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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새 이름 (177/210)


#177. 새 이름
2023.05.11.


브로디가 레이나의 머리를 빗겨주며 거울 너머로 눈을 반짝였다.


“전 아가씨가 보통 귀하신 분 같지 않다고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

레이나가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브로디를 바라보았다.

브로디는 그게 너무 좋았다.


‘우아하면서도 풋풋해! 그새 데뷔탕트 준비하는 아가씨 같아졌어!’

전 같으면 얼굴이 붉어져선 허둥지둥할 텐데, 에티켓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레이나는 이제 제법 귀족 같은 태가 나며 단정하고 침착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레이나는 브로디를 보고 곤란한 얼굴로 웃으면서 얼굴을 문질렀다.


“브로디,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요?”

브로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분한 목소리를 낮췄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가 아가씨를 만나러 왔다가셨다구요. 그 카일 황태자 전하! 알렉산더 황제의 직계 후손이고 마리아 황후의 하나뿐인 아들! 아시잖아요! 우리랑 같은 시대를 사셨으니까!”

“…….”

같은 시대를 살다니 이게 무슨 거창한 발언인가.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 또래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이야기일 테니.

아서는 전쟁을 통해 근 이 년 사이 급부상한 영웅이었지만, 황실의 유일한 적자인 황태자 카일은 오랫동안 제국민에게 사랑받은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황제의 외도와 무능이 카일의 흠 없는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킨 황후가 제국민에게 지지를 받고 좋은 정치로 존경을 받으며 클라인 일가와 함께 덕을 베푸는 일을 많이 한 황태자의 이미지는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잠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두 형제의 우정과 인성이 강조되며 황태자 카일은 다시 뭇 소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백마 탄 왕자님이 되어 있었다.

즉 카일 황태자는 명실상부 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부동의 최상층에서 그에 걸맞은 높은 인기를 누린 황태자였던 것이다.

그런 황태자가 레이나를 상당히 정중하고 귀하게 대해 주고 갔으니, 어려서부터 황태자의 이야기를 접하고 자란 브로디는 꽤나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황태자가 남긴 말을 생각하며 조그맣게 맞장구쳤다.


“좋은 분이시지…….”

“그쵸!”

브로디는 한참 황태자의 멋진 점을 찬양했다.

근래 신문을 열심히 보는 것 같더니.

나도 신문 보고 아서 경에게 푹 빠져 있을 때 저런 모습이었으려나?

신기하다.

꽤나 긴장하게 하는 윗사람이다 보니 아서 경에게는 그렇게 감동적인 감흥이 없는 것 같더니…….

황태자를 만난 건 또 다른 느낌인 모양이었다.


“그 황태자 전하가 직접 아가씨를 찾아와서 데뷔탕트 초대장을 주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손등에 입맞춤까지 하다니. 세상에. 저라면 일주일 동안 손을 안 씻을 거예요.”

브로디가 설레하며 말을 이었다.


“데뷔탕트에선 아서 경 다음엔 황태자 전하랑 춤도 추시겠죠? 아가씨가 조만간 귀한 대접 받을 것 같다고 상상은 했지만, 이건 상상을 넘어서서 너무 설레요!”

레이나는 조심스러운 기분이 되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뭐라도 돼서 그런 건 아니고……. 황태자 전하께서 아서 경을 존중해 주시기 때문이지. 아서 경이야 워낙 대단한 사람이고 황태자 전하랑 막역하시니까…….”

“아휴, 겸손하시긴! 그런 아서 경이 이런 아가씰 알아봐 주셨잖아요!”

브로디가 레이나의 귀에 진주 귀걸이를 달아주며 웃었다.


“진흙 속의 진주요!”

“…….”

브로디가 레이나의 머리를 만져주며 신나게 재잘거렸다.


“요즘 보석의 왕이 진주인 거 아세요? 루비나 사파이어보다 더 비싸대요. 전 아서 경이 아가씨한테 딱 어울리는 선물을 해 주셨다고 봐요.”

“…….”

소식지를 통해 보고 있으니 레이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진주의 가치가 높은 건 아서 때문이었다.

진흙 속에서 고통의 과정을 거쳐 빛을 내게 된 ‘아서’를 많은 사람들이 진주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브로디는 레이나도 그와 같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지만 레이나는 차마 고마워하지 못했다.

레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브로디. 아서 경은 맞지만 나는 아니야. 난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왔을 뿐인걸. 정말 한 게 없단 말이야. 내가 뭐라고 제국을 구한 아서 경한테 비교가 되겠어. 아서 경한테 누가 될 것 같으니 하지 마…….”

 

 
브로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아가씨 진짜 아서 경을 생각해 주신다니까.”

브로디는 레이나의 머리에 자잘한 진주를 달아 꾸며 주며 웃음을 참았다.

브로디는 레이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레이나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자신이 해야 하는 것들을 얼마나 열심히 익히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나는 밤잠을 줄여가며 계속 춤과, 역사와, 에티켓을 비롯해 온갖 것들을 공부하고 있었고,

쉴 때도 늘 자세를 곧게 하며 긴장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땐 간신히 남들이 보지 않을 때만 심호흡을 하면서 높은 사람과 시선이 마주칠 때면 자연스럽게 귀족 아가씨처럼 웃었다.

그렇게 집중하고 있으니 빠르게 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맹훈련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저라면 아무리 아서 경이 좋아도 그렇게까지 해낼 자신은 없어요. 누굴 데려다 놔도 비슷할걸요?”

“…….”

레이나는 또 얼마나 새가슴인데…….

그 모든 것이 아서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레이나가 아서를 보는 눈빛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짧은 침묵 후에, 브로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도 머리가 마냥 꽃밭은 아니에요. 겉보기에 좋은 남자를 잡는다고 다 좋은 결말이 되진 않는다는 걸 아는걸요. 그래서 더 아가씨를 보면 위안이 돼요. 잘 살았으면 좋겠고.”

“…….”

브로디가 레이나의 머리에 마지막 장식을 꽂아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나가 걱정이에요. 걔도 잘돼야 할 텐데.”

“……?”

마리나?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브로디와 레이나의 눈이 마주치며 둘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어렸다.

레이나는 얼른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한 듯했지만, 흠잡을 데 없는 레이디의 모습이었다.

브로디가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얼른 엄지를 들어 보였다.


‘좋아요. 괜찮아요.’

레이나가 얼른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드레스가 예쁘게 늘어졌다.

레이나는 티타임과 예법에 대한 교육도 받고 있었다.

그 시간을 함께해 주고 있는 사람은 레이나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지나치게 기존의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다른 예법을 선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섰다.


“나 왔어, 언니.”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 *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티테이블 앞에서 너무나도 편안하고 도도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찻주전자를 들었다.


“…….”

익히 아는 모습이었지만, 레이나는 ‘레이디의 에티켓’과 ‘크리스티나다운 에티켓’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를 망연하게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티나가 레이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잘 하고 있다며?”

레이나는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 많이 부족해요. 아가씨를 따라가려면 평생이 걸려도 부족하겠지만 수도에서 만이니까, 잠시나마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턱을 괴고 레이나를 보았다.


“남들 앞에서도 그럴 거야?”

“……네?”

“이제 슬슬 ‘아가씨’ 떼자? 이러다 남들 앞에서도 실수하겠어.”

레이나는 약간 주저했다.


“……아, 벌써요?”

“이것도 연습해야지.”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리고 동생이 언니를 찾아오는 데 일일이 아서 경이나 케이 경에게 허락을 받고 있으니 좀 이상해 보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레이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가 너를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너 내가 무섭니?”

“…….”

크리스티나는 근래 이런 말을 할 때가 많았다.

마치 자긴 레이나에게 진심인데 상처받았다는 듯이…….

레이나는 더듬거렸다.

예측 불가능한 크리스티나가 아서에게 어떤 식으로 해를 끼칠지 모르니, 크리스티나를 서운하게 할 순 없었다.


“……아, 아뇨. 아가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요. 케, 케이 경이 그러셨어요?”

크리스티나가 티포트를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아서 경이 아주 너를 싸고돌아. 그렇게 독하면서도 순진한 면이 있는 게. 참 재밌는 남자야.”

“…….”

레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마 아가씨를 배려하셔서 그런 것도 있으실 거예요. 저를 자주 보는 게 기분이 좋진 않으실 수도 있으니…….”

“…….”

“어, 그러니까……. 아가씨의 진심은 그렇지 않겠지만, 케이 경 입장에선 그렇게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크리스티나가 싱긋 웃었다.


“애쓸 필요 없어. 그래도 내 마음을 생각해 주는 건 고맙구나. 넌 항상 그랬지.”

“…….”

크리스티나는 직후 본론으로 대화를 옮겨갔다.


“자. 약속대로 티 에티켓 봐 줄게. 해 보련?”

크리스티나가 티포트와 잔을 톡톡 손 끝으로 두드렸다.


“차를 내리는 법이야 잘 알고 있을 거고. 앞으로는 서서 내리는 게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서 내리는 거라고만 생각하면 돼.”

“네.”

레이나가 긴장한 것을 숨기며 제 쪽에 마련된 티포트를 들었다.

그리고 케이 경의 누이에게 가르침 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한때는 차를 두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문화가 생기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허례허식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사교 행사가 금지되며 티 에티켓은 명맥이 흐릿해지기도 했거든요.」


「줄리어스의 레이디라면 차에 익숙할 테니, 너무 엉뚱한 모습을 보이지만 않으면 돼요.」


「차에 익숙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적당히요.」

 
……적당히.

그런 게 제일 어려운 거지만…….

그래도 레이나는 차를 내려주던 입장에 있던 사람이었으니 티 에티켓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레이나는 단정한 태도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어두운 붉은 빛의 홍차가 찻잔에 담겼다.

레이나는 침착하게 티포트를 옆에 내려놓았다.

주변에는 물방울 하나 튀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래, 뭐. 잘하는구나.”

“…….”

크리스티나는 간단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것이 의외여서 레이나는 순간적으로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렇게 쉽게 넘어간다고?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태도가 된 레이나를 보고 크리스티나가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하녀처럼 쩔쩔매지만 않으면 돼. 차를 엎었거나 찻잔을 깨는 실수를 했다면 그냥 하인을 부르면 되고. 침착하게 사과하는 법까지 가르쳐 줄 필요는 없지? 네가 원래도 잘하던 것이니.”

“…….”

레이나는 웃어야 하나 부정해야 하나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당하게 굴어. 나도 티 파티에 나간 적이 없으니, 좀 어설프거나 남들과 달라도 다들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티 파티에 나간 적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할 거야.”

“네, 아가씨.”

그리고 레이나는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사실 이 만남은 레이나가 케이에게 크리스티나를 만나야 할 것 같은 이유를 말한 뒤 허락을 받아내 성사된 것이었다.

오늘 크리스티나가 그 이야기를 할 텐데…….

곧 그녀가 레이나가 기다리던 내용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케이 경이 너한테 내가 만난 적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알려주라던데. 그것도 뭐……. 넌 나를 많이 따라다녔으니 거의 알지?”

그것이 레이나가 크리스티나를 청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무심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옛날 인연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억 안 난다고 해. 딱히 얼굴 보여주고 말 섞은 사람 없으니 그렇게 해도 돼.”

레이나는 무심한 대답에 조금 불안한 느낌을 받으며 수긍했다.


“아……. 네.”

크리스티나는 태연하게 차를 들었다.


“언니도 들어.”

“네, 아가씨.”

그래도 일단은 말대꾸를 하지 않아야 하는 상대이니 레이나는 공손히 대답했다.

레이나는 씁쓸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머릿속으로 바쁘게 생각했다.

다른 귀족을 만난 적이 없다고는 해도, 크리스티나가 사소하게 생각해 기억에 남겨두지 않았을 뿐.

크리스티나를 자주 따라다닌 레이나로서는 짚이는 일들이 전혀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언제까지 아가씨라고 부를 거야? 이제 연습해야지. 언니, 나 불러 봐.”

“…….”

크리스티나의 입에서 나오는 ‘언니’ 소리가 낯설어서 이상하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레이나가 어색함을 참으며 말했다.


“알았어. 음. ……레이나.”

그 말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눈썹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맞다.”

“……?”

크리스티나가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바꾸기로 했어. 아무래도 그건 너무 평민 같은 이름이라서.”

“…….”

“어머니가 새 이름을 주시기로 했거든.”

레이나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새 이름을요?”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응. 옆에서 누가 ‘레이나.’ 했는데 둘이 동시에 돌아보면 그것도 웃기잖아?”

“네, 아니, 응.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율리아나라고 불러.”

레이나가 눈을 깜박였다.


“율리아나요?”

“응.”

‘율리아나 줄리어스?’

“그 이름은…….”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어울리지?”

‘율리아나’는 ‘줄리어스’와 유래가 같은 이름이다.

줄리어스의 초대 여주인의 이름이기도 했다.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나도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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