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 절벽에서 (156/210)


#156. 절벽에서
2023.02.26.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입맞춤이었지만 아서는 레이나와 닿자마자 처음의 결심을 잊었다.

입술이 닿자마자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갑자기 숨통이 틔워진 것 같았다.

동시에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기도 했다.

못 참겠어.

그는 이내 자제력을 잃었다.

너무 오랫동안 목말랐던 것 같았고, 너무 달았다.

모자랐던 갈증이 채워지고 있는 감각이 손을, 숨을, 혀를 다급하게 했다.

아서는 완전히 평정을 잃고 갈급함을 채우는 일에 빠져들었다.

그 정도로 목말랐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를 붙든 손이 떨렸다.

그녀에게 닿은 곳 외의 모든 감각이 아득해졌다.

처음의 목적도, 상황도, 그들이 처해 있는 위험도 잊고 탐닉하는 동안 숨결이 달아올랐다.

아서는 완전히 자제심을 잃고 입맞춤에 빠져들었다.

그대로 검에 가슴이 꿰뚫려 죽어도 행복한 죽음일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레이나가 저항하지도 않은 채, 숨을 삼키면서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

뺨과 손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아서는 멈췄다.


“…….”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레이나에게서 아주 조금 떨어졌다.


“…….”

떨어진 거리는 겨우 종이 한 장 남짓이었다.

그녀의 여린 숨결이 여전히 아서의 입술에 닿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소리를 억누른 채 울고 있었다.


“…….”

하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해갈이 아득했다.

삼켜도 삼켜도 모자라.

그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녀의 얼굴을 쥐고 있다가, 무의식인 것처럼 그녀의 눈물 위에 입을 맞추었다.

눈꺼풀에. 뺨에.

그리고 이내 견디지 못하고 다시 당겨서 입술을 겹쳤다.

그녀가 울어도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했고, 그녀를 달랠 방법을 그것밖에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

그녀는 그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쥔 채 받아들였다.

계획대로 된 건 거칠어지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이런 형태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입 맞추고 있는데도 그는 애가 타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 * *

부둣가의 낡은 창고.

어두운 방 안에 서로 배후가 다른 세 무리의 자객들이 모여 있었다.

결사대, 친위대, 해결사 길드 따위로 각자 소속은 달랐지만 같은 목표를 가진 자들이었다.

많은 전력을 희생시키고도 끝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자객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황태자는 공격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눈 위에 흉터가 있는 피투성이 남자가 냉랭하게 웃으며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Du solltest dankbar sein. Denn dank unseres Angriffs auf den Kronprinzen wird Kaiserin Maria Zweifel vermeiden.”

통역사가 머뭇거렸다.

푸른 눈의 남자가 통역을 재촉하듯 노려보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냐고…… 합니다. 저들이 황태자를 공격한 덕분에 마리아 황후께서는 의심을 피할 것이라고…….”

핑계 좋은 헛소리였다.

그들은 황태자를 진짜로 죽이려 했다.

공격하는 시늉만 한 것이 아니었다.

살리아인들에게는 아서나 황태자나 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선순위가 분명하고 저희들끼리 싸워 봤자 서로에게 손해일 뿐이니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는 시늉은 할 줄 알았는데.

푸른 눈의 해결사가 분노가 끓는 얼굴로 말했다.


“상의하지 않은 바잖습니까. 그러다 카일 황태자가 진짜 다치기라도 했다면 우린 전부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상대가 냉소적인 비웃음을 흘리며 한입에 위스키를 털어 넣고 말했다.


“Wenn das Leben kostbar ist, sollte man sich nicht in so etwas einmischen.”

“…….”

통역사가 머릿속에서 완성된 번역을 입으로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목숨이 소중하다면 이런 일에 관여하면 안 되지……. 라고?’

“…….”

살리아어를 해석할 줄 아는 길드의 해결사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벽 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붙였다.

잠시 후.

창고에서 억눌린 비명이 울리며 닫힌 문 밑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얼마 후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 * *



“…….”

레이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저만큼 애달파하지도 않았고, 그녀는 그냥 가만히 울음을 삼키며 그를 받아 줄 뿐이었다.

아서는 모든 인내와 여유를 잃고 아득하게 그녀의 젖은 숨을 삼켰다.


“…….”

그리고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에야 아서는.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죄악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입술 대신 서로 이마를 맞댄 채로.

솨아아…….

솨아아아…….

절벽에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피 냄새가 조금 섞인 바다 향기가 햇살 위, 습한 공기를 덧그렸다.

둘 사이에는 조용한 숨소리만 오갔다.


“…….”

아서의 엄지가 가만히 그녀의 뺨에 닿아있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에 흐른 눈물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눈물길이 나 있던 뺨은 아직도 차갑게 젖어있었다.

아서는 조용히 손을 움직여 그녀의 뺨을 감싸고 희미한 온기를 옮겨 주었다.


“…….”

레이나가 젖은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숙였다.


“…….”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렇게 오래 입 맞춘 것 같지 않은데…….

벌써 해가 뜬 게 맞나.

어둑해진 시야 한구석에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끼루룩끼루룩 바닷새 우는 소리가 파도 소리 사이로 들려오며 그들이 무사히 그날의 태양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

용케도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피를 흘리고도 용케 정신을 놓지 않고 초겨울 바닷가의 얼어붙는 밤을 견뎠고.

용케도 발견되지 않았다.

솨아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발치에서 바위 틈새로 머리를 내민 이른 동백이 바람에 흔들렸다.

* * *



“…….”

얼마 후.

레이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찢어낸 옷을 부스럭거리며 그의 등 뒤로 천을 둘렀다.

아서는 그녀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아서가 그녀의 손을 잡아서 막았다.

새벽바람이 차가웠다.

그녀의 손도 찼다.


“하지 마. 당신 입은 것도 부실…….”

레이나가 낮게 갈라진 그의 목소리를 잘랐다.


“아서.”

“…….”

‘경’이 붙지 않은 채, 그녀가 딱딱하게 부르는 이름이 조금 낯설게 들려 아서는 잠깐 침묵하다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응.”

레이나가 말했다.


“당신 잘못되면 죽어 버릴 거예요.”

아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레이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구해 준 목숨이고 뭐고 없어요. 죽어 버릴 거야.”

“…….”

레이나의 목소리는 작고 작았다.

하지만 거기엔 격앙되고 응축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레이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런 거 정말 싫어. 하나도 고맙지 않아요.”

“…….”

레이나가 다시 울음을 삼켰다.


“이뤄놓은 게 아깝지도 않아요? 이러려고 돌아왔냐구요. 남은 사람들은 어떡할 건데요.”

“…….”

레이나가 손으로 다시 눈물을 밀어냈다.


“당신은 남겨진 사람의 시간을 몰라요? 나랑 같이 유가족 위문 갔으면서. 본 게 없어요? 잊어버렸어?”

“…….”

당신이 왜 그걸 걱정해.


“무조건 살아요. 나 감싸지 말고 당신 살라구요. 혼자 살아남아 봤자 죽어 버릴 거니까.”

“…….”

당신이 왜.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

그녀의 입술이 감정을 못 이기고 떨린다.

본 적이 있는 표정이었다.

아서가 한참 만에 고개를 숙이고 작게 대답했다.


“……안 죽어.”

갈라진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톤도. 감정도.


“…….”

내가 죽으면.

당신이 유가족이 되어 줄 건가?


“상처투성이잖아요. 당신 등 완전히 너덜너덜해졌어요.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레이나가 화를 냈다.


“…….”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를.

날 걱정하는 이유를.

물어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물어보면 지금의 이 희미하게 이어진 느낌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혼나고 싶었다.

아서가 물끄러미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저를 노린 거죠?”

“…….”

레이나가 아서를 마주 보며 눈물을 닦아내고 물었다.


“저를 노린 거잖아요. 당신이 목적인 사람들인데 저를 정확하게 노려서 찾아왔어요. ……살리아 자객들이 왜 저를 노리는 거예요?”

“…….”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립에 묶인 손수건이 보였다.

일단 부정했다.


“……아니야.”

레이나가 약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아니라구요? 어떤 게 아니에요?”

“……꼭 살리아가 아닐 수도 있어.”

“마지막에 한 말. Wir treffen uns in der Hölle.”

“…….”

“살리아어잖아요. ‘지옥에서 보자.’는 뜻이고. 신문에서 몇 번 봐서 알고 있어요. 살리아 사람들이 당신에게 여러 번 시도한 말이잖아요.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아니라 날 노리고 왔어요. ……그렇죠?”

“…….”

아서도 그걸 고민해 보려던 참이었다.

레이나를 노릴 만한 사람은 분명했다.

아서 자신을 노릴 만한 사람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 둘이 연계된다는 건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었다.

살리아가 그와 레이나의 관계에 대해 알 수는 없는 일인데…….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레이나의 말에 아서는 모든 생각을 멈추었다.


“‘오러’ 때문인가요? 절 해치면 당신한테 해를 입힐 수 있는 거예요?”

 

* * *

아서가 굳은 얼굴로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

레이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가 알려 주셨어요. 편지로요.”

“……뭐?”

“…….”

아서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편지로?

황실 루사익 전체의 명운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일급기밀을?

아무리 내 아내라고 소개받았대도 만난 지 하루 된 여자한테?

제정신인가?


“……당신 반응을 보니 정말인가 보네요. 이건 무슨 농담인 건가 했는데…….”

“…….”

아서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레이나는 차분하게 아서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한테 편지를 남기셨어요. 렘브란트 경을 통해서 전해주셨고요. ……당신을 잘 부탁한다고 적혀 있는 평범한 카드였어요.”

“…….”

“어제……. 그걸 태우려고 벽난로에 넣었다가.”

“…….”

“그러다…… 카드에 숨겨진 글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불에 그을리면 나타나는 글씨가 있더라고요.”

“…….”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다시 꺼내서 읽어봤는데……. 거기에……. 당신이 이 글씨를 발견했다면 좀 더 빨리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수도에 도착하면 아서의 오러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자고 적혀 있었어요.”

“…….”

레이나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말해 주세요. 오러가 뭐예요? 저랑 무관하지 않은 거죠?”

아서가 두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 쥐었다.

카일……. 이 미친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