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데뷔탕트 (6)
(201/210)
200. 데뷔탕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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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데뷔탕트 (6)
2023.07.30.
돌아오는 마차에서 얼굴이 붉어진 브로디가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곤란해지신 거 아니에요?”
“아니야, 고마워. 네가 나서 준 덕분에 잘 넘겼어.”
레이나는 웃었지만 브로디의 얼굴은 속상해 보였다.
브로디도 이런 일을 능숙하게 하던 아이가 아니라서 놀라고 당황한 것 같았고, 그런데도 수습하려고 나서 준 것이 더 고마웠다.
브로디가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눈을 내놓고 마차 구석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하녀 애들 분위기가 이상해요. 뭔가…… 아가씨를 안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브로디의 말에 레이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날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상황도 이상하게 보이는 데다가, 내가 그렇게 하녀들에게 신뢰가 가는 동료도 아니었을 테니까…….
아무리 그들이 비밀을 지키는 데에 익숙하고 입이 무거워도, 모시던 아가씨가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 갑자기 오늘부턴 이 하녀가 크리스티나 아가씨고, 저쪽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면.
누가 봐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고 수상하게 보일 것이다.
후작가가 대외적으로 해명한 대로라면 이쪽이 되찾은 작은딸인 율리아나, 저쪽이 큰딸 크리스티나인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하녀들이 보기엔 그 둘이 바뀐 것이고, 제대로 된 설명도 못 들었을 것이다.
브로디는 결혼을 거부하는 크리스티나 대신 레이나가 보내졌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지만, 다른 하녀들이 보기에는 아가씨 자리를 차지한 하녀와, 그걸 입 다물고 있는 후작 가문이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후작가가 나에게 유리하게 해명해줬을 리 없으니 어떤 오해를 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요즘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하녀들에게 무척 잘해 주고, 평판이 좋다고 하니까.
“…….”
브로디가 손가락 사이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하녀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그 정도로 인망 없는 편은 아니었는데요?”
“……응?”
“…….”
브로디가 말했다.
“좋은 동료는 꾀부리지 않고 자기 일을 잘해 주는 하녀지 저한테 비밀이 없는 하녀가 아닌걸요.”
브로디가 입술을 비죽였다.
“아가씨가 친해지기 어렵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볼 때 벽을 좀 세운다고 하녀들이 아가씨를 싫어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오해라고요.”
“…….”
레이나는 브로디가 자기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브로디, 넌 착해서 모르는 거야. 네 생각보다 나를 싫어하는 애들이 조금 더 있었어. 나도 살갑지 못했으니 이해가 가고…….”
“에이.”
브로디가 손을 내저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오는 애들한테 슬쩍 뒷걸음치고 빼시는 거야 뭐 다 알죠. 그러니까 서먹했던 거지 싫어서는 아니었을걸요.”
“…….”
“물론 별것도 아닌데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기분 상해하거나 콧대 높다고 질투하는 애들이 있기는 했죠. 그래도 평소에 친한 척하면서 막상 힘들 때 일 미루는 애들보다는,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도와주는 아가씨가 더 의지가 되는 동료였어요.”
“…….”
브로디가 손으로 마차 의자를 짚은 채 시선을 내리고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누가 아프면 그 애 몫까지 슬쩍 도와주시고, 하녀들 곤란해지지 않게 비밀 지켜주시고. 그러신 거 아는 애들은 알아요. 그리고 설령 진짜 싫어하는 애들이 좀 있었으면 어때요.”
브로디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후작 저택을 돌보는 하녀가 삼백 명인데 어떻게 삼백 명이랑 다 좋겠어요? 열 사람만 모여도 한두 명 정돈 날 싫어할 수 있는 건데. 저도 그런걸요?”
“…….”
다시 브로디는 추리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상해요. 걔들은 딱히 아가씨를 엄청 싫어하는 무리가 아니었는데. 공격적이지 않아요? 그런다고 자기들이 후작님 딸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아가씨한테 왜 그러죠?”
“…….”
레이나는 생각에 잠겼다.
* * *
아서는 케이에게 들렀다가 조금 늦게 돌아왔다.
그는 작은 쇼핑백에 뭔가를 들고 왔는데, 그가 그 안에서 꺼낸 것은 사랑스러운 금발 소녀 모양의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이었다.
“세상에. 예뻐요!”
그리고 레이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은 인형의 귀에 진주 귀걸이가 달려있었다.
“…….”
그에게 선물 받았던 귀걸이.
레이나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제 귀걸이를 하고 있네요?”
아서가 눈을 찡긋했다.
“당신이 앞으로 그 귀걸이 할 때 생각이 많아질 것 같아서. 용도를 바꿔 봤어.”
“…….”
레이나가 조금 울컥하여 웃고는 인형을 받아들었다.
내심 애태웠는데 돌아온 것을 보니 무척 반갑고 설렜다.
“……고마워요.”
“다음엔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지 마.”
“……미안해요. 나도 빨리 찾아오고 싶었어요. 아, 빼앗긴 건 아니에요. 아마 단순히 실수였을 거…….”
“…….”
아서가 짧은 틈을 두고 말했다.
“귀걸이 핀 부분은 바꿨어.”
“…….”
레이나가 입을 다물고 좀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독이 발려 있었어요?”
아서가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내가 여기서 웃고 있지 않았겠지.”
“…….”
레이나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고 상기된 얼굴을 감쌌다.
비로소 아서가 크리스티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고 당황스러워졌다.
내 앞에선 둘 다 괜찮아 보였는데.
아가씨랑 이 사람, 그렇게 신경전을 하고 있었어?
대체 왜…….
“……아가씨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독을 발랐냐니 싸움을 거는 줄 알았잖아요. 저희 줄리어스랑 평화롭게 같이 가기로 약속한 거 아니에요?”
“당신 반응을 보니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드나 보네?”
“아뇨! 그럴 리가 없는데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놀란 거죠. 유도신문 하지 마세요.”
“단순히 실수였다면 바로 정정하고 돌려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 어려웠던 거고.”
의외로 아서가 짚은 것이 날카로워서 레이나가 머뭇거렸다.
“……마님이 같이 있었어요. 마님 앞이라 말하기가 어려웠던 거지 아가씨가 어려운 건…….”
“부인, 힘들면 무리하지 않고 말하기로 했잖아.”
“…….”
아서가 손을 들어 레이나의 머리 장식을 풀었다.
“당신과 함께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를 마주하면 당신이 얼마나 긴장하는지 알 수 있어. 난 그 정도로 눈치 없지 않아. 당신이 잘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말해 주길 기다린 거지.”
“…….”
레이나가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깍지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서가 손가락 사이로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몇 번 쓸고 기다렸다.
“…….”
레이나는 섣불리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추측을 말하지 못했다.
“아가씨가 좀……. 짓궂은 데가 있긴 해요. 그런 아가씨 앞에서 아가씨인 척하는데 당연히 긴장되죠…….”
“그 여자한텐 관심 없어. 하지만 어차피 당신, 나 때문에 그 여자를 감싸는 거 아니야?”
레이나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아가씨를 감싼다고요?”
그건 마치 자신이 크리스티나를 봐주기라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아서가 미소 지었다.
“내가 당신 뜻을 따르는 건,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난 당신이 줄리어스랑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아.”
아서가 웃었다.
“독 발랐냐는 이야긴 그냥 농담이었어.”
“……아가씨는 재미없었을 것 같은데요.”
“경고이기도 했고. 그쪽도 개의치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아서가 사과하듯이 살짝 레이나의 뺨을 감싸고 가볍게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훔치고 눈을 마주 보았다.
“…….”
그리고 물었다.
“당신이 본 건? 그거에 대해서 말해 봐야 할 것 같은데.”
“…….”
레이나가 가만히 그를 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두 번 겪은 것 같아요. 눈앞에 잔상처럼 어떤 장면이 지나갔는데, 지난번엔 자고 있었고, 이번엔 깨어 있었어요.”
“…….”
“이번엔 당신이 귀걸이를 케이 경에게 맡긴 다음,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협상 테이블에 앉던 장면이었고……. 그전에는 당신이 크리스티나 아가씨에게 저희가 이름을 바꾸는 새 혼인 계약을 제안받았던 때였던 것 같아요.”
레이나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찌푸렸다.
“지난번에 봤을 땐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너무 그거에 대해 열중해 생각하다 보니 그런 꿈을 꾼 거 아닐까 했거든요.”
[법적으로야 저의 동의 없이도 떠나실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상처가 없을 순 없으시죠.]
[전 당신이랑 그 애가 상처 없이 떠날 수 있게 협조해 드릴 수 있어요.]
[제가 약속받고 싶은 건 줄리어스 가문이 ‘줄리어스의 피’로 이어지는 거예요.]
[저로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잖아요?]
“…….”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생생했다.
레이나는 천천히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당신은 시가를 태우고 있었고, 아가씨는 웃으면서 말했어요. 밤이었고…….”
“…….”
“아가씨는 저는 줄리어스의 딸이니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다른 여자는 안 된다고……. 당신은 저, 아니면 크리스티나 아가씨하고만 결혼할 수 있다고 했어요.”
“…….”
“제가 ‘릴리 아스타린’의 딸로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안토니오 줄리어스’ 쪽의 정통성을 인정하면 제가 친딸이 될 거라고 했고.”
“…….”
“그리고 아가씨가 절 여러 번 보호했고, 소중히 여긴다고 했어요……. 아가씨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후작 대부인의 저택이었던 것 같아요.”
“…….”
레이나가 아서에게 물었다.
“이거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아가씨가 당신한테 말했던 거랑 같나요?”
아서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끄덕였다.
“……정확해. 정말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군. 당신에게 반려의 능력이 생긴 게 맞는 것 같은데.”
“…….”
레이나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서의 오러가, 나를 그와 결혼했다거나, 반려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우린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의 반려라고 할 만한 뭔가를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
레이나는 어색하게 뺨을 눌렀다.
“……말하고 보니 아가씨랑 당신이 함께 있는 순간만 보게 되네요. 이게 뭔가 의미가 있는 걸까요?”
“…….”
아서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물었다.
“당신이 뭔가 감각을 움직여서 보길 원했던 모습을 찾아서 본 게 아니라, 문득 장면이 떠오른 거야?”
“네.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는걸요.”
“…….”
레이나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더 보고 싶어서 눈을 꽉 감아봤는데…… 직전에 본 장면을 열심히 생각하면서 집중해 보기도 했는데, 더는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맘대로 왔다가, 맘대로 사라졌어요.”
“…….”
레이나가 그를 보며 물었다.
“당신이 느끼는 ‘오러’랑 비슷한가요?”
“아니, 좀 다른데.”
“……그래요?”
“응.”
아서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치……. 내가 당신의 목숨의 위험을 알게 되는 감각과 비슷하게 느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