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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정말로 궁금한 머릿속 (23/367)

23화. 정말로 궁금한 머릿속2020.05.17.

한숨을 내쉰 클라인 황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새파란 눈으로 라틸을 쳐다보았다. 또라이지만 참으로 맑고 예쁜 눈이었다. 맑은 날의 하늘처럼. 라틸은 문득 생각했다. 하늘은 너무 넓고 깊어서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하지. 클라인 황자의 눈동자에는 그런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자신이 저 황자의 깊고 넓은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16551071951021.png“클라인.”

16551071951028.png“예, 폐하.”

16551071951021.png“난 네가 정말로 신비하다고 생각해.”

16551071951028.png“폐하…….”

16551071951021.png“언젠가는 네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 진심으로.”

16551071951028.png“말씀도 야하게 하시긴. 노골적이십니다.”

16551071951021.png“내가?”

16551071951021.png‘내 말 어디가?’

칭찬을 한 적이 없는데 칭찬으로 해석을 한 건지, 클라인이 눈을 휘며 웃었다. 라틸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넓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서 하렘 밖으로 나갔다. 하는 말의 90%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클라인이 어떤 이유로 섭섭해하고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라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시종장에게, 칼라인과 클라인 두 사람 모두에게 선물을 보내라 지시했다.

16551071951056.jpg“클라인 황자도 말씀입니까?”

16551071951021.png“많이 섭섭해하는 눈치더라고요.”

16551071951056.jpg“섭섭하기야 다른 후궁분들도 마찬가지실 텐데요.”

16551071951021.png“클라인은 일단 외국에서 오기도 했고, 신분이 가장 높은 후궁이잖아요.”

하이신스가 보낸 첩자일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건 대외적인 신분만큼은. 게다가 성격 역시 거만하고 자존심이 강하지. 같이 밤을 지내진 못하더라도 체면은 세워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16551071951021.png“아, 사블레 후작. 하나 더요.”

16551071951056.jpg“예, 폐하.”

16551071951021.png“그…… 칼라인이요.”

16551071951056.jpg“예.”

16551071951021.png“과거를 좀 조사해줘요.”

16551071951056.jpg“수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16551071951021.png“아, 그건 아닌데.”

그냥 여러모로 여자 경험도 많을 것 같고. 게다가 자꾸 옛날부터 알았다고 하는 게 좀 의아하기도 하고. 라틸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으나, 그래도 너무 구체적인 사유를 세세히 말하기는 머쓱해서 일단 알아봐 달라고만 부탁했다.

16551071951056.jpg“철저하게 조사해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시종장은 라틸의 얼버무림을 나름대로 해석하고는, 귀엽다는 듯 웃고서 밖으로 나갔다.

16551071951021.png‘어…… 되게 엄한 생각하고 가신 거 같은데.’

라틸은 시종장의 미소를 보고 당황해서 손을 위로 올렸으나, 붙잡고 아니라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아서 결국 손을 도로 내렸다.

16551071951021.png‘에이 몰라. 오해하면 또 뭐 어때?’

라틸은 머리를 벅벅 긁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욕조 안에 들어가 거품을 가지고 눈사람을 만들면서 장난을 칠 때였다. 밖에서 다급하게 라틸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16551071951021.png“들어오라.”

명령을 내리고서 상체를 일으키자, 문이 열리고 시녀 하나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16551071951021.png“무슨 일이냐?”

라틸이 묻자 시녀는 황망한 얼굴로 보고했다.

16551071951056.jpg“폐하. 급히 ‘사자의 궁’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자의 궁은 말이 좋아 궁이지, 사실상 작은 집들이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집. 그리고 그 집 아래 지하에 안치되어 있는 건 역대 황제 부부들의 시신이었다.

16551071951021.png“무슨 일이더냐?”

라틸은 바로 욕조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 시간에 그곳으로 가야 한다면 나쁜 일일 터였다. 시녀의 표정도 그렇고.

16551071951056.jpg“선제 폐하의 집 위에 누군가 검정색 염료로 이상한 낙서를 해두고 갔다 합니다!”

16551071951021.png“낙서?”

역시나.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라틸의 목욕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작게 비명을 터트렸다. 라틸은 수건을 빼앗듯 들고는, 목욕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 스스로 대충 물기만 닦고서 황급히 나갔다.

16551071951021.png‘선대 황제의 무덤에 낙서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라틸은 서둘러 옷을 입고 밖으로 뛰어나가, 사자의 궁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라틸은 궁 근처에 가자마자 우뚝 멈춰서서 짧게 숨을 토했다. ‘사자의 궁’은 겉으로 보기엔 아담하고 아름다운, 평화로운 단층 가정집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가정집의 정면을 새까만 검정 도료가 흉하게 덮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냥 확 확 멋대로 그은 선의 무리 같았으나, 떨어져서 보면 ‘V’ 아래에 ‘_’를 그린 것이었다.

16551071951021.png“무엄한 놈이……!”

라틸은 화가 나서 이를 부드득 갈다 물었다.

16551071951021.png“이곳의 담당자는 누구지?”

라틸이 묻자마자, 이 지역을 담당하는 1경비단 소속 병사 두 명이 얼른 다가왔다. 이 일로 큰 벌을 받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얼굴들이었다.

16551071951021.png“언제부터 이랬느냐?”

라틸은 실제로도 벌을 내릴까 말까 생각하며 물었다. 약간이라도 책임의 여지가 있을 시, 엄중하게 벌할 생각이었다.

16551071951056.jpg“잠시 교대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16551071951056.jpg“교대 시각은 오전 6시였습니다.”

16551071951021.png“교대할 땐 아무도 없었나?”

16551071951056.jpg“예, 폐하. 7분 정도 자리가 비게 됩니다.”

16551071951021.png“이전 근무자는 누구냐.”

라틸의 질문에, 번갈아 대답하던 병사 두 명의 뒤쪽에서 다른 병사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16551071951056.jpg“신이옵니다, 폐하.”

16551071951021.png“네가 경비를 설 때는 이 낙서가 있었느냐?”

16551071951056.jpg"없었습니다."

16551071951021.png"수상한 자의 흔적은?“

16551071951056.jpg"없었습니다."

16551071951021.png“없었는데 7분 사이에 이걸 그리고 튀었다고? 도료를 담은 통만 들고 와도 티가 났겠다! 수상한 자가 없던 거냐, 있는 데 몰랐던 거냐?”

라틸의 목소리가 갑자기 팍 높아지자, 병사들이 찔끔해서 시선을 내렸다. 쓸모없는 놈들이란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올 뻔한 걸, 라틸은 가까스로 눌렀다. 라틸은 병사들을 더 타박하는 대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병사들에게 원위치로 가란 손짓을 했다. 병사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일단 원래의 대열로 들어갔다.

16551071951021.png“기사단장.”

그들이 들어가자 라틸은 이번엔 서넛을 불렀다. 평소와 다른 라틸의 목소리에 서넛도 진지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16551072090318.png“예.”

16551071951021.png“관련자들의 책임 여부를 파악하라.”

라틸은 평소처럼 서넛에게 존댓말도 써주지 않았다. 이 일에 사적인 감정을 섞지 말고 제대로 수사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16551072090318.png“네.”

그때였다. 가장 처음으로 현장을 발견했다던 병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16551071951056.jpg“저어…… 폐하. 표식뿐만이 아닙니다. 근처에 이 편지봉투 역시 떨어져 있었습니다.”

라틸이 휙 고개를 돌려 보자, 병사는 순간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는 얼른 앞으로 나서며 편지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라틸은 편지를 받아서 휙휙 위아래와 앞면 뒷면을 살폈다. 발신인과 수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편지였다.

16551071951021.png‘범인이 두고 간 건가?’

일단 가져가야겠다 싶어서, 라틸은 편지를 챙기며 명령했다.

16551071951021.png“경비단장!”

16551071951056.jpg“예, 폐하.”

16551071951021.png“따라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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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라틸은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자에 앉지도 않고서 바로 명령했다.

16551071951021.png“어떤 자가 한 짓인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이 사건은 황실 모독이다. 좋지 못한 사건으로 돌아가신 선황제에 대한 불경이다. 알았느냐?”

16551071951056.jpg“예, 폐하.”

그 바람에 경비단장도 들어오다 말고 얼결에 문간에서 부복하며 대답했다.

16551071951021.png“감히…….”

그래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라틸은 주먹을 꽉 쥐고서 씩씩거렸다. 안 그래도 좋게 돌아가시지 않은 아버지인데. 죽어서 이런 모욕까지 당했다 생각하자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라틸은 곧 빠르게 이성을 찾았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혼자서 분노를 할 게 아니라 범인부터 찾아내야 했다. 라틸은 아직도 문간에 서 있는 경비단장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수신호했다. 경비단장이 다가오자 라틸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16551071951021.png“경비단장. 그대가 보기엔 어떻지?”

16551071951056.jpg“예?”

16551071951021.png“이 일이 선제를 시해한 암살범과 관련 있어 보이느냐?”

16551071951056.jpg“실은……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6551071951021.png“말해보라.”

16551071951056.jpg“검은 도료로 그려져 있던 그 기호 말입니다. 어느 암살자 집단에서 쓰이는 기호처럼 보입니다. 확실한 게 아니긴 하오나…….”

라틸은 경비단장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16551071951021.png“암살자 집단이라니? 어느 암살자 집단 말이냐?”

경비단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6551071951056.jpg“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본 무늬와 비슷할 뿐이라, 자세한 건 알아봐야……”

16551072090318.png“흑림에서 사용하는 표식입니다.”

끼어든 이는 서넛이었다. 라틸은 경비단장의 대답을 듣고 있다가, 놀라서 서넛을 보며 물었다.

16551071951021.png“서넛 경도 압니까?”

16551072090318.png“예.”

서넛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16551072090318.png“유명한 암살자 집단입니다.”

16551071951021.png“유명하다니요? 난 들어본 적 없습니다.”

16551072090318.png“암살자가 유명하다고 해 봐야 암살자 아닙니까. 유명하다고 해도 그들만의 이야기라, 모르는 게 당연하십니다.”

그러는 넌 어떻게 아는데? 라틸은 잠시 의아했지만, 곧 그 의문도 접었다. 어떻게든 알았겠지. 지금은 중요한 건 서넛이 아니었다. 서넛은 계속 말을 이었다.

16551072090318.png“솜씨도 솜씨지만, 그들은 의뢰를 해결하고 갈 때마다 꼭 저 특유의 표식을 그려놓고 가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16551071951021.png“그런 집단이 아바마마 무덤에 이런 표식을 하고 갔다는 건, 아바마마를 암살한 범인도 그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단 거로군요.”

16551072090318.png“예. 아마 그럴 겁니다. 다만 이상한 건…….”

16551071951021.png“왜 이렇게 시간이 지난 후 무늬를 새겼느냐. 맞죠?”

16551072090318.png“예.”

16551071951021.png“그럼 흑림의 짓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군요. 표식이야 복잡한 그림이 아니니 누구나 그릴 수 있을 테고. 흑림에 덮어씌우려면 얼마든지 남길 수 있으니까요.”

16551072090318.png“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16551071951021.png“…….”

라틸은 잠시 팔짱을 끼고서 생각하다 다시 서넛에게 물었다.

16551071951021.png“서넛 경.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습니까?”

16551072090318.png“무엇을 말씀하십니까?”

16551071951021.png“예전에도 다른 누군가가 흑림의 표식을 멋대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까?”

16551072090318.png“예. 몇 번 있었습니다.”

16551071951021.png“흑림 쪽에선 그냥 넘어갔습니까? 이렇게 표식을 남기고 다닌다는 건, 자기들 범죄 행위를 자랑하고 싶어 한단 건데. 그런 자들은 프라이드가 강하지 않습니까. 사칭 당하는 걸 싫어할 텐데요.”

16551072090318.png“맞습니다. 그럴 경우 사칭한 범인을 찾아 죽인 후, 시체에 표식을 거꾸로 그려 사칭하지 말라 경고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라틸은 손가락을 튕겼다.

16551071951021.png“그러면 경비단장. 이걸 이용해서 잡게.”

멀뚱히 서넛과 황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비단장은, 갑자기 라틸이 자신을 부르자 놀라서 “네?” 하고 되물었다. 라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16551071951021.png“그자들에 대한 추적을 몰래 하되, 대외적으로 이 일을 알리라고.”

라틸이 거듭 설명해주었으나 경비단장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16551071951056.jpg“예? 대외적으로요?”

경비단장은 눈을 끔뻑거리며 라틸을 쳐다보았다. 이건 추문이라면 추문인지라 보통은 말하려 들지 않을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라틸이 추문을 공개적으로 알리되, 추적은 몰래 하라고 명령하니 의아했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서넛 역시도 의외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라틸은 코웃음을 쳤다.

16551071951021.png“왜 다들 못 알아듣지? 만약 흑림이 한 짓이 아니라면 어디선가 표식이 뒤집힌 시체가 나타날 거 아닙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란 걸 알리고 싶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그들이 직접 범인을 잡게 할 수 있는 거죠.”

16551071951056.jpg“아! 그렇군요!”

16551071951021.png“그래도 혹시 모르니 궁 안 경비의 수는 늘리도록 하고.”

경비단장이 감탄하며 나간 후. 라틸은 입가에 애매하게 띄고 있던 비웃음조차 거두었다. 굳은 표정 위에 심각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라틸은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책상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16551071951021.png“아바마마께서 전문 암살자들에게 당한 거라면…… 그걸 의뢰한 사람이 있을 건데. 사실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서넛 경, 누군지 짐작이라도 갑니까?”

16551072090318.png“현재로서는 짐작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16551071951021.png“암살범들은 고문 같은 데 강하다던데. 만약 진짜로 흑림에서 한 짓이라면…… 좀 곤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객 이름을 안 밝히려 들 거 아닙니까.”

16551072090318.png“그렇겠지요.”

16551071951021.png“앞으로 궁전이 시끄러워 질 수도 있겠습니다.”

라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문득 아까 병사가 건네준 편지가 생각나 꺼냈다.

16551071951021.png‘사자의 궁은 궁의 외곽에 뚝 떨어져 있지. 외진 곳이긴 해. 그렇다고 해도 궁전 담벼락 안에 있는 곳이잖아. 그런데 거기까지 가서 7분 안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범인이라…….’

그 표식 그리는 데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지? 표식이 작지 않았으니 한번에 그릴 수 있진 않을 건데. 아니, 그보다 시간. 범인은 7분간 공백 시간이 생긴다는 걸 알고서 온 자인가? 그러면 내부인?

16551071951021.png‘혹시 담당 경비병 중에 범인이 있을 확률은 없나?’

곰곰이 생각하면서도 손은 능숙하게 편지 봉투의 밀랍을 칼로 벗겨냈다. 봉투를 완전히 벗기자 라틸은 별생각 없이 편지를 꺼내 펼쳤다. 그러나 편지를 보마마자 아까 이상으로 인상이 찌그러졌다.

16551071951021.png“아니 무슨 이런 미친……?”

라틸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선황제의 무덤을 모욕한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면 일단 나쁜 소리겠지. 이런 각오는 봉투를 뜯으면서 당연히 했다. 그러나 편지 안에 쓰여 있는 내용은 예상보다 더욱 어이없었다. - 네 아버지를 죽인 건 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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