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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전남친의 여자가 말하길 (4/367)

4화. 전남친의 여자가 말하길2020.03.11.

아이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틸이 악수를 청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곧 그녀는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으며 마주 손을 잡았다. 아이니는 심지어 손조차 부드랍고 말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서 굳은살이 가득한 라틸의 손과 다른 여린 손. 웃는 모습까지 예쁘다. 무슨 의도로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첫인상 한 번 기가 막히게 매력적이었다. 라틸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니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하이신스. 너, 이런 여자와 살면서 5년간 사랑하지 않겠다고? 코웃음이 나왔다.

16551066160098.png“황녀 전하께서 갑자기 악수를 청하셔서 놀랐어요. 아이니 투르 라 다가, 황녀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녀는 손을 뗀 후에도 다시 한 번 격식에 맞춰 인사를 올렸고, 라틸은 기분이 더욱 텁텁해졌다. 인사를 마친 아이니는 잠시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라틸 역시도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그러기를 2분가량. 곧은 시선으로 라틸을 응시하던 아이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16551066160098.png“실은 황녀 전하. 두어 시간 전 전하와 하이신스 폐하께서 나눈 이야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두어 시간 전이라면 라틸이 하이신스와 재회하던 그때였다. 라틸은 생각 없이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방 안에는 라틸과 하이신스 둘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그 이야기에 관해 말한다는 거지? 하이신스가 말했을 리는 없는데?

16551066160107.png‘하이신스가, 다가 공작이 눈에 불을 켜고 자기를 감시한다더니. 그건 사실인가 보네.’

16551066160098.png“황녀 전하께서는 하이신스 폐하와 생각이 다른 듯하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라틸은 머리로는 다가 공작과 하이신스의 권력 구조를 분석하면서도, 친절한 미소를 유지하며 권했다.

16551066160107.png“말해봐요.”

16551066160098.png“전 5년 후에도 절대 폐하와 이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틸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고서, 자신보다 20㎝는 더 작아 보이는 아이니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니는 당당한 눈으로 라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16551066160107.png“부부계획을 굳이 내게 알려줄 필요는 없는데.”

라틸이 중얼거리자 아이니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16551066160098.png“하이신스 폐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이신스 폐하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16551066160107.png“!”

16551066160098.png“그 대화를 듣고 심장이 타들어 가는 줄 알았어요. 자신을 버리기 위해 결혼하려는 남자와 살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자존심이 상해서 차라리 내가 먼저 결혼을 깨버리는 건 어떨까.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단단해 보이던 아이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라틸은 ‘도대체 얘가 우리 대화를 어디서 들었을까?’ 불쾌해하던 걸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래. 과정이야 어쨌든, 아이니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끔찍한 대화였을 터였다.

16551066160098.png“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어요. 하이신스 폐하에게 가장 상처가 될 일은, 제가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게 아니거든요.”

16551066160107.png“그래요……. 유감입니다.”

16551066160098.png“아니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하기만 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황녀 전하께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몹시 화가 나실 텐데. 그렇게 말씀해주신 거니까요.”

16551066160107.png“…….”

16551066160098.png“그리고 이거. 필요하실 것 같아서. 제 단골 친구랍니다.”

꾸벅 인사한 아이니는 가지고 온 것을 건넨 후 다시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라틸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가 그녀가 건네고 간 상자를 탁자 위에 놓고 풀어보았다. 독하기로 유명한 술이었다. 황당한 기분에 라틸은 헛웃음을 짓다가 픽 웃고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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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날 밤, 라틸은 아이니가 주고 간 술을 홀짝거리며 어지러운 마음을 털어냈다. 단골 친구라더니. 확실히 효과가 좋은 술이었다. 첫 모금에 쓰라린 기분이 들더니, 두 모금에 배 한가운데가 뜨거워졌고, 세 모금에 하이신스에 대한 게 훨훨 날아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멍하니 술잔을 기울이게만 되었다.

16551066160107.png“그래…… 남자가 걔 하나냐? 아니야. 남자는 많아. 엄청나게 많다고.”

라틸은 술에 취해 중얼거리면서 연달아 술병을 홀짝거렸다.

16551066160107.png“미남이 필요해. 그놈을 잊게 해줄 아주 아주 아주 잘생긴 남자가 필요해.”

나중에는 기억이 중간중간 희미해졌다. 미남 미남 중얼거리다 보니 그런 내용의 꿈이라도 꾸는 건가, 눈앞에 정말로 잘생긴 남자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현실에서는 없을 비현실적인 얼굴이니 꿈이 분명하다고, 라틸은 술에 전 뇌로 생각했다. 꿈이라면 잡아야지. 라틸은 남자를 잡고서 무어라 말을 했고,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신이 반쯤 나간 건가. 자신이 하는 말도 남자가 하는 말도 들리지는 않았다. 이미 반쯤 의식이 사라져 있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라틸의 기억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라틸은 처음 보는 남자를 꼭 끌어안고 정원에 누워 있었다. 라틸은 완전히 얼어버렸다. 그녀에게 안겨 있는 남자는 꿈속 인물이라 착각했던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그려둔 것처럼 균형적이었고, 콧날과 턱의 선이 매력적이었다. 머리카락은 깨끗한 은색이었는데, 속눈썹까지도 은색이었다. 약간 어두운 편인 피부와 대비되는 은발과 속눈썹이 남자를 매혹적인 엘프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자의 잘난 얼굴이 아니었다.

16551066160107.png‘젠장. 얼마나 독한 술인 거야?’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다행히 둘 다 옷을 겹겹이 껴 입고 있는 걸로 보아 ‘큰 사고’를 친 것 같진 않지만, 사절단 대표로 온 황녀가 모르는 남자와 정원에서 술에 취해 잠든 것도 충분히 큰 사고였다. 같이 술을 퍼마시기라도 한 걸까? 남자에게서도 술냄새가 강하게 났다. 그때, 남자가 눈꺼풀을 움찔했다. 당장에라도 눈을 뜰 것 같았다.

16551066160107.png‘안 돼!’

라틸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라틸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혹시 그 남자, 내가 황녀라는 걸 알까? 그런데 그 남자는 어쩌다가 내 옆에 누워 있던 거지? 그쪽도 술에 취해서 뻗어 있던 건가? 그러면 상대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쪽과 달리 남자는 술에서 깨어나 라틸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라틸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16551066160107.png‘그러면 좋겠는데. 젠장. 그 남자, 대체 누구지? 뭐 하는 사람?’

남자가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라틸을 기억하더라도 함구할 것이다. 라틸이 누구인지 아예 모를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귀족이라면…….

16551066160107.png‘하이신스의 결혼식에서 마주칠 지도 몰라.’

라틸은 남자의 복식을 떠올리려 애썼다. 복장을 보면 대충 신분이 나오니까. 그러나 웬걸.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바로 몇 분 전에 본 남자가 입고 있던 옷이 기억나지 않았다. 워낙 얼굴의 존재감이 강렬하다 보니 옷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16551066160107.png‘분명 뭘 입고 있긴 했는데…….’

한참을 고민한 끝에, 라틸은 그 남자와 마주치더라도 그냥 모른 척하기로 결심했다. 추태라면 이쪽의 추태만이 아니지. 상대 역시도 함께 추태를 부린 것이지 않던가. 체면이 있다면 서로 모른 척하는 게 나을 터.

16551066160107.png‘좋아.’

결론을 낸 라틸은 서둘러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 * * 그러나 남자와의 재회는 라틸의 예상보다 더 심각하고 나쁜 방향으로 벌어졌다.

16551066160107.png‘와…… 젠장. 미치겠네.’

하이신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억지로 대연회장으로 갔는데. 그곳의 가장 상석 중 한 곳에 그 남자가 있었던 것이었다. 위치를 보자마자 라틸은 남자가 황족, 그것도 카리센의 황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남자가 하이신스의 친척일 가능성이 높단 것. 게다가 라틸과 배정받은 장소가 비슷한 걸 보니, 먼 친척뻘도 아니었다. 착각일까. 남자가 계속 이쪽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16551066226688.jpg“황녀님. 아는 자입니까? 계속 황녀님을 보고 있는데요.”

착각이 아닌가보다.

16551066160107.png“모르는 자입니다.”

라틸은 딱 잘라 거짓말했다. 내가 잘나서 보는 게 분명해. 그럴 거야. 다행히 계속 외면하고 있자 남자도 고개를 돌릴 뿐, 아는 척하진 않았다.

16551066226688.jpg“황녀님. 눈이 가자미가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고개를 돌려 보세요.”

라틸은 아까부터 자꾸 뼈를 때려대는 기사단장을 째려보고서 팩 눈을 감았다.

16551066160107.png‘안심하자. 저쪽도 날 아는 척하지 않잖아. 긴가민가 싶거나, 모르거나, 모른 척하기로 했거나 셋 중 하나야.’

  * * *

16551066226688.jpg“라트라실 발레르타인 타리움. 타리움의 황녀입니다.”

부하가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보고하자, 클라인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16551066254844.png“간이 크다 했더니. 황녀 전하셨군 그래.”

클라인의 가지런한 치아 사이에서 뿌득 소리가 났다. 황녀라는 저 여자. 분명 이쪽을 쳐다보는 걸 봤는데. 계속 모른 척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경직된 고개를 하고서, 아예 ‘난 널 무시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어제 저녁. 클라인은 술에 취해 울고 있는 기사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제복 차림의 여자 기사였는데, 그녀는 한 손에 술병을 잡고 엉엉 서글프게도 울고 있었다. 인정한다. 좋은 의도로 다가간 건 아니었다. 시끄러워서 쫓아버릴 셈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힘이 셌다. 쫓아내려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클라인은 여자가 더 술을 마셔서 취하게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좀 조용하게 잠들겠지. 게다가 자꾸만 미남 미남 중얼거리면서 우는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다.

16551066254844.png“도대체 그쪽이 말하는 미남이 누군데 그렇게 펑펑 우는 거지?”

16551066160107.png“너다.”

그런데 여자는 뜻밖에도 클라인 때문이 우는 거라 했다. 여자는 놀란 클라인의 멱살까지 잡고서 애처롭게 흐느꼈다.

16551066160107.png“하이…… 씨.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네가 날…… 흐어어엉. 당신은 누구니? 내 상처를 보듬으려고 하늘에서 오셨나요? 흐어어어!”

클라인은 인기가 없진 않았다. 황후 소생의 황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황자였고, 경국지색이란 별명이 돌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까지 타고났다. 인기가 없는 게 더 힘들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지랄 맞은 성격 탓에, 15살 이후 대놓고 구애하는 여자는 없었다. 당연히 온몸으로 좋아한다 매달리는 여자도 처음이었다. 여자는 클라인의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서 코를 훌쩍였다. 클라인은 어색하게 여자를 마주 끌어안았다. 술 냄새 사이로 익숙한 흙냄새와 풀냄새가 났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내가 좋아서 이렇게 아파하는 여자가 있었구나. 클라인은 묘한 충족감에 여자를 토닥거려 주었다. 하지만 그는 황자였기에 아무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는 몸이었다.

16551066254844.png“미치겠군. 내가 그렇게 좋으냐?”

16551066160107.png“떠나갈 거야? 너도 날 떠나갈 거야?”

16551066254844.png“그야 나는.”

16551066160107.png“흐어…… 흐어어엉! 감옥에 가둬버릴 테다! 묶어놓고서 못 나가게 할 거다!”

16551066254844.png“이봐 아가씨. 그거 범죄야.”

술나발을 부는 여자를 보며 혀를 차다가, 클라인은 여자가 마시는 술을 뺏어 마셨다. 나름대로는 동정심이었다. 자기가 좋다고 엉엉 우는 여자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데 대한 동정심. 미안하니 같이 술이나 마셔주자 싶었다. 클라인은 여자의 술을 대신 마시면서,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여자는 튀고 없었다. 여기저기 묻고 물었으나 흑발흑안의 여자 기사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클라인은 기분이 상했다. 좋아한다면서. 좋다고 엉엉 울었으면서. 어떻게 정원에 혼자 버려두고 튈 수가 있지? 그래도 나름 이해하려고 해 보았다. 꽁꽁 감춰온 마음을 드러낸 게 부끄러워서 갔을 거라고. 감히 황자인 자신에게 추태를 부린 게 쑥스럽고 겁이 나서 도망쳤을 거라고. 그렇게 해석하니 좀 귀엽게 여겨지기도 했고, 술에서 깬 모습도 궁금했다. 클라인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여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빌어먹을 형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기에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뜻밖의 장소에서 그 엉엉 울던 여자를 마주친 것이다. 아주 앙큼하게도 눈조차 마주치려 들지 않는 여자와.

16551066254844.png“…….”

시간을 확인한 클라인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고서 여자에게 다가간 그는, 손가락으로 톡 그녀 앞의 의자 등받이를 두드렸다.

16551066254844.png“그만 눈 피하고. 인사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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