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백조의 발짓
(172/210)
172. 백조의 발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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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백조의 발짓
2023.04.23.
“아니, 내가 사생아를 데려와 호적에 올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뭐가 맘에 안 드는데?”
후작이 답답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마틸다를 쳐다보았다.
“딸 하나가 공짜로 생기는 건데, 마다할 게 뭐 있어?”
소파에 앉은 마틸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후작을 노려보았다.
안토니오가 쯧쯧 혀를 차며 속으로만 한탄했다.
‘저, 저. 남편한테 저 눈 하고는.’
크리스티나가 누굴 닮은 건지 알 만했다.
저러니 아서가 크리스티나를 마다하고 그 하녀 애를 데리고 살겠다고 하지.
하지만 시나리오상 마틸다가 계속 저러고 있어선 곤란했기에 안토니오 줄리어스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봐 당신, 그건 내가 하라고 한 게 아니고 크리스티나 그 애가 직접 하겠다고 한 거야. 왜 남편한테 눈을 부라려?”
안토니오는 정말이지 아내가 답답했다.
“지금 우리한테 호의적인 곳은 황실이랑 클라인 일가 정도야. 귀족들이랑 관계를 탄탄하게 만들어서 이 자리를 공고하게 만들려면 혼맥 만한 게 없고. 이제 곧 귀족 금혼령이 풀릴 텐데 지금 결혼 장사에 뛰어들지 않은 집은 우리뿐이야. 이런 상황에 멀쩡한 딸이 떡하니 굴러 들어왔는데 이런 횡재가 어딨어?”
“…….”
안토니오는 마틸다를 달랬다.
어쨌든 사교계 활동을 하려면 아내가 필요했다.
“일단 혼맥을 터놓으면 같이 흥하고 같이 망하는 사이가 되니까 약간의 흠결이 있어도 서로서로 비밀을 지켜준다고. 당신도 첫애 결혼시키면서 봤잖아?”
‘첫애’ 소리가 잘도 나오는 후작이 기가 막혀 후작 부인은 허, 소리가 나게 헛숨을 뱉었다.
첫애가 크리스티나를 말하는 건지 레이나를 말하는 건지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딸의 자리를 빼앗긴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하녀 계집애를 크리스티나라고 부르라니!
그리고 아서를 걔한테 주고 크리스티나는 다시 혼인 자리를 구하라고?
기가 막혔다.
만지면 꺼질세라 바람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 키운 내 딸을 한 번 더 팔아먹기 위해, 얘는 하녀 밑에서 크다가 되찾은 아이라고 거짓말을 하라고?
그 아이가 어떻게 커 왔는가는 앞으로 그 아이가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결정하는 법이다.
크리스티나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크리스티나가 제안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그 애가 진짜로 원해서 한 말이겠는가!
크리스티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매일 두 시간씩 기다리며 그 수모를 겪어도 남편인 아서는 안 받아주지.
심지어 그 하녀 계집애를 자기 신방에 들어 앉히고 내내 한 침대를 쓰며 크리스티나를 모욕하고.
설상가상으로 할머니 집에 갔더니 사실은 그 애가 배다른 사촌이었다며 잘못하면 그 애 때문에 가문 계승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크리스티나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됐겠는가.
그런데 아비라는 작자는 딸 두 번 팔아먹을 생각에만 신이 났다.
아서가 우리 편을 확실하게 들어주는 상황이었다면 선대 가주의 사생아 따위,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재판이란 본래 권력의 편이니까, 우리가 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의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 저를 편들어 줄 것 같지 않고 저를 냉대하는 게 보이니, 크리스티나로서도 본인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게 아니겠는가.
후작 부인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 애를 제때 없앴어야 했는데…….”
후작이 분노로 눈을 부릅떴다.
“이 사람이! 이제 걔는 우리 집 아이라고!”
후작은 마치 그게 후작 부인의 잘못인 양 검지를 들고 위협적으로 지껄였다.
“잡음 만들지 마!”
“…….”
“우린 아들은커녕 딸만 하나뿐이야. 아이를 많이 낳기라도 하지 그랬어! 이럴 필요가 없게!”
“…….”
모욕당한 듯한 표정을 짓는 마틸다에게 후작은 짜증이 났다.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되는 아내였다.
안토니오는 황제가 넌지시 일러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내심 황태자비 후보로 점찍어 두고 있던 아이들이 몇 있었는데, 아무래도 무척이나 겸손을 떨며 두렵다고 빼는 것이,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보다 처조카인 렘브란트에게 더 관심이 있는 건가 싶어 섭섭했다는 말.
클라인 일가며 포드 가문까지 든든한 아들들이 있는 집들은 아주 딸 가진 가문들의 방문에 문턱이 닳아버릴 지경인데, 오히려 황실은 문턱이 거울처럼 반짝반짝하다는 농담…….
「자식이 많지 않은 짐도 이럴진대, 줄리어스 일가도 영 심심하여 섭섭하시겠소?」
그래도 아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줄리어스 같은 사돈을 일찌감치 정해 두어 다행이라는 인사치레…….
하지만 황태자가 이번 일로 제법 위신이 서서 상황이 조금 변했다는, 슬쩍 자식 자랑처럼 흘려지는 말들 사이에 정보가 담겨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곧 금혼령이 풀릴 예정이니 귀족들이 성공적인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벌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적령기의 딸들이 있는 온갖 명망 있는 가문의 귀족들은 클라인의 렘브란트와 황실의 카일 황태자, 그 외에도 포드의 삼 형제 등 유력한 가문의 적령기 미혼 남성들과 자기들의 딸을 짝지어 주기 위해 눈치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경쟁에서 본능적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를 가진 후작은 자신에게 쓸 수 있는 카드가 딸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이미 써 버렸다는 걸 너무나 아까워하고 있었다.
아서 덕분에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내가 선제후인데 딸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렘브란트나 황태자를 사위로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기회를 정녕 그냥 두고 보내야 하나 욕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다들 너무 좋은 매물들이 아닌가.
후작의 눈에는 길거리에 주인 없이 떨어져 있는 금화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줄리어스에게 입찰권이 없다니.
이미 아서와 정식으로 혼인을 올렸다고 소문이 난 크리스티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치열한 경쟁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오 년 동안 귀족 통혼이 금지됐기에 그동안 실감하지 못했지만, 곧 그들은 귀족들 사이에 빽빽하게 들어찰 혼맥 결탁에서 뒤처지게 될 것이다.
황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미 황실 사생아를 떠안은 덕을 톡톡히 본 줄리어스라고 무시하는 시선들이 만만치 않았다.
줄리어스를 제외한 다른 귀족들이 전부 혼맥으로 이어진다면…….
안 그래도 근본 없는 상인 귀족이라고 은근히 따돌려지고 있는데.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도 뛰어들어야 해.
어머니가 숨겨 왔던 이복 누이와 그 딸의 존재는 차라리 반가울 지경이었다.
마틸다가 매섭게 따졌다.
“혼맥으로 써먹으려고 가축까지 입적하겠군요! 당신은 그런 배운 거 없는 애를 누가 데려간다고 혼맥으로 써먹는다는 거예요?”
“이 사람 또 헷갈리네.”
후작이 선심 쓰듯 턱을 치켜들고 웃었다.
“그 애는 이미 아서가 데려갔잖아?”
후작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이며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우린 진짜 크리스티나를 사교계에 약혼 경력 하나 없는 흠 없는 아가씨로 내놓을 수 있게 된 거라고! 심지어 걔는 평생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자란 진짜배기야. 가까이서 보면 모를 수가 없지! 그 애를 데려가는 남자야말로 횡재 아니겠어?”
후작 부인은 들킬까 봐 바들바들 떨었지만 후작은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다.
손은 곱고, 얼굴은 귀티가 흐르고, 도도하고 고귀하며 귀족적이라는 의심이 퍼져나가면 더 좋다.
값어치가 올라갈 테니.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좋다.
하녀의 손에 자랐어도 귀족적인 태생이 숨겨지지 않는 줄리어스의 고귀한 혈통을 증명하는 일이 되겠지.
대체…….
후작 부인은 파르르 눈을 떨었다.
“그래서 이십 년 넘게 하녀로 굴러먹던 애 따위를 내가 낳은 딸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예뻐라 하라고요?”
후작이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예뻐라 안타까워라는 크리스티나한테 해. 큰 애는 아서한테 맡겼으니 걱정 없어서 그런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
“…….”
“그 아이야 아서 따라서 제 영지로 갈 테니 당신이 앞으로 볼 일도 얼마 없을 거고, 앞으로 당신이 안타깝고 예뻐라 해야 하는 건 진짜 크리스티나니까 어려울 것도 없잖아? 친딸한테 꽃길 깔아주기 위해 이름 바꿔 불러주는 거, 그 정도도 못 해?”
후작이 후후 웃었다.
“그 하녀 애야 이미 출가외인이니 데뷔탕트 외엔 신경 쓸 것도 없을 거야. 동생이 저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안타까워서 본인만 즐기기 미안해 칩거한다고 해. ‘이제 가족과 회복의 시간을 보낼 때다!’ 그럼 아서도 기꺼이 아름다운 아내의 마음씨에 동의하고 빨리 빠져 줄 수 있을 테니.”
후작은 열성적으로 아내를 설득했다.
“우리는 좋은 혼맥 딱 물고 있는 딸내미 하나가 공짜로 생긴 거지. 심지어 그 혼인 계약서 덕분에 계승권 문제도 다 해결돼 있잖아?”
“…….”
“생각해 보라구. 하녀 하나 주고 황실 혼맥이 거저 생긴 데다 이제 멀쩡한 진짜배기 딸 하나가 공짜로 더 있으니 이보다 더 이득은 없다고!”
마틸다가 너무 짜증이 나서 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서 굴러먹지도 못한 애를 내 배로 낳았다고…….”
“우리가 어디 하녀를 대충 굴러먹게 두는 집안인가? 아서도 그걸 아니 좋다고 한 거 아냐?”
후작이 쯧 혀를 찼다.
“그리고 솔직히 아서 그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라서 크리스티나 성격이랑은 영 부딪칠 놈이라고. 하지만 그 하녀 애는 믿을 만하지. 크리스티나한테도 살살 비위 맞춰가며 얼마나 잘 해줬어? 윗사람 마음 불편하게 안 하고 이쁨받는 데는 도가 튼 애야. 당신도 그러니까 여태 아깝다고 처리 못 한 거 아냐?”
“…….”
후작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조카 아이잖아. 싸움 걸지 않겠다고 납작 엎드리고 잘 부탁드린다고 들어온 애인데, 동정심을 좀 가져. 원래 잃을 게 없는 애들이 밟히면 무서운 법인 걸 몰라?”
그 애도 같이 죽자고 분탕질할 수 있는데 얌전히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으니 우리로선 손해 볼 것 없다.
크리스티나 그것이 모처럼 선심을 쓰고 똑똑한 짓을 하는구만.
이 꽉 막힌 여편네가 망치면 쓰겠어?
* * *
아서가 손을 내밀었다.
레이나가 그의 손과 어깨에 손을 올리며 춤의 시작 자세를 잡았다.
무척 긴장하고 쑥스러운 티가 났지만 올려다보는 눈이 반짝였다.
“……저 잘 못해요. 케이 경 발을 세 번 밟았어요.”
“나도.”
“거짓말이시죠.”
“그래, 케이의 발을 밟진 않았지.”
레이나가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아서는 웃는 얼굴로 레이나에게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 진짜 나가고 싶다.
케이가 정말로 빠지고 싶은 표정으로 영혼 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서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케이는 레이나에게 밀도 높은 교육을 지속해야 했다.
아서랑 있을 때 춤 실수를 한다면 교정해 줄 생각으로 케이는 팔짱을 끼고 벽의 꽃처럼 섰다.
아서는 절대 레이나를 교정하지 않으니까.
대체 뭘 객관적으로 보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케이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음악과 함께 춤이 시작되었다.
“…….”
그리고 케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못 추시네요.”
“그래?”
“네. 아서 경도 연습하셔야겠는데요?”
“그럴까?”
“잠깐만.”
케이가 당황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각하. 장난치지 마세요.”
“…….”
아서가 시치미를 떼고 실실 웃었다.
케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레이나에게 말했다.
“아서 경 춤 잘 추십니다. 지금 일부러 망친 거예요. 각하. 다시 제대로 하세요. 연습할 시간도 없습니다.”
레이나도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예요?”
아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정말 모르겠는데. 오랜만에 해서 잊어버렸나 봐.”
레이나가 눈을 흘기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진짜……. 망치는 것도 자연스럽게 잘 망치시네요. 정말 못 추시는 줄 알았잖아요.”
하긴, 그를 입양한 로아스 자작 가문으로부터 확실하게 교육받으며 자라셨을 텐데 못 출 리가 없지.
아서가 다정한 눈으로 뻔뻔하게 주장했다.
“아냐. 정말 기억 안 나. 나도 연습이 필요하겠는데.”
“…….”
케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