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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예감 (163/210)


#163. 예감
2023.03.23.


레이나와 아서는 얼음장 같은 겨울 바다를 헤쳐가면서 간신히 해안 절벽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절벽 아래로 빠져나갈 길을 찾아 어찌어찌 몸을 뺄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허리까지 차는 바닷물을 가르며 절벽 사이를 걷고, 끝없이 앞을 막아서는 바위를 넘고 또 넘으며 칼바람 부는 좁은 절벽 틈새의 바다를 헤쳐나가야 했다.

아서는 대부분 먼저 레이나를 바닷물 밖으로 들어 올려 주었고, 그 방법으로 레이나가 혼자 올라가지 못할 때는 자신이 먼저 위로 올라가 레이나를 붙잡아 끌어 올려 주었다.

작지 않은 상처를 입은 아서의 몸에는 가혹한 움직임이었지만, 험준한 해안 절벽은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올라가기 어려운 곳이 많았다.

아서는 속으로 황태자를 욕하며 레이나를 데리고 이동했다.

입 밖으로 불평의 말은 한마디도 내지 않았지만 표정에 형제를 향한 욕설이 보였다.


“…….”

레이나는 곁에서 그 대책 없는 고생을 함께 감내하며 아서가 황태자를 막 대하는 이유를 팔 할 정도 이해했다.

황태자는 대책이 없다.

양심도 좀 없는 것 같다.

병사들이 고생이 많았을 것 같았다.

레이나가 새파래진 입술로 추위에 달달 떨면서 말했다.


“이렇게 나가게 될 줄 몰랐어요.”

아서가 이를 갈며 말을 받았다.


“나도.”

그의 대답을 듣자 왠지 이 상황이 웃겼다.

황태자의 명령으로 이 생고생을 하며 황태자에게 구출 당하러 가고 있다는 게.

레이나는 추위에 떨면서도 큭큭 웃었다.


“황태자 전하 너무 대책 없으신 거 같아요…….”

웃음소리에 돌아보았던 아서가 열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돌아가면 한 대 쳐 줄게.”

예전 같으면 기겁했겠지만,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어 레이나는 소리죽여 푸흐흡 웃었다.

반쯤 진담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저희 빨리 나가요.”

아서가 아래로 뻗은 손을 잡고 올라가며 레이나가 웃었다.


“따뜻한 물에 몸 녹이고 싶다. 그렇죠?”

“응.”

아서도 왠지 허탈하고 웃겨서 레이나의 손을 잡고 끌어올려 주었다.

레이나가 웃자, 힘든 고생이기보단 웃긴 일 같았다.

전부 별거 아닌 일로 느껴졌다.

차가운 손 사이에서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옷을 벗어 주려 해도 차가운 바닷물에 젖은 옷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빨리 빠져나가 옷을 갈아입고 몸을 녹이는 것만이 최선일 뿐이었다.

아서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황태자 전하랑 있을 땐 이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레이나가 물었다.


“아니. 보통 내가 수습하는 역할이었어.”

레이나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아……. 정말 고생 많으셨겠네요.”

레이나와 아서는 함께 카일을 욕하며 절벽을 빠져나왔다.

* * *

흰고래 여관에 도착했을 때.

레이나는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긴장이 풀린 레이나는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대를 보자마자 엎드려 순식간에 잠들었다.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엎드린다는 건 레이나의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힘이 없었다.

이대로 누울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십 초만 엎드려 있다 일어날게요. 너무 힘들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레이나는 실신하듯 잠들었다.


"……."

아서는 레이나가 잠들 걸 예상한 듯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강행군이었기에 그는 완전히 지치지는 않았지만, 등에 입은 상처가 욱신거려 힘들기는 했기에 잠시 쉬며 벽에 기대었다.

부상의 상태가 좋지 않았고,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는 레이나가 잠든 것을 보며 곁에서 조금 쉬고 있다가 일어섰다.

그에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레이나가 자주 아픈 것은 오러 때문인가.

그녀에게도 영향이 있나.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카일이 알아낸 정보가 그걸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녀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거짓말하게 될까, 침묵하게 될까.

당신이 나으려면 좀 더 내 옆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게 될까.

하지만 오는 길에 새삼 느낀 예감은, 더 이상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나쁜 놈이나 두려운 상대로 느끼지 않는 것 같다는 것.

카일을 욕하며, 웃으며 몇 시간 만에 거리감이 좁혀졌다.

내내 잘 유지하고 있던 거리가 훌쩍 사라지며 그녀가 가까워지고 말았다.

카일 때문이었다.

아서는 새삼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아서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잠든 레이나를 안아다가 그 안에 내려놓았다.

레이나는 잠결인 듯 간신히 실눈을 떴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레이나는 자신을 보살펴 주는 아서를 바라보며 편안한 듯 웃고는.

욕조 안에서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레이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여전히 물이 기분 좋게 따뜻했다.

옆에는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물통이 놓여 있었다.

바로 정신이 들지 않아 꿈인가 하고 있던 레이나는 자신이 여전히 옷을 입은 채 욕조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

그 사람이 해 주고 갔구나.

자기나 쉬지…….

난 일어나서 하면 되는데 힘들게.

미안했지만 고맙고 따뜻한 마음이 들었다.

레이나는 욕조 안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몸을 갑갑하게 조이고 있는 젖은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그리고 벗은 옷들을 옆에 쌓아 둔 채, 다시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 안으로 몸을 꾸물꾸물 구겨 넣으며 행복감을 느꼈다.


“…….”

최고다.

자다가 일어나니 따뜻한 욕조 안이라니.

몇 시간 동안 몸을 갈아 넣은 강행군은 꿈이 된 것 같았다.

천국에 있는 것 같다.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끼익.

불시에 욕실 문이 열렸다.


“…….”

“…….”

레이나는 굳은 채 멍하니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도 멍하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

잠시 소동이 지나간 뒤.

아서는 일어나 있을 줄 몰랐다고 사과한 뒤 수건과 가운을 문 앞에 놓아주고 나왔다.

레이나는 하는 둥 마는 둥 목욕을 마친 뒤 얼굴이 시뻘게져서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미안.”

“…….”

아서도 씻고 나온 상태였지만 그는 레이나 이상으로 정신이 없어 제대로 쉬지 못한 듯했다.

* * *

그리고 흰고래 여관으로 몇몇 사람들이 도착했다.

그들 가운데는 의사인 테일러 로렌슨이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상의를 탈의한 아서의 등의 상처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파편이 제거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아서의 등은 곳곳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상처는 반쯤 아물어 있었지만 몇몇 곳은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테일러가 아서의 상처를 새로 살펴주었다.

비로소 아서는 등에 박힌 폭탄의 파편들을 제대로 제거하는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

테일러는 그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을 확신했다.

아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상처가 아물어 있는 것을 보고 테일러는 그것을 다시 느꼈다.


“…….”

하지만 그것을 입에 올리면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테일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절개해야 합니다.”

테일러가 상처를 보고 진단했다.


“파편이 여러 개 박힌 상태인데 지금 상태로는 빼다가 찢어져 상처가 아무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찢어진 상처가 남는 것보다 절개하는 편이 상처가 빨리 아물 거예요.”

아서가 답했다.


“하세요.”

달각.

달각.

아서의 앞에 수술용 칼과 처치기구들이 차례로 놓였다.

고통을 잊게 해 줄 술을 건네주었지만 아서는 거절했다.


“술은 됐습니다.”

술을 마시면 빨리 낫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테일러는 망설였다.

자신 때문에 다친 거라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레이나 앞에서 그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많이 아플 텐데요.”

아서는 다시 반복해 말할 뿐이었다.


“하세요.”

아서는 고통스러운 절개를 동반한 처치를 잘 견뎠다.

비명이나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레이나의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수술 따위 받지도 않은 사람 같았다.

오히려 더 아파 보이는 것은 레이나였다.

레이나는 창백해져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들어오기 전보다는 침착해진 모습이었다.


“…….”

테일러의 눈앞엔 아서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때, 레이나는 조심스러웠고 가족처럼 그를 염려했지만.

그렇게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지 않았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눈으로 확인하자 새삼 어떤 먼 거리를, 혹은 가까운 미래를 예감하는 기분이 들었다.


“…….”

진심으로 그는 아서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그만큼 레이나가 마음을 쓸 것 같아서.

테일러는 침착하게 마음을 갈무리하고 레이나와 아서가 모두 들을 수 있도록 그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아서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테일러가 뭐라고 말할지 신경 쓰며 불편한 듯했지만, 다행히 감염이 없고 아서가 잘 견딘 덕에 절개가 깨끗하게 처리되어 곧 괜찮아질 거라고 설명하자 긴장을 풀고 안심한 듯했다.

자신의 몸이 아니라…….

레이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듯했다.


“…….”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레이나도 아서의 곁에 남는 대신 따로 테일러를 따라 나왔다.


“테일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테일러는 어색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보고 있다가 어렵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네가 준 건 반년의 유예였고, 아직 난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데.


“…….”

자신이 레이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자신은 기다릴 수 있어도, 레이나는 그런 저를 기다리게 할 사람이 못 되었다.

자신이 힘들지 않아도 레이나가 힘들 것이다.

저 사람이 다친 것을 보았을 때.

아니, 레이나를 보호하러 가서 아마도 다쳤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쩌면 레이나가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생각해 봐주기로 했잖아. 나한테 더 많은 시간을 주기로 했잖아.’

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잡아지는 마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서가 레이나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모습이, 자신의 곁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레이나를 잘라 떠나보내려는 마음이, 그녀를 붙잡으려는 테일러를 멈춰 서게 만들었다.

나는, 나도.

이런 방식으로 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테일러가 손을 뻗어 레이나의 뺨을 쓸었다.


“…….”

무리했다.

레이나를 향한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신답지 않은 일을 했다.

너도 너답지 않았고, 나도 나답지 않았다.

네 상황 때문에 둘 다 무리를 했다.

내가 원하는 건 최소한.

널 행복하게 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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