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 줄리어스를 떠나며 (142/210)


#142. 줄리어스를 떠나며
2023.01.08.



“레이나!”

마차에서 내려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녀를 보고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브로디?”

브로디가 달려와 와락 레이나를 껴안았다.

귓가에서 훌쩍훌쩍 울먹이는 소리가 울렸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난 정말 네가……. 어떻게 된 줄 알구.”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브로디를 마주 안았다.


“브로디 너, 어떻게 여기…….”

레이나의 시선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케이와 렘브란트에게로 향했다.

렘브란트는 뺨을 만지며 미소 짓고 있었고, 케이는 고개를 까닥했다.


“기사 분들이 널 구해 주셔서 다행이야……. 그 나쁜 놈들 진짜…….”

레이나는 멍하니 브로디를 마주 안았다.

브로디는 그녀를 납치해간 놈들을 욕하며 레이나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

케이는 간단하게 말했다.


“같이 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 함께 떠나게 됐어요. 레이나 양을 도와주실 거예요.”

브로디가 활짝 웃었다.


“내가 들게!”

레이나의 손에서 브로디가 가방을 뺏어 들었다.


“이거랑 이거 옮기면 되는 거지?”

브로디는 마차에 짐을 실었다.

신이 나 보였다.

레이나를 다시 만난 것이 진심으로 기쁘고 안심되는지 문지르는 눈이 붉었다.


“…….”

이 줄리어스를 떠날 때 날 찾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걱정해 준 것이 고마웠다.

함께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도.


“고마워. 같이 하자.”

레이나가 곁에 서자 브로디는 홱 돌아서며 말투를 바꾸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가만 계세요! 원래 제가 모셔야 하는 아가씨였잖아요?”

“……?”

“아무 말 마세요. 그동안 말 못 한 이유도 다 이해해요. 알게 되면 저희 다 그런 범죄자들한테 위험해질까 봐 그런 거죠?”

브로디가 이를 북북 갈았다.

줄리어스의 하녀로서 함구가 익숙한 브로디는 직접적으로 레이나의 출생이나 위험을 화제로 이야기하거나 사정을 묻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포부와 각오, 레이나가 무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자신이 줄리어스에서 탈출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를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레이나는 브로디가 자신을 줄리어스 후작의 사생아로 알고 있고, 후작 부인이 사생아인 레이나를 제거하기 위해 해결사를 썼다는 식으로 믿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레이나는 케이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

브로디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웃고는 열심히 짐을 날랐다.


 

* * *

레이나는 케이에게 물었다.


“저어…….”

혹시 제가 후작가 사생아일 수도 있을까요? 물으려고 했다.

케이는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당신 짐에서 반지가 나왔다는 것 때문에 오해가 퍼진 것 같지만 그 반지는 가짭니다.”

“……네에…….”

레이나가 머쓱하게 목덜미를 만지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안 물어보시길래…….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사실 제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했어요.”

“…….”

아버지를 모른다는 레이나의 말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낀 케이가 조금 더 이야기해 주었다.


“줄리어스 후작이 당신의 존재가 폭로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싶어 했습니다. 여차하면 당신을 숨겨둔 딸이라고 주장한다면 괜찮은 방법이죠. 그래서 증거를 꾸며 둔 겁니다.”

거의 레이나가 상상한 것과 일치했다.


“…….”

“놀라지 않는군요.”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그저 좀 씁쓸하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케이가 웃었다.


“어찌 됐든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지 않아야죠.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아서 경을 위해 증언이 필요하다면 법정에 나와 증언해 주실 겁니까?”

마지막 말은 진지한 제안이라기보단 농담에 가깝게 들렸지만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아서 경 편에 서기로 하고 제가 이 모든 호의를 받는걸요.”

레이나가 물었다.


“반지가 가짜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케이가 답했다.


“믿을 만한 정보원이 있어 확인했습니다.”

“그렇군요.”

렘브란트가 케이를 불렀다.

여정에 대한 논의인 듯했다.


“…….”

수도는 북서쪽.

테일러의 영지는 정북향에 가까운 북동쪽이다.

그러나 줄리어스의 북쪽엔 대륙 안쪽으로 깊게 파인 큰 만이 있어 바다를 우회해 가야 하기에 중간까지는 개선군과 그들이 가는 길이 같았다.

함께 이동할지, 따로 이동할지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따로 가게 되었다.

개선식을 하러 가는 아서의 군대와 클라인 공자, 펄 공작 부인이 함께 움직인다는 걸 보이지는 않는 편이 중립적으로 보이고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레이나와 할머니, 테일러가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개선군과는 따로 움직이는 게 낫다는 이유도 있었다.


“저희는 이쪽으로 갈까 싶은데요.”

“네, 좋습니다. 호위 병력의 수는 열둘인가요?”

“네.”

“수가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네요. 그분들의 실력을 믿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공작 부인도 계시고 하니 그것보다는 많은 호위를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기사들 몇을 빌려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모셔다드리고 저희 쪽으로 합류하게 하면 되니까요.”

“네, 물론입니다. 저야 감사하죠.”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레이나는 옆에 앉은 할머니의 옷을 단속했다.

날이 추웠고 할머니는 열이 있어 떨고 있었다.

타민을 쓴다면 금방 열이 내린다는 걸 알고 있지만, 중독에서 벗어나야 할머니가 진짜로 나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근본적인 해결책은 금단 증상을 견디는 것뿐이었다.

한 번에 끊기는 어려울 테니, 많이 힘들어하시면 해독제와 함께 조금씩만 타민을 복용하며 천천히 끊어 가자고 테일러가 치료 계획을 세워 주었다.

* * *

앨빈 로렌슨은 함께 가자는 테일러의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다.

잠정적 거절이었다.

그는 줄리어스에 남기를 택했다.

다만 환자로서 레이나의 할머니에 대해선 테일러에게 따로 인도적인 조언을 해 주는 듯했다.

묵묵히 감사 인사를 대신해 고개를 숙이는 레이나와 한 번쯤 눈이 마주쳤지만, 앨빈 로렌슨은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외면했다.

* * *

렘브란트는 다시 레이나를 찾아왔다.

레이나도 이제 그가 찾아오는 게 익숙해 그를 보자마자 머쓱하게 웃었다.

렘브란트가 ‘그 말’을 하러 올 때는 특유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림 이야기를 하러 온 거였다.


“레이나 양.”

“렘브란트 경.”

“지겹죠?”

또 같은 제안을 하러 온 제가 지겹지 않냐는 소리였다.

레이나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늘 거절하는 것이 미안했고, 자기 재능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기쁘기는 했다.

렘브란트는 부드럽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어서, 그의 제안은 언제나 부담스럽지 않고 고마웠다.


“지겹지는 않아요. 하지만 죄송하니까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제 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라서…….”

그는 레이나에게 클라인의 후원을 받아 그림 공부를 해 보지 않겠냐는 설득을 틈틈이 지속하고 있었다.

테일러도 레이나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레이나는 언제나 정중하게 거절했다.

렘브란트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도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오늘은 다른 제안을 하러 왔어요. 좀 더 가벼운 걸로.”

“다른 제안요?”

“네. 수도에 가면 몇 달 후에나 저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신과 같이 보내는 시간을 좀 더 알차게 쓰고 싶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차피 거절당할 후원 제안만 반복하느니, 그냥 제가 직접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걸 몇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걸…….”

“조언해 드릴 수도 있구요.”

그림 조언을 해 준다고? 직접?


“말하자면 임시 가정교사? 뭐……. 가정 방문은 못할 테니 마차 교사로 할까요?”

레이나의 입이 벌어졌다.

그동안 그가 한 제안은 클라인의 예술 학교에 추천장을 써 주겠다거나, 개인 교사를 보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직접 가르쳐 준다고 제안한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굉장히 간단한 일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공작가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그런 건 귀족들에겐 자존심의 문제 아닌가?

렘브란트가 미소 지었다.


“당신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테일러 씨도 찬성할 거예요.”

그리고 레이나 곁에서 끄덕끄덕 졸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도 좋으시대요.”

“…….”

렘브란트로서는 호기심도 있었다.

그녀는 교습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재능 있는 사람은 본인이 쌓아온 것에 아주 작은 몇 번의 적절한 조언만으로도 크게 성장한다.

자신이 주는 몇 번의 간단한 조언으로,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그림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자신에게 배우는 과정에서 그림 공부에 대한 그녀의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결과를 본다면 그녀에게 꼭 후원이 필요한지 어떨지도 더 확실해질 수 있고.


“아, 교습료를 받아야죠?”

렘브란트가 웃었다.


“저도 교습은 해보지 않았으니 초짜거든요. 30코퍼로 할까요?”

 

* * *

케이가 이끄는 후발대 개선군이 출발한 다음 날, 그들은 줄리어스를 떠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간밤에 내린 눈이 그치고 날이 개어,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아침햇살이 내렸다.

길 위에, 나무 위에, 모든 건물의 지붕 위에.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모습은 줄리어스를 사뭇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화 속 시골 마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레이나와 할머니는 잠시 마차를 멈추고, 마지막으로 레이나의 어머니, 릴리의 무덤에 들렀다.

【 백합. 평온히 잠들다. 】


“…….”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남길 수는 없어, 그들은 무덤 앞에 꽃을 놓는 대신 그저 빈손으로 조용히 침묵했다.


“…….”

엄마, 저희 가요.

앞으론 못 올 것 같아요.

…….

안녕히 계세요.

눈이 쌓인 묘지에는 별다른 살아있는 풀이 없었다.

레이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을 헤치고 작은 돌 하나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

레이나는 가만히 그 앞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선 채 한동안 묵념하다가, 뒤편에서 브로디가 작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섰다.

시간이 되었다.

순순히 몸을 돌리고 레이나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던 할머니가 걷다 말고 뚝 발을 멈추었다.

무엇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있던 레이나도 함께 멈추며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와 반대편에서 할머니를 부축하기 시작한 브로디가 말했다.


“이오나 할머니. 가요.”

“…….”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테일러가 다가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님, 걷기 힘드시면 업어드릴까요?”

“…….”

레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할머니도 좀 걸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이나는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발이 줄리어스에 묶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렇게 이동하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했는데도,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게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자 왠지 쉽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갑작스레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하녀들이 장난처럼 주고받던 말.


「‘평생 줄리어스에서 나가지 못하기.’」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줄리어스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기.’」


「둘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다면 어떤 걸 택할래?」

 
나갈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냐, 다른 곳에 가도 여기만큼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냐.

조건을 넣었다, 뺐다 하며 어린 하녀들의 대답이 갈렸다.

나는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했더라.

이곳에서 평생 나가지 못하는 것과, 평생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


“…….”

레이나가 살짝 할머니의 팔을 당기며 속삭였다.


“할머니. 저랑 같이 가요.”

“…….”

잠시 멈추었던 할머니는 다시 발을 떼었다.

묘지의 언덕 아래로 보이는 줄리어스를 등 뒤에 두고, 그들은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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