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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데뷔탕트 (5) (200/210)


#199. 데뷔탕트 (5)
2023.07.27.


레이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고 작게 목소리를 낮추어 마틸다에게 속삭였다.


“……어머니.”

마틸다가 기분 나쁜 눈빛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율리아나의 사정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시려는 거죠? 오해나 쓸데없는 뜬소문을 잠재우시려고요.”

“…….”

아니꼬웠지만 보는 눈이 많은 사원 한복판에서 아웅다웅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사교계의 먹잇감이 될 생각은 없었다.

마틸다는 불쾌한 마음을 감추고 웃으며 우아한 어머니답게 말했다.


“그래, 너는 바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너에 대한 기사는 이미 무척이나 충분하기도 하고.”

“…….”

그리고 그녀의 팔을 먼지 털어주듯 토닥였다.


“동생한테도 기회를 주어야지? 안 그래도 네가 율리아나를 질투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라도 나올까 봐 신경이 쓰이는데.”

“…….”

여기서 인터뷰는 최대한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말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거야.

레이나는 마틸다가 무엇을 고깝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고 있었기에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신 것 같아요.”

마틸다가 눈썹을 찌푸리듯 움찔했다.

레이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크리스티나를 바라본 뒤 마틸다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제국 소식지’에만 기회를 주면 너무 칭찬하는 기자만 부른 걸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많은 기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건 어떠세요?”

“…….”

레이나는 자신의 제안이 건방지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했다.


“저도 좀 알아봤는데, 선제후나 명망 있는 고위 귀족의 소식만 싣는 신문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

이건 솔깃했는지, 마틸다의 눈빛에 한 줄기 빛이 지나갔다.

레이나는 말을 이었다.


“중요한 소식을 처음 다뤄주는 곳은 신문사도 중요하지 않나 해서요. 사실 그런 곳은 콧대가 높아서 연락받기는 쉽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무슨 귀족 클럽을 운영하시는 백작님이 품위 있게 관리하신다고 해서 저도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

마틸다가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짚이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가 초대했지만 부실 보급 기사가 터졌을 때 그를 바람맞혔던 귀족 승마 클럽의 장이 신문사도 하나 관리하고 있지 않았나……?


“……하먼 백작의 신문사 말이니?”

레이나가 살짝 입을 가리며 놀라워했다.


“맞는 것 같아요. 거기서 연락을 받으신 거예요?”

“……흠.”

부채를 들어 입가를 가리는 후작 부인의 얼굴에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의 눈엔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생각하는 낌새가 어렸다.


“…….”

레이나는 대답해 주지 않고 말수가 적어진 후작 부인을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됐다. 관심을 끌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후작 부인이 다른 신문사를 알아보고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제국 소식지’보다는 그런 쪽의 평판이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조금의 시간만 벌 수 있다면, 그다음엔 케이 경이랑 상의하거나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설득할 수 있을 거야.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팔짱을 꼈다.


“역시 우리 언니는 세심해. 어머니, 언니 이야기대로 해요.”

“엄마가 알아서 하마.”

후작 부인은 쌀쌀맞게 말했지만 크리스티나에게는 훨씬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계단을 내려가며 레이나는 긴장한 상태로 크리스티나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크리스티나가 신경 줄이 굵고 짓궂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그 순간, 옆에서 저희들끼리 속삭이던 하녀가 고개를 들고 크리스티나에게 물었다.


“저, 아가씨. 그 진주 귀걸이……. 아가씨께서 루모스에서 최근에 구매하신 거 아닌가요? 저희도 같이 물건을 본 걸로 기억하는데…….”

레이나는 흠칫하며 계단에 멈췄다.

하녀들 옆에 있던 브로디가 당황해서 하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얘! 목소리 낮춰!”

크리스티나의 하녀는 멈추지 않은 채 묘한 시선으로 웃으며 레이나를 내려다보았다.


“큰아가씨께서 그거 자기 건데 작은아가씨가 가져가신 것 같다고…….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봐요. 이런 오해는 빨리 푸는 게 좋으니까요!”

크리스티나가 하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티나의 하녀들이 냉소적인 시선으로 레이나를 보며 웃었다.

브로디도 하녀들의 반응에서 뭔가 이상을 느끼고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후작 부인의 시선이 모두 그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힐끔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크리스티나는 그들보다 조금 늦게 따라 웃더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천천히 자기 귀로 손을 가져갔다.

똑.

크리스티나가 조그만 진주 귀걸이를 풀었다.


“언니가 원한다면 물론 양보해 줄 수 있지.”

똑.


“하지만 이건 내가 산 거야. 내가 언니 걸 가져갔다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고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그대로 귀걸이를 한 손에 모아서 레이나에게 내밀었다.

크리스티나는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언니 걸 욕심내지 않아. 알잖아…….”

그리고 덧붙였다.


“다른 사람이 쓰던 걸 쓰지도 않고.”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레이나도 순간적으로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디자인이었지만, 다른 귀걸이였다.

레이나가 당황해서 크리스티나가 내민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미사포를 쓴 채 반대편 계단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에리카 루모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진주 귀걸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진주 귀걸이가 없을 리도 없는데 자매랑 귀걸이 하나를 가지고 다툼을?

두 자매의 얼굴은 제각기 쓴 미사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와 하녀들이 한 말은 공기에 실려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은 듯 시간차를 두고 시선이 모였다.

모두가 그들이 크리스티나 자매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생 쪽이 얌전히 자기가 한 귀걸이를 빼서 언니에게 건네며 언니 걸 가져간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

쿵. 쿵.

레이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이건 그냥 짓궂은 거랑 달라…….

크리스티나 아가씨는…….

브로디가 큰 소리를 내며 황급히 나섰다.


“어머! 제가 착각을 했어요.”

그러고는 얼른 레이나 앞으로 끼어들어 와 크리스티나의 내민 손을 고이 잡아 그녀의 가슴 쪽으로 밀어주었다.


“아이고, 죄송해요, 아가씨!”

그리고 너무 난처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큰아가씨가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당연히 그런 오해는 안 하시죠!”

“…….”

브로디가 헤헤 웃자 분위기가 풀어졌다.


“모양이 비슷하길래 제가 혹시 그거냐고 물어본 건데, 얘가 큰아가씨가 하신 말씀인 줄 잘못 알아들었나 봐요.”

브로디가 재빨리 수습하자 레이나를 냉소하던 하녀들은 입을 다물었다.


“제 실수! 죄송해요, 아가씨!”

브로디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강조했다.


“…….”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그렇구나.”

분위기가 이상하던 하녀들도 더 말을 보태지 않았고, 이상한 시선을 보내던 후작 부인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힐끔거리던 시선도 점점 무관심해졌다.


“…….”

레이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피가 차갑게 식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뭘 하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이 뭘 착각했는지도.

아가씨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도…….

그 순간.

눈을 깜박이자 순간적으로 눈앞에 잔상이 보였다.

레이나는 숨을 멈추었다.


[…….]

아서가 낯익은 보석함에서 레이나의 귀걸이를 꺼내 들었다.


[……이건 당신 게 아닐 텐데.]

뒤에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바라보았다.


[……그래요? 아. 레이나 건가 보네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무심히 말했다.


[내가 실수로 담아 왔나 보군요. 레이나는 별말 않던데. 가져가세요.]

[…….]

아서는 그걸 그대로 손수건으로 감싸 옆에 서 있던 케이에게 넘겼다.


[독이 발렸는지 검사해.]

[……?]

아서는 진지한 얼굴이 아니었다.

농담이라도 하는 것 같은 평이한 태도였다.


[…….]

그리고 아서는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건너편 테이블에 앉았다.

곁에 따라 앉은 남자는 레이나도 두어 번 본 적이 있는 아서의 변호사였다.


“…….”

이건…….

레이나는 난간을 짚으며 멍하니 걸음을 멈추었다.


“…….”

반려에게 생긴다는 오러 능력?

조금 전에 스쳐간 그 장면을 좀 더 보고 싶어 눈도 꾹 감았다 떠 보고 정신도 어딘지 모를 곳에 집중해 봤지만, 더 이상 잔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 * *

주교를 만나 선제후 임명식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받는 후작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고, 후작 부인 역시 그랬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도 태평했다.


“…….”

레이나는 아서 곁에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레이나는 아서의 손을 끌고 구석진 곳으로 가서 물었다.


“아서.”

“…….”

레이나의 표정이 다급하고 불안한 것을 보고, 아서가 신중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레이나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제 진주 귀걸이……, 당신한테 있어요?”

“…….”

아서가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가,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말했나?”

“…….”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나한테는 아니고, 케이한테. 그런데, 부인.”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 여자가 내가 선물한 당신 귀걸이를 가지고 있었던 거야?”

“…….”

레이나가 꾹 눈을 감았다.

그게 그럼 내 착각이나 순간적 망상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이 맞는 것이다.

처음 겪었을 땐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오러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건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나에게 능력이 생긴 거야.

레이나가 입을 열기 전에 확인했다.


“지금 주변에 우리 이야기 들을 수 있는 사람 없는지 확인해 주세요.”

“…….”

아서가 오러를 일으켰다.

레이나는 그것을 바람으로 느꼈다.


“…….”

“없어. 당신이랑 나뿐이야. 말해.”

레이나가 말했다.


“저한테 무슨 오러하고 관련된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원인은 모르겠는데 저한테 가끔 당신한테 있었던 일이 보여요.”

“……뭐?”

“그보다 지금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레이나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제 귀걸이를 찾으셨던 그날.”

“……단둘이 만난 거 아니야. 케이도 있었고 변호사도 있었어. 계약 때문에 협상할 게 있어서…….”

레이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알아요, 봤으니까요. 당신이 귀걸이에 독이 묻었는지 검사하라고 손수건으로 감싸서 케이 경에게 주는 모습까지 봤어요.”

“…….”

레이나가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가씨는 저희가 바뀐 걸 반드시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걸로 저흴 쥐고 흔들려고 해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으니까. 제가 줄리어스의 약점이 아니라 당신에게 더 큰 약점이 됐으니까…….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

“진흙탕 싸움이 되면 이젠 당신이 무조건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게 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이걸 생각 못 했을까.

레이나가 자책하는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전 줄리어스가 저를 가짜 신부로 보냈던 게, 줄리어스 가문이 흔들릴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줄리어스랑 당신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협조적으로 함께 숨겨 줄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

“아서 경이 저를 선택했고, 아가씨를 하녀 출신 동생으로 바꿔치기했고, 황실과 사람들 앞에 거짓말을 하면서 절 소개까지 해 버렸잖아요. 그럼 이제 줄리어스가 황실과 아서 경을 기만했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 거잖아요. 줄리어스는 당신이…… 줄리어스의 피를 가지고 있는 먼 사생아를 데려와서 강요했다고 주장할 텐데.”

“…….”

아서가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가씨를 만난 건가요?”

“…….”

“이러면 당신한테 내가…….”

아서가 레이나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허리를 감게 하고 웃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하든 여기까지는 왔어야 해서.”

레이나가 탄식처럼 한숨을 뱉었다.


“제가 당신 약점이 됐잖아요…….”

“당신은 내 약점이 아니야. 내 목적지지.”

아서가 웃으며 레이나의 이마에 살짝 입 맞췄다.


“나머지는 들어가서 얘기하자. 나도 당신한테 들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가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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