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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상처 (164/210)


#164. 상처
2023.03.26.


오러와 관련된 선황제의 모든 기록이 남아 있는 왕의 서고는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출입이 허락되어 있었다.

그곳은 황후에게도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마리아 황후도 카일이 오러를 연마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고 여긴 듯 서고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카일 황태자는 무의식중에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머니 마리아 황후는 오러에 대해 자신이나 황제보다 모를 것이라고.


“…….”

하지만 잘못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오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카일이 의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자객들이 아서만이 아니라 레이나까지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카일은 말에 탄 채 불타 뼈대만 남은 부둣가의 낡은 창고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자객들이 묶여 있던 의자를 바라보며 그들이 생포하는 데 성공한 해결사의 진술을 생각했다.


「……그놈들에 대해선 모릅니다.」


「살리아어(語)를 쓰는 놈들이니 살리아인이겠거니 했을 뿐이지 진짜 살리아 놈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교류가 길어서 뭔가 알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자객들이 일시적인 협력 상대에게 자기들 배후를 사실대로 말할 리가 없잖습니까.」


「어떤 놈이 섞여 있을 줄 알고 자기들 정보를 줄줄 흘리겠습니까.」


「저처럼 정보를 팔아 살아남으려는 놈들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해결사 길드의 의뢰를 받아 이 일을 했노라고 자백한 자객은 그들 연합을 그렇게 정의했다.


「우린 그냥, 서로 비슷한 목적이 있다는 걸 깨닫고 우리끼리 싸우지 않기로 일시적으로 합의한 채 협력했을 뿐이에요.」


「제가 무슨 지킬 의리가 있다고 놈들 정보를 숨기겠습니까.」


「나는 수도에서 해결사 길드의 의뢰를 전달받아 일했을 뿐 내 의뢰인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말하는 사람이 더 드무니까 특별한 일도 아니고…….」


「더 이상은 아는 게 없습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케이는 양해를 구해 카일 황태자와 다른 사람들을 내보낸 뒤 자객과 따로 독대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문이 열렸을 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자객은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카일 황태자를 쳐다보고 있다가, 조금 전보다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 되어서 더듬더듬 ‘놈들’에 대해 더 자세히 털어놓았다.


「……카일 황태자는…… 건드리지 않길 바라던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부류였습니다.」


「한눈에 해결사 일을 하던 놈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귀족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놈들 특유의 냄새가 있으니까요.」


「제가 속해 있던 건……. 자신들의 안위와 돈을 주로 신경 쓰던 부류였습니다.」


「분명히 살리아인들로 보이던 놈들도 있었습니다. 폭탄을 가지고 있고, 얼굴이 살리아 놈들 같았습니다.」


「시신을 보여주시면 제가 아는 선에서 같은 데서 온 놈들을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놈은 자신의 진술에 가치가 없을까 위기감을 느낀 듯이, 제법 애를 써서 연합의 구성원들이 보이던 특징들을 설명했고, 카일은 이내 아서를 공격한 세력들의 배후를 확신할 수 있었다.

자객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각 무리의 대표들이 논의하는 자리에 끼지 못해서 정확하겐 모릅니다. 자기들끼리 비밀이 오가는 것 같은 이야기는 우두머리들끼리만 했고 밑에 놈들은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못 듣게 했어요.」


「정보가 될 만한 이야기는 거기서 이루어졌을 겁니다.」


「저는, 그리고 다른 해결사들도 저희 무리 수장의 지시만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몹시 불안해하며 눈치를 보고 말했다.


「……무, 무서운 놈이 하나 있어서, 선택권이 없기도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말을 안 들으면 우릴 다 죽일 것 같았어요.」


「저희 해결사 수장도 반쯤 짓눌려서 협력한 겁니다.」


「굉장히 강한 놈이었는데……. 아서 경이 얼마나 대단한진 모릅니다만, 어지간하면 그놈은 못 당해낼 것 같아서 그쪽 지시에 따른 것도 있었습니다.」


「제 생각엔 그놈이 다른 무리 놈들을 죽인 것 같습니다.」


「눈가에 흉터가 있고…… 해적 같은 분위기가 있는 녀석입니다. 어두운 곱슬머리에 인상이 강한 얼굴이요.」


「살리아 어를 쓰던 놈인데…… 살리아인 특유의 인상이 아니긴 해서 어디 출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른 살리아 놈들이랑 같은 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 행동을 하는 것 같았고……. 살리아 놈들이 다 죽는데도 놈은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

순간 흠칫한 카일이 칼을 뽑으며 뒤로 몸을 돌렸다.

훅 등 뒤에 이질적인 기운이 닿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

가소롭다는 듯이, 작게 웃음기가 어린 콧소리와 함께 살리아어가 돌아왔다.


“[완전히 무재능인 줄 알았는데.]”

“…….”

다그닥.

말을 타고 나타난 사내가 비죽이 웃었다.


“[조금은 발현했나 보군.]”

강렬한 위압감.

해적 같은 인상이라는 말이 과히 어울렸다.

그 해결사가 말한 것이 이놈이라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큰 체격에, 드러낸 팔 위에 문신이 가득했고, 턱선이 강한 얼굴 위로 곱슬머리가 흘러내렸다.

서늘하게 웃는 남자의 회색 눈 위에 흉터가 보였다.

한쪽 눈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위협적인 기운이 등골을 쭈뼛하게 만들며 카일의 몸을 스쳤다.

말 안장에 매달린 자루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한 번 훑은 카일이 눈동자를 들어 올려 상대를 노려보았다.


“뭐야, 너.”

상대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Dein Bruder.”

“난 너 같은 형제 둔 적 없는데.”

상대가 눈매에 웃음기를 단 채 대꾸했다.


“Warum? [아서는 형제 취급해 주면서.]”

“…….”

카일은 아무 대답 없이 묵묵히 상대를 바라보다가 비웃었다.


“네가 아서랑 같다고 말하고 싶어? 회색 눈에 오러를 쓴다고?”

“…….”

상대의 눈에 이채로운 웃음기가 걸렸다.


“[놀라지 않는군……. 날 알아?]”

상대가 뭘 암시하고 싶은지 진작 눈치챘지만, 카일은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들은 적 없어. 알 만하긴 한데, 썩 안 궁금하네.”

상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안장에 걸려 있는 피투성이 자루가 흔들렸다.


“[오……. 아무렴.]”

카일은 언제든 상대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도록 강하게 검을 틀어쥐었다.

위험한 자였다.

그러나 상대는 위협적인 기운을 줄줄이 뽑아내면서도 칼을 뽑을 생각은 없다는 듯 카일을 보며 빙글거렸다.


“[온실 속 화초. 카일…….]”

카일의 눈이 꿈틀했다.

낮게 노래를 읊조리듯 그르렁거리는 살리아어가 이어졌다.


“[날 세울 필요 없잖아. 네가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를 해 주러 왔는데.]”

“…….”

사내가 카일을 바라보며 키들거렸다.

그러고선 그는 안장에 걸린 피투성이 자루를 풀어 카일의 앞에 던졌다.

툭.

열린 자루에서 잘린 머리 하나가 굴러 나왔다.


“…….”

카일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황후 마리아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푸른 눈의 친위대 기사였다.

사내가 손을 닦으며 웃었다.


“[나한테 듣고 싶지 않으면, 네 ‘엄마’에게 가서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이 친구가 무슨 일을 하다가 머리만 남았을까―요?’]”

“…….”

사내의 눈이 고요한 광기로 번뜩였다.


“[궁금하지 않아도 말이야……. 나는 알려주고 싶은데…….]”

사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간절한 표정을 꾸며 보였다.


“[너도 곧 결혼을 할 텐데, 형제의 사정도 살펴줘야지…….]”

사내가 하나뿐인 눈을 가늘게 만들며 웃었다.


“[아서한테는 그렇게 해줬잖아……. 안 그래?]”

적국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낯선 사내의 익숙한 얼굴이 카일의 눈에 박혀 들었다.

말 고삐를 느슨하게 틀어쥔 사내의 팔에 새겨진 문신에, 흔한 살리아 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 *

테일러와의 대화가 끝난 후.

레이나는 아서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서 그 곁을 지켰다.


“…….”

아서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한 상태라 그는 당장은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서가 그 정도로 다친 것을 처음 보는 황태자의 부관들은 황태자에게 상황을 다시 전달하고 일정을 조정하거나 다음 명령을 받기 위해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레이나는 아서에게 간호가 필요한지, 자신이 해도 괜찮은지 물었다.

테일러는 레이나가 간호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해 주었다.

황태자의 부관이 테일러에게 물었다.


“밤사이 의사가 필요할까요? 로렌슨 씨, 이곳에서 대기하시겠습니까?”

테일러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필요한 처치는 다 했습니다. 이제 아서 경이 견뎌주시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후 레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테일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안심시키듯 그녀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나는 돌아갔다가 다시 올게. 그쪽에도 의사가 필요해서. 아서 경은 괜찮을 거야.”

“…….”

레이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고마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서는 침대에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아파하는 목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처치를 받았지만, 그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틀어쥐고 고통을 참았다는 것을 레이나는 알고 있었다.


“…….”

테일러의 처치는 믿을 만했다.

수술한 상처엔 깨끗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 자신과 밤을 견뎠던 때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잠들어서도 참는 것이 익숙한 사람처럼 굳어 있는 지친 안색은, 차라리 힘든 소리를 내며 앓는 모습이 편해 보일 것 같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

레이나는 무릎을 안고 웅크린 채 목이 메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형편없는 선택만 한 것 같은 모든 순간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괴롭고 한심했다.

걱정이 되고,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레이나는 소리 없이 젖은 숨을 삼키며 울다가, 아서의 옆에 놓여 있는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주려 손을 들었다.

젖은 수건이 닿는 순간 아서가 흠칫하며 눈을 떴다.

그가 흐릿한 눈동자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

아서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이나를 잡았다.

레이나가 아서를 바라보았다.

손등 위로 뜨거운 손바닥이 느껴졌다.


“…….”

아서가 옅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으며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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