟁에 빨리 내보내기 위해, 신방에까지 검과 제복, 휘장과 금속 장식 따위가 따라 들어와 있었다.

그는 제복을 갖추어 입고 검을 차며 전쟁에 나가기 위한 채비를 갖추었다.


「…….」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목소리는 들려 주어 버리지 않았냐는 자기합리화 속에 레이나는 멍하니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꼭…… 안 돌아오셔도 돼요.」


「…….」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나는 그에게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위험한 전쟁이잖아요. 아버지도 별로 승리를 기대하지 않아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다만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멈추었다는 것이 듣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레이나는 더 작게 중얼거렸다.


「……이름을 바꾸고 적당히 빠져나가세요.」


「라이언 달튼처럼 사는 삶도 괜찮을 거예요.」

 
너무 작게 말해서…… 그리고 그는 대답하지 않아서.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지금은 그가 들었다는 걸 알지만…….


“…….”

이상하게도, 그 당시엔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이제 와서 궁금해졌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땐.’

그다음에 그가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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