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 말하지 마세요 (188/210)


#188. 말하지 마세요
2023.06.18.


마리나는 잠옷 차림으로 계단 난간을 붙든 채 몸을 숙이고 울면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레이나가 마리나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마리나? 아파?”

마리나는 눈을 들고 레이나를 바라보았지만 대꾸는 하지 못했다.

눈가에 눈물이 어룽어룽했다.


“…….”

벽난로를 때고 있는 방 안과 달리 겨울의 저택 복도는 공기가 차가웠다.

배를 감싸고 웅크린 마리나의 몸이 식어 있었다.

레이나는 황급히 마리나에게 자기 숄을 벗어 걸쳐 주었다.


“차가운 복도에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홑몸도 아닌데…….”

“…….”

 

 
마리나는 입을 다물고 레이나를 쳐다보다가 울컥 짜증을 내면서 레이나를 떨쳐냈다.


“넌, 넌 몰라! 넌…….”

레이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이리 와! 들어가자.”

레이나는 얼른 마리나를 끌고 자신의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런 상태의 하녀들이 예민하고 화를 잘 낸다는 건 친구가 없었던 레이나라도 충분히 아는 일이었다.


“…….”

마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빨개진 코로 훌쩍이며 레이나에게 손목을 잡힌 채 따라 들어왔다.

마리나는 주로 줄리어스 후작 부부가 있는 타운하우스에서 크리스티나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 아빠와 시간을 보내라는 크리스티나의 권유가 있었다며, 레이나와 아서가 머무는 저택으로 쭈뼛쭈뼛 자주 찾아오고 있었다.

지위가 높은 기사들 상당수가 둘이 머무는 저택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볼튼 경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비록 마리나는 볼튼 경을 만나기보단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레이나 쪽으로 와서는 브로디와 시간이나 때우다가 돌아가는 날이 더 많았지만…….

하녀장 후보인 데다 기사의 아이를 가졌다고 쉬쉬하고 있고, 표면적으로 ‘크리스티나’가, 즉 현재의 레이나가 아끼는 시녀라고 소문난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마리나가 여기서 자고 가는 날인 모양이었다.


“볼튼 경을 불러 줄까?”

마리나가 황급히 레이나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부르지 마! 싫어!”

레이나는 종 줄을 당기려던 것을 관두었지만, 복잡한 얼굴로 마리나를 바라보았다.


“…….”

후작 부인에게 아서의 약점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던 레이나다.

마리나가 무슨 명령을 받고 자꾸 이곳으로 오며 어쩔 줄 몰라 하는지 뻔히 알 만했다.

하지만 마리나는 볼튼 경을 포함해 기사들 근처엔 가지도 않았고, 기사들도 불편하게 마리나를 피하며 접점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아마 후작가에는 줄줄 거짓말을 지어내 보고하고 있겠지.


“…….”

둘 사이가 서먹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마리나는 아이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럼 어떤 의미로든 아이 아빠가 곁에 있어 주는 편이 좋을 텐데…….

마리나가 울먹였다.


“우리 헤어졌어.”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헤어졌다고? 그럼 아이는 어쩌고?


“볼튼 경이 헤어지자고 한 거야? 아이가 있는데?”

마리나가 훌쩍이면서 말했다.


“……아니,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뭐? 왜?”

“…….”

마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나가 당황해서 재촉했다.


“볼튼 경은? 그러자고 해? 아이는 어떡하고?”

마리나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울 것처럼 입 모양을 찌그러뜨렸다.


“……아이는 없다고 했어. 유산했다고. 그니까 헤어지자고 했어…….”

레이나의 눈이 더 커졌다.


“뭐어?”

레이나가 더듬거렸다.


“너, 너 유산했어?”

레이나가 당황해서 연이어 물었다.


“그럼 조금 전에 헛구역질하던 건? 입덧 아니야?”

“……할 거야. 유산.”

이게 무슨 소리야?

레이나가 놀라서 마리나를 보았다.


“너…… 거짓말한 거야? 유산을 할 거라니…….”

곧바로 검붉은 물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조금 전까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아서가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노크해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

그리고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문간에 기댄 채 마리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바로 레이나를 향해 물었다.


“……하녀를 불러 줄까?”

 

* * *

부름을 받고 달려온 브로디가 따뜻한 물을 준비해 주고, 마리나는 욕실 문이 닫히자마자 브로디에게 따져 들었다.


“그건 언제 구할 수 있는 거야? 시간이 많이 지나면 약이 와도 늦는다고! 난 급하단 말이야!”

“어휴……. 마리나! 일단 진정하고…….”

“너야 네 일이 아니니까 진정할 수 있는 거겠지!”

마리나가 울먹이는 소리로 따지듯 울컥거렸다.

다급하고 무서운 나머지 브로디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

브로디에게 검붉은 물을 부탁했구나.

레이나는 끼어들지도 못한 채 둘을 바라보았다.

볼튼 경이랑 그 정도로 안 좋은 거야?

유산하지도 않았으면서 유산했다고 말하고, 아이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

문을 닫고 나오자 방에서 기다리던 아서가 레이나에게 물었다.


“약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아, 그게…….”

레이나가 망설였다.

레이나의 머뭇거리는 기색에서 아서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듯 물어보았다.


“유산약인가?”

“…….”

“흠.”

레이나는 그가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다.

아서가 팔짱을 꼈다.


“……전장에서도 종종 있던 일이라 모르진 않아. 하지만 그런 약은 보통 효과가 확실하지도 않고, 위험하지 않나?”

“……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조금 안심했다.

아서가 볼튼이 알고 있냐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마리나의 몸이 위험하지 않은지에 대해 물어 주어서.

민간에는 다양한 유산약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위험하고 효과가 불확실했다.

하지만 ‘검붉은 물’은 부작용이 있을망정 효과가 분명한 약이었다.

그래도 그걸 로렌슨 선생님 같은 의사로부터 안전하게 처방받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고, 어설프게 따라한 약이나 보관을 잘못해 독성이 강해진 약을 함부로 먹었다가 잘못되는 하녀들이 많았다.


“볼튼은?”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나가 좀 진정되면 들어가서 다시 물어볼게요. 아서 경도 혹시 볼튼 경 쪽에 알아봐 주실 수…….”

저벅.

복도 쪽에서 기사의 발소리가 들렸다.

숨 가쁘게 달려온 볼튼 경이었다.

손에 마리나가 몰래 두고 온 편지가 들려 있었다.

* * *

볼튼은 편지로 이별 통보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가 꾹꾹 뭔가를 참는 듯이 말했다.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요.”

마리나가 버럭 화를 냈다.


“책임 안 지셔도 돼요! 저도 경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경도 그렇잖아요!”

“…….”

볼튼이 입을 다물었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할 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볼튼이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유산했어도…… 내 아이를 가졌었다는 건 변함없잖아요. 여자에게 치명적인 소문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날 좋아하게 노력할게요.”

“…….”

이번엔 마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볼튼이 꾹 참으며 물어보았다.


“……미안합니다. 이걸 먼저 물어야 했는데……. 몸은 괜찮습니까? 의사를 만났어요? 아무리 초기라도 유산은 몸에 큰 무리가 가는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

그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신경을 못 써서 미안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내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레이나는 끼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알 수가 없었다.

마리나는 유산하지 않았어.

유산약을 구하고 있다.

하지만 유산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잖아.

마리나의 뜻을 존중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뜻이 너무 섣부른 결정이라면…….

볼튼 경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마리나가 아니면 결정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지금이라도 내 집으로 가서 내 어머니에게 보살핌을 받는 건…….”

마리나가 이내 다시 독하게 볼튼 경을 밀어냈다.


“제가 당신 아이를 가졌었다는 걸 어떻게 믿어요?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요.”

그 말에는 볼튼 경도 얼굴을 굳혔다.


“……어떻게 그런,”

마리나가 쏘아붙였다.


“무슨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말해요? 당신들, 기사들도 이미 다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서.”

볼튼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굳어졌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건 사실이었고 볼튼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임산부인 당사자의 귀에 직접 들어가게 말한다는 건 다른 얘기였다.

아무리 수상스러워도 그녀가 그런 소릴 듣게 했다는 건 염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당신한테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마리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주륵 흐르는 눈물을 확 훔쳤다.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나 같아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이해가 가니까.”

목소리에선 노기가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우는 것을 염치가 없어 하는 듯했다.

볼튼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서 있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책임질 일을 했다는 건……. 아니, 아니. 일단 의사를 만나죠. 나랑 같이 가요.”

볼튼이 잡으려 했지만 마리나가 그의 손을 쳐냈다.


“싫다고요.”

볼튼은 맞은 손을 애매하게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상처받은 듯이 멀거니 서 있었다.


“…….”

아으으.

진짜 이걸 어쩌지.

톡톡.

레이나가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케이 경이었다.

그가 잠깐 자신과 이야기하자고 눈짓했다.

그 옆에선 리오넬 경이 다가와서 아서에게 황제의 명을 전달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황궁의 야간 경비를 재정비했는데, 황제가 지금 아서에게 그것을 기습적으로 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이야기가 작게 들려왔다.

* * *

아서는 리오넬과 함께 황궁으로 갔고, 레이나는 케이와 함께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레이나는 케이가 무어라 말할지 거의 예상이 간다고 생각했다.

볼튼 경과 마리나의 일이 저런 식으로 좋지 않게 풀리면 아서 경의 평판에 좋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에 대한 상의이리라 짐작하고 레이나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마리나가 유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상의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온 질문은 예상과 달랐다.


“당신이 마셨던 거. ‘검붉은 물’입니까?”

“네?”

“…….”

케이가 말했다.


“아서 경은 못 듣습니다.”

“…….”

“오러는 없어요. 아서 경은 당신 몸에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오러를 쓰지 않으니까.”

“…….”

케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뭔지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우리한텐 낯선데, 나름 줄리어스에서는 유명한 신문물이더군요. 효과가 확실해서 귀족들도 꽤 많이 찾고 있는 유산약의 일종이라고.”

“…….”

“로렌슨 선생이 그 차를 화분에 버리고 화초가 다음 날 죽었던 걸 기억합니다. 몸에 좋은 약차라면서 왜 순식간에 그렇게 됐나 이해가 안 갔죠.”

“…….”

“앨빈 로렌슨이 가져와 당신이 매일 마셨던 게 검붉은 물, 맞습니까?”

“…….”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케이가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짚었다.


“……젠장, 왜 진작 말 안 했습니까.”

“…….”

“당신은 아서 경이랑 잠자리하고 있지도 않았잖아요. 그런데 왜.”

“…….”

케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서 경한테 말하지 마세요. ……그걸 알면 아서 경은 줄리어스와의 동맹을 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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