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몸살
(149/210)
149.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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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몸살
2023.02.02.
크리스티나는 모시기 쉽지 않은 아가씨였다.
예민하고 쉽게 짜증을 내서 언제나 하녀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고, 별안간 심사가 뒤틀려 패악을 부리는 타이밍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을 ‘크리스티나’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바닥을 기게 하고, 드레스를 입힌 채 채찍질을 하려 드는 소름 끼치는 도련님보다는 내 장난감은 나만 괴롭힐 수 있다는 자존심 높은 아가씨가 훨씬 나았다.
레이나는 그 미친 저택에서 자신을 끌고 나와 준 크리스티나를 구명줄처럼 따랐고, 열심히 아가씨의 기분을 맞추었다.
크리스티나가 패악을 부려도 다 받아들였다.
줄리어스에서 다시 쫓겨나지 않으려 진심을 다해 일했다.
다행히 크리스티나는 그런 레이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른 하녀들보다 자주 부르며 몸종으로 곁에 두어 주었다.
항상 조마조마했고 긴장해야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좋은 주인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다른 사람은 괴롭히지 못하게 해 주고, 돈을 쉽게 벌 수 있으니까…….
혼인 일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를 구할 수 있었으니 괜찮았다.
‘진짜 최악’보다는 나은 일.
그뿐이었다.
* * *
몸이 열에 들뜬 것처럼 아팠다.
레이나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언제부터 자신이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왜 그랬는지를 생각했다.
하룻밤에 바로 사랑에 빠지진 않았다.
오 년 전에는 분명 사랑이 아니었다.
그냥 잠깐 우연히 가까이서 만난 딴 세상의 왕자님이 비현실적으로 멋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마 내가 귀족 아가씨인 줄 알았으니 그렇게 대해 준 거였겠지만, 그 저택에서 그렇게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본 건 처음이어서.
좋은 사람인데, 전쟁에서 죽는다면 죄책감이 들고 슬플 것 같았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저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가 연이어 승전고를 울리기 시작했을 땐 기뻤다.
그의 이야기를 신문으로 늘 확인하고 있었기에, 그 사람의 진가를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고 괜히 으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도 그의 앞에 다시 크리스티나로 나서야 했을 땐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신문 너머로만 만나고 싶었지, 실제로 보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기사를 스크랩하며 모으긴 했어도 동경에 가까운 마음이었을 뿐, 나는 내 목숨이 소중했다.
이제 그 사람은 내가 아가씨가 아닌 걸 알 텐데.
그럼 날 전처럼 봐주지 않을 건 물론이고, 황족을 상대로 사기를 친 거니 황실 모독죄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를 다시 보는 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좋아하게 된 건 혼자서 행복하게 그의 이야기를 잘라 모으던 때가 아닌, 그 후에 생긴 마음이었던 듯했다.
많이 힘듭니까. 물었을 때.
그 사람이 내 이마의 상처를 보고 굳은 표정을 하며 어쩌다 그런 거냐고 물었을 때.
다녀왔어. 하고 웃었을 때.
내가 숨을 못 쉬길래 그런 거라고, 코르셋을 벗긴 걸 해명하며 머쓱한 얼굴을 했을 때.
여전히 나를 인간답게 대해 주었을 때.
질투와 서운함이 담긴 눈빛이 숨겨지지 않았을 때.
그리고 그가 나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마음이 시작된 것 같았다.
신문 너머의 비현실적 사람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던 순간들이었다.
그와 처음 입 맞추었던 밤을 떠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던 밤.
레이나는 옆으로 웅크린 채 코로 젖은 숨을 들이켰다.
나쁜 사람 아닌가…….
어차피 난 이렇게 떠나야 하는 사람인 걸 알면서.
내가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즐거웠습니다. 평안하시길.」
레이나는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스스로 상처를 잡아 뜯는 것처럼.
계속 그렇게 그 말을 되뇌다 보면 언젠가 정이 떨어지고 무뎌져 괜찮아질 것처럼.
내내 작별 인사도 해 주지 않았으면서.
밀어낼 땐 언제까지고 계속 볼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나를 잡았으면서.
뭔가 이상하고, 그 사람이 걱정돼 다가서려 하자마자 나의 앞에 차가운 벽을 세웠다.
미운데 계속 그가 걱정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의 생각을 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레이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무력감에 스스로를 파묻었다.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낮에는 두렵고 걱정되는 일들에 휩쓸리느라 아닌 척 할 수 있는데…….
자꾸 혼자 침대에 남으면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낮에는 내가 이렇게 멀쩡하다, 그 사람 생각은 나지도 않는다, 씩씩하게 굴 수 있는데.
밤이 되면 온통 세상에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며, 내가 그 사람을 이 정도로 사랑하는구나.
알게 될 뿐이었다.
어지러웠다.
* * *
레이나가 몸살로 앓아누웠다.
몸이 놀라고 힘든 와중에 안전한 곳에 와 긴장이 풀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테일러는 푹 쉬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고, 브로디가 레이나를 간호했다.
레이나가 못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패트리시아가 걱정하여 찾아왔다.
“많이 아프니?”
테일러가 대신 말해 주었다.
“아닙니다, 대부인. 푹 쉬면 나아질 거예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패트리시아를 발견한 이오나가 휘청휘청 다가가더니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픈 노파에게 마님이 붙들리자 패트리시아의 하녀가 당황했다.
이오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녀에게 사정했다.
“부인, 우리 아가 좀 살려 주세요.”
패트리시아는 순간 철렁했다.
이오나는 대부인 병이라고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 이오나가 말실수를 하는 것은 안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오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피해를 끼치지 않을게요. 평생 나타나지 않을게요…….”
패트리시아는 굳은 채 이오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한 하녀가 할머니를 붙들고 진정시켰다.
“……할머님, 일단 이건 놓으시고…….”
“부인……. 후작 부인. 우리 딸만 살려 주세요.”
패트리시아에겐 모두 기억에 있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람들은 그것을 대부인 병에 걸린 할머니의 별 뜻 없는 웅얼거림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패트리시아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동안, 브로디가 부드럽게 이오나를 달래며 멀어져 둘 사이는 다시 떨어졌다.
테일러가 다가와서 이오나를 마주 보고 레이나는 푹 쉬면 나아질 거라고 말했지만, 이오나의 막막한 눈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
패트리시아는 왜 자신이 즉시 이오나의 입을 막지 못했는지 생각했다.
너무 과민해 보일 것 같아서?
레이나는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몇몇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먼 듯, 가까운 듯 지나갔다.
* * *
트리스탄은 내내 레이나가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아서가 아무것도 모르고 둘이 헤어져도 되나.
케이가 입막음해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아서는 나날이 굳은 얼굴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습관적으로 짓는 미소는 여전히 단정했지만, 트리스탄은 그 안에서 평소와 다른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못하는 사이라면, 이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결혼 생활을 해야 하는 아서에게 레이나의 진심을 전하는 일이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를 볼 때마다 트리스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크리스티나는 사근사근하게 굴고 있었고, 하녀들이나 기사들에게도 잘해주는 것 같았지만, 마리나라는 하녀를 시녀로 곁에 두더니 어느 순간 기사들과 아서에게 묘한 암시를 던지며 간섭하기 시작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암시는 어렵지 않았다.
마리나가 기사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당사자로 지목받은 볼튼 경은 그럴 만한 일이 없었다고 부정하지 못했다.
크리스티나는 마리나와 볼튼 경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포장해 주었고, 그녀의 너그러운 처사에 왠지 약점을 잡힌 분위기가 된 기사들은 오라 가라 하는 크리스티나를 함부로 거역할 수 없게 되었다.
기사들이 불편함을 표하거나 사실을 확인하려 하면 뒤에서 나타나 홑몸이 아닌 사람을 압박하지 말라며 상황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마리나가 대놓고 뻔뻔하게 굴었으면 기사들도 조목조목 따져 봤을 텐데.
마리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며 배를 감싸고 쩔쩔맸고, 볼튼 경도 마리나와의 일을 명확히 해명하지 못한 채 그녀가 임신했다면 책임지겠다고 나서 기사들은 함부로 따지며 몰아붙이지도 못했다.
“둘이 연인은 맞습니까? 마리나 양이 볼튼 경의 이름을 모르던데요.”
울컥해서 한 기사가 들이받자 크리스티나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자랑인가요?”
“…….”
기사는 순간 말문이 막히더니 화가 난 얼굴로 마리나 양이 유혹하지 않았느냐, 둘이 합의 하에 잔 것 아니냐고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전혀 아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아는 트리스탄이 눈빛으로 기사의 입을 막았다.
“앞으로는 기사분들의 좀 더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유유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애처가로 이름나신 트리스탄 경이시니 당황스러운 일 없도록 해 주실 거라 믿어도 되겠죠? 저도 제 남편인 아서 경의 이름에 부하의 추문이 누가 되길 바라지 않아서요.”
“…….”
개선식 직전에 상관의 저택에서 레이디의 시녀에게 기사가 손을 댔다는 추문이 되느니 차라리 그녀와 연인 사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나았다.
볼튼 경은 마리나와 통성명을 하고 어색하고도 이상한 연인 사이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목표가 분명했고, 미워할 상대가 분명했다.
하지만 정작 상을 받으러 가는 지금은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아서는 황실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아 포상을 받아야 하면서도 황실에서 입장이 난처했고, 동료이자 형제였던 카일 황태자는 아군이면서도 아군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카일 황태자는 아서를 보호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황후를 공격하지는 못한다.
그의 어머니인 황후 역시 카일 황태자에겐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 크리스티나는 의지가 되는 아내가 아니었다.
“…….”
트리스탄은 한숨을 쉬고 돌아서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서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카일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아서가 레이나 곁에서 얼마간 지었던 미소와, 편안해 보였던 표정이 그리웠다.
그 여자가 정말 아서 경의 아내였더라면, 감히 아서 경에게 저런 여자라니, 투덜거리면서도.
수행하는 마음이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고 아서의 얼굴을 보는 보람이 있었을 것 같았다.
* * *
“…….”
소탕된 자객들은 적국의 군인처럼 보이도록 옷을 입고 있었고, 적국의 특징이 남아있는 화살을 쓰고 있었다.
적국과의 평화 협정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딜런이 자객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적국에서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했기에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적국 사람처럼 보이도록 옷을 입고, 적국의 특징이 있는 화살을 쓰고 있군요. 하지만 적국의 군인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면도를 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면도한 흉터입니다.”
개선식이 그들에게는 전쟁의 끝이었지만 이미 아서에게는 다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용병들 같습니다. 배후는 후작가이거나 마리아 황후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요.”
후방에서 황급히 합류한 케이가 달려와 아서의 ‘소탕’을 지원하며 이야기를 수습했다.
“이건 그냥 전쟁에서 돌아온 아서 경의 가벼운 도적 소탕입니다. 제국민들에게 멋지고 유쾌한 일로 보이는 데서 그쳐야 해요.”
“적국 잔당이 아서 경을 노리고 있다는 식으로 알려져서 전쟁이 아직 안 끝난 것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개선식이 엎어질 수 있습니다.”
트리스탄이 소탕의 결과에 대해 보고했다.
“…….”
아서가 묵묵히 들었다.
아서는 며칠 사이 더 마른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 모시러 가지. 후작 대부인 쪽에 연통 넣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