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엉덩이에 꼬리가 보인다 (20/367)

20화. 엉덩이에 꼬리가 보인다2020.05.06.

라나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1070640049.png“도대체 날 보고 어떻게 그냥 잠드실 수가 있는 거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눈치여서, 카르둔은 속으로 혀를 찼다.

16551070640055.jpg‘폐하께서 저 자존심 덩어리를 첫날부터 아주 제대로 반죽해 놓으셨네.’

하지만 속으로는 혀를 차건 재밌게 여기건, 당장 중요한 건 뭉개진 라나문을 원래대로 펼쳐 놓는 일이었다.

16551070640055.jpg“어휴, 정무에 바빠 많이 피곤하셨겠지요. 누구를 찾아가도 그냥 주무셨을 걸요? 중요한 건 도련님을 가장 처음 방문한 겁니다.”

16551070640049.png“…….”

16551070640055.jpg“오히려 끝까지 가지 않은 채 라나문 님을 끼고 주무셨다는 게 더욱 총애의 증거가 아닙니까? 라나문 님을 그런 상대로만 보는 게 아니란 거니까요.”

카르둔이 열심히 입을 놀려도 그리 반응하지 않던 라나문이 갑자기 내리깔고 있던 눈을 처연하게 올려 떴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압도적인 얼굴에 카르둔은 순간 깜짝 놀랐다. 매번 보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잘난 얼굴이었다. 그런데 라나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한쪽 팔로 카르둔의 옆 벽을 짚고서 뚫어져라 황홀한 시선을 보내왔다.

16551070640055.jpg“도, 도련님?”

카르둔은 당황해서 목소리를 떨었다. 수많은 영애가 사랑하는 눈동자가 정면에서 지그시 그를 응시하자 괜히 부끄러워졌다.

16551070640049.png“어떻지?”

라나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1070640055.jpg“예?”

16551070640049.png“감상이 어떠냐고.”

카르둔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밤안개 같던 라나문의 표정이 다시 평소처럼 냉랭하게 돌아와 있었다.

16551070640049.png“날 이 각도에서 보니 어떤지 묻는 거다.”

아! 뒤늦게 라나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카르둔은 얼른 온갖 아부성 발언을 내뱉었다.

16551070640055.jpg“떨립니다. 막 심장이 콩닥거리고 부끄럽네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도련님은.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예요.”

라나문이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해 잠시 흔들린 듯하니 얼른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때.

16551070668865.png“와. 위장 결혼.”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났다. 카르둔은 헉 놀라서 라나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황제의 후궁 중 상단의 후계자라는 타시르가 이쪽을 쳐다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라나문도 팔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자, 타시르가 다시 깐죽거렸다.

16551070668865.png“금단의 사랑?”

카르둔은 주위 온도가 갑자기 낮아지는 착각에 괜히 자기 팔을 쓸었다. 뒤돌아보고 있어서 라나문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지금 상당히 불쾌해한다는 게 분위기로도 느껴졌다. 그 차가운 시선을 받은 타시르 역시도 아차 싶었던지 얼른 두 손을 모아 용서를 비는 척하고는 다른 곳으로 튀어 버렸다. 카르둔은 게걸음으로 몇 걸음 라나문에게서 떨어졌다.

16551070640055.jpg“제, 제 잘못 아닙니다. 전 가만히 있기만 했어요.”

  * * *

16551070640055.jpg“아이고 소단주님 소단주님……!”

키득거리며 달아나는 타시르의 뒤를 쫓으며, 타시르가 데려온 부하가 혀를 찼다.

16551070640055.jpg“지금 그거 놀리고 좋아하실 때입니까?”

타시르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어가며 피식 웃었다.

16551070668865.png“재미있잖아? 갑갑한 데 이런 데서라도 재미를 찾아야지.”

16551070640055.jpg“여기에 재미 찾으러 오신 겁니까? 폐하의 성총을 얻으러 온 거잖아요.”

부하는 타시르가 여전히 바람 들어간 건달인 양 휘적휘적 걸어가자 그 뒤를 쫓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16551070640055.jpg“이건 절호의 기회란 말입니다. 제발 좀 진지해져 보세요.”

부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가 이럴 만도 했다. 원래 앙제스 상단에서는 ‘이런 쪽’으로는 황가와 얽힐 계획 자체가 없었다. 앙제스 상단주에게는 아들만 셋이었는데, 레안 황태자가 이변이 없는 한 보위에 오를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앙제스 상단의 라이벌인 앵글 상단에서는 딸만 셋인지라, 레안 황자가 태어날 때부터 셋 중 한 명은 후궁으로 무조건 들여보내리라 벼르고 있었다. 앵글 상단주의 딸 중 하나가 축제 때 먼발치에서 황태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상단을 위해 후궁이 되어보라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앵글 상단주는 그 딸에게 온갖 황후 교육을 시키며 미래에 황태자 사위를 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우습게도 레안 황태자가 물러나며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버렸다. 일찍이 레안 황태자를 후원하던 앵글 상단은 한순간에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버렸다. 꿩 대신 닭이라고 틀라 황자를 은밀히 지원하려 했으나, 그도 반년을 채우지 못했다. 앵글 상단주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앙제스 상단주가 앵글 상단주의 설레발을 비웃으며 ‘네 딸들은 후궁이 절대 못 된다. 하지만 내 아들은 후궁이 될 수도 있다’고 놀려대자, 앵글 상단주는 콧대를 높이며 주장했다. 어차피 여자 황제들은 후궁을 들이지 않으니, 평민인 앙제스 상단의 아들들이 후궁이 될 리가 없다고. 하지만 라트라실 황제는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하렘을 선포했고, 앵글 상단주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반대로 아예 이런 쪽으로는 대비조차 되어 있지 않던 앙제스 상단은 얼결에 부랴부랴 장남을 들여보내니 차남을 들여보내니 난리가 났다.

16551070640055.jpg“하늘이 내려준 기회란 말입니다.”

이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부하로서는 타시르에게 잔소리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사이가 나빴던 앵글 상단은 이 일로 앙제스 상단을 보면 이를 가며 침까지 뱉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타시르가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면 아주 좋아서 펄쩍 뛰고 축제까지 열 놈들이었다. 그러나 타시르는 태연하게 웃기만 했다.

16551070668865.png“기회는 왔을 때 낚아채야지. 하지만 아직 폐하께선 내 곁으로 오지도 않으셨는데, 어쩌란 말이야.”

16551070640055.jpg“꽃단장도 하시고, 눈 밑에 크림도 좀 바르시고, 하여튼 그 인상을 좀…….”

부하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16551070640055.jpg“하여튼 좀 방도를 강구해 보세요!”

16551070668865.png“아아. 알았다 알았어.”

귀찮다는 투로 대답한 타시르가 하렘 문을 나서자, 부하가 놀라서 따라붙었다.

16551070640055.jpg“소단주님? 지금 어디 가십니까? 도망가시나요?”

16551070668865.png“도망이라니. 그냥 궁궐 구경이나 하려는 거야. 하렘 밖으로 나가지 말란 말은 없었잖아.”

  * * * 라틸이 도서관으로 가고 있는데, 옆에서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16551070640055.jpg“폐하, 라나문 님에게 따로 선물을 보내시겠습니까?”

라틸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16551070697612.png“선물이요?”

왜 뜬금없이 선물을?

16551070640055.jpg“예. 보통 처음 은혜를 받은 후궁에게는 선물을 보내는 게 관례입니다.”

16551070697612.png“아아. 그렇구나.”

라틸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밤을 함께 보낸 건 맞지만 ‘첫날밤’을 치른 건 아닌지라 좀 난감했다. 끌어안고 잤다고 선물을 보내는 건 아닐 테니까.

16551070697612.png“어…… 그래요. 보내주세요.”

하지만 굳이 이런 걸 알려서 라나문을 망신 줄 필요는 없는지라 라틸은 그러라고 했고, 시종장은 뿌듯하게 웃으며 “예.” 하고 대답했다. 라나문이 공신의 아들이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시종장은 개인적으로 라나문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시종장이 멋진 선물 준비를 하겠다며 물러난 후, 라틸은 머리를 긁적이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진득하게 책이나 읽으며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 라틸은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발견하고서 풋 웃음을 터트렸다.

16551070736678.png

16551070697612.png“오늘 같은 날에도 책을 읽는 거냐?”

후궁으로 들어온 재상의 차남 게스타가, 볕 좋은 창가에 한쪽 다리만 걸친 채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매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설마 오늘도 올 줄은 몰랐던지라, 라틸은 놀리면서 다가갔다. 게스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책을 내렸다.

16551070736688.png“폐하.”

라틸을 볼 때마다 늘 그러듯 오늘도 얼굴이 벌게진 그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눈동자를 여기저기 돌려댔다. 도망갈 길을 찾는 눈치였다.

16551070697612.png“이젠 안 도망가도 되잖아.”

라틸의 장난스러운 말에 허둥거리던 게스타가 더욱 얼굴이 벌게졌다. 읽던 책이 방패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은 채 시선을 바닥에 붙인 그는 옛날과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

16551070697612.png‘유모가 얘를 좀 잘 챙겨주라 했지.’

라틸은 속으로 떠올리고서 게스타의 옆으로 가 앉았다.

16551070736688.png“폐, 폐하!”

화들짝 놀란 게스타는 이제야 고개를 들어 라틸을 쳐다보았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16551070697612.png“이젠 안 도망가도 되는 거 아냐?

예전에 게스타는 라틸을 보고서 도망치다가 수상한 자로 오해받아 근위 기사들에게 잡혀 온 적이 있었다. 이후 왜 도망쳤냐고 추궁을 받자, 라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고. 그 일을 꺼내 놀리는 것이었다.

16551070736688.png“도망간 적 없습……니다.”

16551070697612.png“그 말 하면서도 찔리지?”

16551070736688.png“……예.”

게스타가 맥없이 수긍하자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어릴 때 일이지만 기억이 없을 리가 없지. 라틸은 그가 좀 차분해지도록 기다리다가 물었다.

16551070697612.png“어제 내가 안 가서 서운하고 그런 건 아니지?”

16551070736688.png“저는…….”

게스타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얼굴이 벌게졌는데 ‘안 서운하다’고 말은 못 하는 걸 보니, 서운하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본 라틸은 게스타를 더 놀려보고 싶어졌지만, 그랬다간 울 것 같아서 가볍게 타박만 했다.

16551070697612.png“넌 어째 성격이 변하질 않냐.”

16551070736688.png“이런 제가 싫으십니까?”

16551070697612.png“아니. 어릴 때부터 귀엽다고 생각했어.”

16551070736688.png“폐하께선 늘 멋있으셨습니다.”

16551070697612.png“그래서 좋아했던 거야?”

16551070736688.png“!”

라틸의 말에 게스타는 정말로 울 것처럼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아이고 그만해야겠다. 라틸은 순둥이를 데리고 장난치는 걸 멈추었다. 대신 가만히 손을 뻗어 게스타의 손을 잡았다. 게스타는 머뭇거리면서도 라틸이 잡은 손에 힘을 주어서 같이 꽉 잡아 왔다.

16551070697612.png“내가 너 보니까 걱정되어서 그러는데, 게스타.”

16551070736688.png“예, 폐하.”

16551070697612.png“누가 괴롭히면 울지 말고, 아니, 울어도 되니까 나한테 일러. 알았어?”

16551070736688.png“괴롭히다니요?”

16551070697612.png“다른 후궁들. 솔직히 전부 다 성격들이 좀. 나빠 보여서.”

16551070736688.png“아, 아닙니다. 다들 잘해…….”

잘해 준 건 아닌지 게스타는 말끝을 흐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16551070736688.png“사실 아직 제대로 말을 섞은 분들은 없습니다.”

16551070697612.png“말 섞으면 성격 나쁜 거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어쨌든 문제 생기면 참지 말고 바로 불러. 알았어?”

16551070736688.png“…….”

16551070697612.png“대답.”

대답 대신 게스타는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라틸의 손을 엄지로 조심스레 쓸어 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1070736688.png“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16551070697612.png“응?”

16551070736688.png“왜 굳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어서 그는 어딘가 기대하는 눈으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라틸이 대답하지 못했다. 게스타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강렬한 의구심이 솟아버려서. 혹시 얘, 아직 나 좋아하나? 게스타가 고백을 한 적이 있다지만 그건 진짜 어릴 때 일이고 딱 한 번 뿐이니, 당연히 지금은 마음이 변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게스타의 눈동자는 아름답지만 차갑고 건조한 라나문의 눈동자나, 별을 박은 듯 예쁘지만 또라이 같던 클라인 황자의 눈동자와는 달랐다. 부드러우면서도 촉촉하게 잠겨 있었다. 온몸으로 ‘혹시 나 좋아하세요? 그렇다고 말해주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렇게 나오는 상대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유모가 너 챙겨주래. 네가 좀 쭈글쭈글한 면이 있어서 신경 쓰여. 라틸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서 그냥 마주 보며 웃다가 제안했다.

16551070697612.png“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건강 상해. 같이 산책이나 할까?”

  * * *

16551070668865.png“흐음. 확실히 넓군. 아주 넓어.”

타시르는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복도를 걸어가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부하는 타시르의 뒤를 쫓아가며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타시르는 괴짜 같은 면이 있지만 머리가 아주 비상한 후계자였다. 또한 무엇이든 허투루 지나치는 게 없었다. 지금도 말이 좋아서 ‘구경’이지, 사실상 궁 전체를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중앙궁의 2층 복도를 지나갈 때였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라트라실 황제가 나왔다. 당장 달려가서 인사를 올려도 부족하건만. 타시르는 황제를 보자마자 바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부하는 얼결에 따라 숨으면서 작게 항의했다.

16551070640055.jpg“이럴 때 가서 우연이라고 인사를 하셔야지, 왜 숨는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타시르는 쉿, 하는 수신호를 보내고는 황제 쪽을 숨어서 쳐다보았다. 선택권이 없는 부하도 끙 혀를 차며 다시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부하는 어? 하고 입을 벌렸다. 놀랍게도 황제의 뒤에 예상 못 한 사람이 붙어 있었다. 다른 후궁. 재상의 아들이라던 그 후궁이었다. 어제 서약식 이후 식사를 할 때,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서 고개를 탁자에 처박고 있던 그 후궁. 소단주인 타시르가 날쌘 도베르만을 닮은 얼굴이라면, 그 후궁은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살짝 내려간 눈매도 그렇고, 우울한 골든 리트리버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숫기도 없고 조용하고 심약해 보여서 제일 만만한 후궁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 후궁은 황제와 손까지 꼭 잡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부하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손을 올려 자기 눈을 비볐다. 분명 골든 리트리버를 닮았는데, 순간 엉덩이에 앙큼한 고양이 꼬리가 보인 것 같았다.

1655107082975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