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내 것
(192/210)
191. 내 것
(192/210)
#191. 내 것
2023.06.29.
“…….”
트리스탄이 아서에게 다가가 작게 귓속말을 전했다.
레이나에게 마틸다와 크리스티나가 찾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아서는 표정에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앞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
아서는 군무회의에 불려와 황제가 보낸 근위기사단장과 궁정백, 몇몇 백작과 남작을 포함한 귀족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으로 황태자와 함께 궁정의 보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아서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서가 작게 눈짓하며 물었다.
‘케이는.’
‘외무 회의에서 살리아의 대사와 콴 왕자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라이아네 공주의 시녀 일로…….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그쪽도 빠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아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그는 침착해 보였지만, 트리스탄은 자신이 다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서는 황제의 근위 기사단장이 황태자를 꼬투리 잡고 있었고 그 도구로 아서를 쓰고 있었으며, 궁정백은 황태자에게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황제의 의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서의 기사들은 같은 전우인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평가하는 도구로 아서와 자신들이 이용당하고 있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리오넬 경과 제가 가겠습니다.’
“…….”
아서가 작게 끄덕이고 트리스탄을 내보냈다.
* * *
“……네?”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선물이라고.”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레이나의 뒤로 하녀들이 드레스들을 들고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앞에는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다섯이나 서 있었고, 하녀 몇이 붙어 그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가볍게 팔짱을 끼고 드레스들을 평가하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와 내가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남자들은 이런 걸 모르니까.”
레이나가 당황해서 가슴 앞에서 손가락을 쥔 채 더듬거렸다.
“아……. 감사해요. 하, 하지만 케이 경의 누이이신 이사벨 님이 도와주고 계시긴 하세요. 드레스도 같이 봐 주시고 조언해 주셔서…… 거의 준비를 마쳤어요.”
크리스티나의 눈이 비웃듯이 찌푸려졌다.
“기사의 누이에게 도움받고 있다고? ‘이사벨 님’이라니 참 공손하게도 부르는구나. 그 안목을 어떻게 믿고.”
포드 백작가는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뼈대 있는 귀족 집안이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몰라도, 크리스티나가 모를 리 없었다.
레이나는 크리스티나가 케이의 이름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더듬더듬 덧붙였다.
“케이 ‘포드’ 경이세요. 이사벨 님은 포드 백작가의 장녀이시고요.”
크리스티나는 딱히 몰랐다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표정만 좀 가볍게 풀었다.
“아, 그래? 그러면 그나마 나쁘지는 않게 느껴지는구나. 그래도 썩 그림이 좋진 않아.”
크리스티나가 레이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네킹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네가 고아도 아닌데 어머니가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아서 보좌관의 누이에게 신세 진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잖니. 대모님이라도 계시면 모를까, 대모님도 교황 성하를 뵈러 가서 안 계신데.”
“…….”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레이나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
크리스티나는 마네킹이 입은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레이나를 보지 않은 채 피식하고 미소를 지었다.
긴장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레이나는 제법 침착하게 예쁘고, 그럴싸한 자태가 나오고 있었다.
곧게 등을 편 자세.
손등을 단정하게 겹쳐 포갠 하녀의 모습이 아닌, 귀족처럼 가슴 앞에 살짝 올려 끝만 맞잡은 손.
재떨이를 맞고 피가 뚝뚝 흘러도 곧바로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던 그 성실한 모습이,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빠릿빠릿한 기질이.
이렇게 상황에 맞게 발전하여 딴사람처럼 바뀐 것이 기분 좋았다.
그 간극이 크리스티나만 알고 있던 그녀의 가치를 더 증명하는 것 같았다.
왠지 그 모습을 허둥지둥하게 망가뜨리고 얼굴 붉히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언제나 레이나에게 그런 충동을 느꼈다.
레이나에게 과분하리만치 잘해 주며 그 애가 당황하며 고마워하고 말 더듬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던져 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며 괴롭히고 싶기도 했다.
거친 장난에 험한 꼴이 되어도 나만 바라보는 아이는 귀여웠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을 구해줄 건 크리스티나뿐이라는 듯이 저에게 구원을 바라는 눈빛이 되는 레이나를 더,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것이 오늘 굳이 어머니를 데리고 방문한 이유이기도 했다.
제 괴롭힘을 감당하면서도 언제나 크리스티나 외에는 나를 이 저택에서 머물게 해 줄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어린 새끼오리처럼 저만 바라보던 레이나였다.
자라나며 그런 모습들은 하녀의 순종적 표정 아래 감추어졌지만,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레이나의 안에 그때의 그녀가 남아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의하지 않은 혼인이 결정되었던 날.
당장 혼인해야 한다는 소식에 있는 대로 독이 오른 제게 뺨을 맞고서도 자신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아버지 앞에 뛰어들어 대신 그걸 맞고.
나 대신 그 이름 모를 기사와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서 처음 보는 남자와 초야를 치르고, 결혼해 저택을 떠나겠다는 꿈 같은 건 포기하고서도.
원망은커녕 어떤 생색도 낼 줄 모르는 무심하면서도 사심 없는 그 모습.
오 년이 지난 후 옛날의 그 자리에 내가 던진 재떨이를 다시 맞아도,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빗겨주고, ‘걱정 마세요.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었어요.’라며 다시 순진한 미소를 짓고 그이가 좋은 배우자가 되어 줄 거라고 나를 달래는 아이.
크리스티나는 레이나만은 언제까지고 자신의 곁에 둘 생각이었다.
“…….”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레이나를 정말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뭐, 상관없겠지.
언제 자신이 변덕을 부릴까 노심초사하는 레이나의 조마조마한 얼굴이 더 좋으니 딱히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입어보렴.”
레이나가 어색하게 애써 입을 떼었다.
“……저, 아가씨.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방금 드레스 디자이너가 다녀갔어요……. 마지막 가봉도 마쳐서 드레스 준비는 이미 다…….”
크리스티나는 무심히 미소 지었다.
“그래? 좀 전에 갔다니 아쉽구나. 네가 고른 드레스를 내가 봐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
레이나가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선물한 드레스도 몇 벌 정도는 입어 주렴.”
“…….”
레이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크리스티나가 흘깃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냉랭한 목소리가 나갔다.
“맘에 안 들면 버려도 되고.”
레이나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아가씨.”
크리스티나가 피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안 하녀들이 입이 무겁다지만, 좀 더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어떨까?”
“……네?”
“이름 불러야지. 내 쪽이 동생이 되기로 했잖아.”
레이나는 다시 크리스티나가 좋아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직접적으로 당황하고 기가 죽은 공손한 얼굴도 좋았지만.
멋지게 다듬어진 레이디의 절제된 모습 속에 이렇게 채 감추지 못한 당혹감이 투명하게 배어 나오는 것도 좋았다.
그녀의 안에 있는 자신의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역시 난 레이나가 좋아.
아서도 마음에 들지만, 레이나를 평생 곁에 둔다는 게 더 마음에 들어.
“…….”
후작 부인 마틸다가 레이나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데뷔탕트에서 실수 없도록 해라, ‘크리스티나.’”
레이나가 순간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비슷한 말을 불과 몇 달 전 들은 적이 있지만, 어조가 사뭇 달랐다.
후작 부인이 부드럽게 체념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너야 이미 결혼한 몸이니 어떻게 해도 너의 미래는 밝게 정해져 있고, 상관이 없겠지만……. 그동안 네가 사교계에 소문만 흘리고 두문불출했던 만큼, 이번 데뷔탕트와 사교 파티에서 네가 보여주는 처신에 ‘줄리어스’의 평판이 좌우될 거다.”
마틸다는 다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율리아나를 위해서라도 네가 잘해 주어야 동생 앞길이 창창하게 열릴 거라는 점을 생각해 주렴. 너만 결혼을 잘했다고 동생을 나 몰라라 할 건 아니지?”
마틸다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레이나를 응시했다.
“…….”
내게 보이는 모습과 아서와 기사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 달랐다, 이거지?
아주 똑똑하게 굴었어?
이 앙큼한 불여우 같은 것.
제 어머니가 누군지 정체를 숨기고 저택에서 10년 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
마틸다는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배신감을 억눌렀다.
아서에게 첩자 일을 들켜서 어떻게 할 수 없게 됐다고?
내가 그것에 속았지.
그렇게 첩자 일을 하다가 걸렸다면 아서가 얘를 선택했을 리가 없잖아.
황후의 말을 그대로 믿진 않았다.
하지만 레이나가 그 자리를 꿰차고 그 애의 정체가 드러나고 보니 아차 싶었고, 자신이 간과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부 계획적이었던 거야.
순진한 척하고 들어와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도 언젠가 소송 따윌 제기해 우리 가문을 뒤집어엎을 생각이었겠지.
그러다가 크리스티나의 자리를 뺏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니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순진한 척하다니.
마틸다는 레이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퍽이나 다정하게 나왔다.
“앞으로 내가 신경을 써 주려고 한다. 그동안 나도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어쩌겠니. 결국 네가 잘 되어야 자매가 다 잘 되는 것을.”
내게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척하며, 나와 크리스티나, 아서 사이에서 여우짓을 하다니.
불쌍한 척 아서를 꼬드겨서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하겠다 이거지.
그걸 그대로 둘 줄 알아?
마틸다는 한껏 다정한 미소를 꾸며내 보였다.
너만 그런 일을 할 줄 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너무 두 딸 중 하나만 챙긴 것 같아서. 이제 너의 둘 모두를 위해서 내가 신경을 좀 쓰려고 한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
후작 부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렇게 얼어 있지 말고, 받아주련?”
“…….”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알게 된 레이나가 치맛자락을 쥐고 침착하고 공손하게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
후작 부인 마틸다의 속내를 훤히 알 수 있었지만, 어차피 레이나가 원하는 것도 하나뿐이었다.
“…….”
레이나는 마틸다가 황후에게 보고를 했을 거라는 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 귄터 베인. 줄리어스.
그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
병사들, 그리고 하녀들…….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레이나가 긴장한 내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