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 데뷔탕트 (1) (196/210)


#195. 데뷔탕트 (1)
2023.07.13.



 
오 년 만에 열리는 공식 데뷔탕트 알현의 날이 다가왔다.

본래 17세에서 18세의 성년이 된 귀족 레이디들과 갓 혼인한 레이디들의 황제 부부 알현으로 시작되는 데뷔탕트는 매년 열리는 행사였다.

하지만 자숙하고 추모해야 하는 일이나 황실의 사정이 있을 때는 한 해를 거르는 일이 드물게 있었다.

그런 경우엔 이듬해에 이 년 동안 성년이 된 레이디들이 함께 데뷔탕트를 치렀기에 알현의 날에 평년보다 많은 인파가 몰리곤 했다.

전 제국민이 사랑하는 왕자님이었던 황태자 카일이 국가를 위해 오 년 전 전쟁에 출정한 것은 충분히 데뷔탕트를 일 년 정도 미룰 만한 납득할 수 있는 사유였다.

어차피 귀족의 금혼령도 있었으니 데뷔탕트가 급하지 않았고, 당시에는 모두가 전쟁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 일이었다.

국가를 위해 전쟁의 의무에 나간 귀족 남성들을 위해, 그리고 조금쯤은 황태자비를 선발하기 위해 데뷔탕트와 혼인을 자제하자는 명령은 꽤 명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전쟁과 관련해 가혹한 비보가 이어지며 데뷔탕트는 한 해, 한 해씩 계속해서 미루어졌다.

전쟁 3년 차까지는 패전과 막대한 사상자 소식이 이어졌기에 그랬고, 그다음에는 아서의 활약으로 희망적인 소식들이 전해지며 전쟁이 정말로 곧 끝날 것 같았기에 사람들은 기대가 어린 기다림을 조금 더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4년 차에 아서와 별개로 분리된 군을 운용하던 황태자 카일이 판단 실수로 크게 패전하며 적국의 포로가 되고, 다시 일 년 더.

계속해서 승전고를 울리는 아서와 달리 능력을 의심받으며 카일의 평판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황태자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혼인 적령기의 레이디들이 나이를 먹고 있다며 데뷔탕트를 독촉하거나 금혼령을 해제해 달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귀족은 없었다.

황태자가 포함된 포로 교환 협상이 결렬되고, 5년 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황실을 독촉하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기다렸다.

그리고 격전 끝에 아서가 카일을 구출해낸 뒤,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끌고 적군 왕족들을 평화 협정의 볼모로 삼아 돌아왔다.

드디어 귀족들은 기다리던 이 모든 일들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몹시도 기뻐하며, 다급하게.

5년 만에 열리는 데뷔탕트였다.

적잖은 사람들이 몰릴 거라는 점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황궁에 긴 줄이 늘어섰다.

본래 알현의 허락에는 더 엄한 기준을 적용했지만, 황실은 긴 전쟁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지지를 다시 얻고자 준귀족과 기사, 법조계와 부유층 젠트리 등 더 많은 가문의 레이디들에게 알현의 기회를 열어 주며 데뷔탕트 참여의 기준을 낮추었다.


“엄마, 저 깃털 하나만 사주시면 안 돼요? 저기 여자분들은 다 모자에 깃털을 세 개 달았는데 저는 깃털이 두 개 밖에―.”

“미혼은 원래 두 개만 다는 거야. 저분들은 결혼하신 분들이니까 세 개 단 거고. 봐. 네 또래 아가씨들은 다 두 개잖아.”

“아.”

“의상은 엄마가 다 알아서 했으니까 너는 걱정 말고 꽃이랑 치맛자락 조심히 들어. 들어갔다가 인사하고 나오는 순서 잘 기억하고 있지?”

“네! 그럼요!”

꼬마 레이디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은, “아이참……. 들어가기 전에 꽃이 다 시들겠네. 어쩌지.” 하면서 계속 주변 레이디들과 꽃 파는 상인들을 흘긋거렸다.

루모스 상단의 딸 에리카는 겉으로는 우아하고 상냥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론 짜증이 나서 앞에 선 어린 레이디와 그 보호자를 외면했다.

사람이 많을 것은 예상했기에 그들도 상당히 빨리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해가 뜨기도 전에 황궁 밖 광장까지 줄이 길게 늘어선 후였다.


‘기준을 낮춰도 너무 낮춘 거 아냐?’

본래 이전의 데뷔탕트 알현의 날 참석 기준에 따르면 ‘상인’은 알현 허락을 받을 수 없었지만, 가문이 별다른 평판 나쁜 사고를 치지 않았고 그 자신이 상업에 종사하지 않은 레이디라면 참석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에리카는 상단 일에 욕심을 부리지 않은 채 오빠에게 상단의 전권을 맡기고 상업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문에 돈은 충분하니, 괜찮은 작위나 명예가 있는 남편을 얻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평판이 좋은 귀족 출신 가정교사를 구해 오랫동안 상류층 문화와 에티켓을 배우고, 귀족들과 연을 만들기 위해 시간도 돈도 오랫동안 들였다.

5년 동안 사교모임이 금지되고 조바심이 나도 귀족처럼 고고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부유한 젠트리 가문의 영애로서 데뷔탕트에 참석할 자격을 얻으려고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기준이 너그러워져 이런 기본도 안 된 사람들이랑 나란히 알현을 하려고 줄을 서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더 요령을 부리며 사교 교류를 하고, 상단 일에도…….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우선 입장 특권이 있을 테니 이런 줄 따위 서지도 않겠지.

황실은 알현의 날에 참가하는 데뷔탕트의 레이디들이 많을 것을 고려해 3일 동안 알현의 날을 열겠다고 했지만, 각별히 지위가 높은 레이디들이나 높은 귀족의 부인들은 우선 입장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는 선착순이었기에 특권이 없는 레이디들도 대부분이 첫날, 빠른 순서로 인사를 올리고 싶어 했다.

자연스럽게 첫날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결과적으로 황궁 앞에는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들과 그들의 샤프롱, 보호자들, 구경꾼들과 상인들, 기자들의 줄이 길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들을 상대로 레이디들이 손에 든 시든 꽃을 싱싱한 꽃으로 바꿔 주겠다며 꽃을 파는 사람들과, 데뷔탕트의 날을 그림으로 남겨 주겠다며 접근하는 거리의 화가들.

온갖 편의 물품을 파는 상인들, 드레스나 쥬얼리 숍을 홍보하려는 호객꾼들이 몰려들어 황궁 앞은 시장판처럼 시끌시끌해졌다.

그 모습을 기록하는 기자들과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워하는 순수한 구경꾼들도 거리에 가득했다.

그들 앞에서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꼴이라니.

5년 동안이나 기다려 이런 ‘알현의 날’을 상상한 건 아니었으니 힘들고 짜증이 났다.

다그닥 다그닥.

때마침 고위 귀족의 마차 두 대가 줄을 서 있는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우선 입장의 특권을 가진 귀족의 수는 많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누구의 마차가 지나가는지 슬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줄리어스다, 줄리어스.”

사람들의 목소리에 시선을 주지 않고 우아하게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대부분 마차를 바라보았다.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서 소곤소곤 떠드는 구경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두 대네?”

“하나는 그, 하녀 손에 컸다는 동생이겠네. 하나는 레이디 크리스티나고…….”

“같이 안 타고? 뭐 자매가 자주 만나고 우애가 두텁다더니.”

“따로 살잖아. 동생은 후작 저에 후작 내외랑 살고, 언니는 결혼해서 아서 경이랑 살고. 각자 집에서 나와서 만났나 봐. 후작가에서 레이디 크리스티나 쪽에 가문 마차를 보내준 모양이네. ……그나저나 마차가 엄청 좋구만.”

후작은 레이나에게 그들이 탄 것과 같은 마차를 보냈다.

아서의 에스코트를 받을 레이나가 탄 마차가 ‘줄리어스 후작가’의 문장을 달고 있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함께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줄리어스 후작은 결코 아서와의 연을 강조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


“출가외인이어도 레이디 크리스티나쯤 되니 가문이 살뜰히 잘 챙겨 주네. 괜찮은 가문이야.”

“둘째 딸은 횡재네……. 평생 자기가 하녀인 줄 알고 살았다가 하루아침에 아서 경의 처제가 된 거 아냐. 그쪽은 누구랑 결혼할까?”

“하녀 손에 컸다던데 괜찮은 남편감을 구할 수 있을까?”

“그래도 줄리어스의 사위가 되겠다는 기사는 널렸을걸. 시원찮으면 아서 경이 어련히 괜찮은 기사를 소개해 주지 않겠어?”

“…….”

지나치게 뚫어져라 줄리어스의 마차를 바라보았는지, 에리카의 샤프롱이 우아하게 말을 걸어 주의를 돌렸다.


“레이디 에리카. 피곤하죠?”

에리카는 질투 어린 표정을 감추며 얼른 상냥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부인. 부인께서 저 때문에 고생이시네요. 좀 더 빨리 나올 걸 그랬어요.”

“전 괜찮아요. 레이디 에리카가 평생 한 번뿐인 데뷔탕트인데 혹시라도 서운할까 걱정이지. 그래도 지나고 나면 좋은 기억만 남을 거예요.”

에리카가 방긋 웃었다.


“물론이죠. 즐기고 있어요.”

줄리어스에 관해 돌고 있는 소문들을 떠올리며, 에리카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를 생각했다.

대화할 기회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

혹시라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한마디 우아하게 돌려 쏘아붙여 줄 방법이 없을까.

나는 확실히 그녀의 실체를 알고 있는데 말이야.

아서 경 앞에서 옛날 일을 꺼내면 사과할까? 시치미를 뗄까?

난처해할까?

에리카는 요즘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실체를 아서 경 앞에 슬그머니 드러내 물 먹여 줄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오빠한테 크리스티나에 대해 말해달라며 그렇게나 달라붙었는데 모조리 거절당했다.

‘줄리어스’가 얼마나 그런 종류의 ‘입 무거움’에 민감한지 모르냐며.


“…….”

하지만 잘난 척을 하기보다는 지레 겁먹은 것 같은 오빠의 반응을 보니 역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그 성격은 어디 안 간 게 틀림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저 ‘동생’ 쪽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그 애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실체를 알고 있겠지?

‘율리아나’라 했던가?

그녀 자신의 본의가 아니더라도 그 애가 등장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받아야 할 주목을 이만큼이나 뺏어간 상황인데.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것이 뻔해 보였다.

그럼 그 애를 만나 본다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실체에 대해 폭로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오빠한테 듣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명분도 되고 말이다.

생각만으로도 훨씬 기분이 나아져 에리카는 자신의 샤프롱에게 생글생글 웃어 주었다.

* * *

줄리어스 후작가의 문양이 박힌 두 대의 마차가 황궁의 정문에 차례로 멈추어 섰다.

마차 안에서 그녀의 드레스와 꽃을 마지막으로 살펴 정돈해 준 이사벨 포드가 레이나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미소 지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긴장되죠?”

레이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조금 그렇네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녀는 우아하고 침착하게 보였다.

이사벨 포드가 격려해 주었다.


“괜찮아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레이나가 미소 지으며 심호흡하고 바르게 어깨를 펼쳤다.


“격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레이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저쪽에서 크리스티나도 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황궁 안에서부터는 보호자들은 제외하고 당사자인 레이디들만 올려보내라는 지시가 있었다.

크리스티나와 레이나가 서로 눈인사를 하고 궁정 하인의 앞에 다가가 자신의 초대장을 건넸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그들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알현을 위해 줄을 선 귀족들은 쉽게 놀란 소리를 내거나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았지만 줄 선 사람들이 소곤대는 소리를 낮추며 조용해졌다는 점이 더 긴장감을 높였다.

황궁의 풋맨이 황태자가 친히 써 준 데뷔탕트의 초대장을 공손히 받아들고 궁정 하인을 통해 안쪽에 우선 입장 특권을 가진 레이디들이 도착했음을 전달했다.

기다리는 사이, 마차 안의 후작이 혀를 차며 황실이 점점 더 많은 레이디들에게 데뷔탕트의 알현을 허락해 너무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불평했다.

곧 황궁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서가 마중을 나왔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크리스티나’인가 내심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앞에서 아서가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아서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에스코트하는 손을 내밀었다.


“…….”

아서는 황제의 부름으로 황궁에 자주 출입하며 얼굴이 알려진 상태였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황궁에서 저런 옷차림에 저렇게 많은 훈장을 달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서가 친히 에스코트하는 레이디인 것을 보고 모두가 그녀가 레이디 크리스티나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레이나는 긴장한 채 그를 올려다보고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오 년 전, 크리스티나로 속이고 그의 앞에 결혼하러 나갔던 때보다 긴장되는 것 같았다.

이사벨 앞에선 내내 침착하던 레이나의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이런 방식으로 모두가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상태에서 집중된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공식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자나 베일 없이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

이젠 진짜 돌이킬 수 없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로 사는 일…….

레이나의 손이 차가워졌다.

아서가 엄지로 살짝 그녀의 손등을 쓸었다.

레이나가 바라보자 아서가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눈썹을 살짝 으쓱하고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어 주었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웃음 지었다.


 
말 한마디 없었는데도 그 모습이 더없이 달콤해 보여, 알현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언니.”

“……으, 응.”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슥 끼어들어 둘만의 사이를 깨뜨렸다.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올라가자. 위엔 아가씨들만 가는 거래.”

크리스티나가 사뭇 친근한 태도로 레이나의 반대쪽 팔을 감았다.

그리고 아서에게 말을 걸었다.


“아서 경. 같이 가실 거예요?”

레이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다녀올게요, 아서 경.”

“…….”

아서가 짧게 그녀를 바라보다, 웃으며 보내주었다.


“위에서 봐요. 부인.”

 

* * *

그들은 알현실로 올라갔다.

레이나는 ‘아서의 부인’으로서.

크리스티나는 줄리어스 후작가의 ‘두 번째 영애’로서.

이름을 바꾼 채.

궁정 하인의 목소리가 황궁 복도에 울렸다.



「아서 줄리어스의 레이디. 레이디 크리스티나께서 드십니다.」



「줄리어스 후작 영애, 레이디 율리아나께서 드십니다.」

 
덜컹.

문지기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데뷔탕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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