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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라나문의 질투 - 예고편 (24/367)

24화. 라나문의 질투 - 예고편2020.05.20.

라틸은 ‘와’ 하고 혀를 찼다.

16551072379912.png“이런 개새끼를 보았나?”

황제가 된 후 최대한 근엄하게 가꾸려던 인내심이 똑 부러지며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라틸은 아버지가 암살당하던 시기에 오빠인 레안 황태자를 만나러 수도를 떠나 있었다. 이 거리 때문에 반년 간 틀라에게 황궁까지 빼앗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뭐? 누가 누굴 암살해? 직접 행동한 범인이 아니라, 배후로 지목한 것이라 해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였다. 라틸은 아버지가 오래 살아 있으면 있을수록 유리한 위치였다. 라틸을 반대하던 이들이 하나 같이 꼽은 문제점 역시 라틸의 짧은 황태녀 교육 기간이었고. 이건 아버지의 재위 기간이 늘수록 보완할 수 있는 단점이었다. 그런데 뭐? 내가 아버지를 죽여? 홧김에 편지를 바락 찢으려다가 라틸은 후우 숨을 내쉬고서 간신히 손에 힘을 뺐다.

16551072379912.png‘아냐, 이런 걸로 흥분하면 안 돼. 헛소리에는 휩쓸리는 거 아냐.’

하지만 표정에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자 서넛 기사단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1655107237992.png“무슨 내용인데 그러십니까?”

16551072379912.png“읽어봐요. 보면 어이가 가출할 겁니다.”

서넛은 라틸이 건넨 편지를 받아 들고서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1655107237992.png“…….”

짧은 내용이기에 라틸은 바로 물었다.

16551072379912.png“읽었습니까?”

1655107237992.png“네.”

16551072379912.png“어떤 것 같습니까?”

1655107237992.png“이 편지 쓴 자, 제가 꼭 목을 베어 보고 싶습니다. 뇌에 기름이 많아서 칼에 좋을 것 같습니다.”

16551072379912.png“와, 말하는 거 잔인해.”

서넛이 힐긋 쳐다보자, 라틸은 히죽 웃고서 그의 등을 텅 두드렸다.

16551072379912.png“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제야 서넛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반대로, 라틸은 편지를 받아 탁자에 내려두자마자 한숨을 내쉬면서 턱을 괴었다. 편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신경 쓰이는 게 더 있었다.

16551072379912.png“서넛 경. 이걸 쓴 사람과 아버지 무덤에 낙서를 한 사람. 동일인이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1655107237992.png“저도 그게 좀 의아합니다. 무덤에 낙서를 한 사람이 암살범이라면, 이 편지는 그야말로 모순적이니까요.”

16551072379912.png“그렇죠. 일반 암살범이라면 몰라도, 자기들 암살을 떠벌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남길 편지는 아니죠.”

이건 ‘황제는 내가 죽였다’는 표시를 무덤에 남겨 놓고서는, 옆에는 ‘황제는 네가 죽였다’는 편지를 두고 간 꼴이었다. 완전히 정반대되는 주장. 라틸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투둑투둑 내리치며 한참 고민했다.

16551072379912.png“일단…….”

1655107237992.png“예.”

16551072379912.png“조사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느 쪽이든.”

1655107237992.png“네.”

16551072379912.png“그래요.”

1655107237992.png“…….”

16551072379912.png“…….”

그런데 왜 저러나. 라틸은 잠시 서넛을 보고 있다가 눈썹을 곧추세웠다. 할 말은 이제 다 한 것 같은데. 서넛이 나가지 않았다. 서넛은 라틸의 옆에 붙어 있는 게 임무인 근위기사였지만, 이곳은 라틸의 침실이었다. 아무리 근위기사라 해도 명령이 없으면 방 안에서까지 꼭 붙어 있지는 않았고. 의아해서 쳐다보자, 서넛이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1655107237992.png“요즘 너무 책상 업무만 하시는 거 아닙니까?”

라틸은 황녀 시절부터 기사들을 따라다니며 검을 배우겠다 난리를 부렸고, 결국에는 기사들과 함께 검을 배웠다. ‘적당히 호신술 정도로 배우시겠지’라고 사람들이 예상한 바와 달리 의외로 재능도 있었고, ‘적당히 배우다 그만두시겠지’라고 예상한 바와 달리 꾸준히 검을 휘둘렀다. 후계자가 된 후에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16551072379912.png“아. 바쁘잖습니까.”

라틸은 픽 웃으며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가리켰다.

16551072379912.png“이거 좀 봅니다.”

꾀병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처리해야 할 안건들은 매일매일 끝없이 쏟아졌다. 이 와중에 선황제의 무덤을 훼손한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더 바빠지면 더 바빠지지 한가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16551072379912.png“앞으로도 바쁠 테고요.”

서넛은 힐긋 라틸이 가리킨 서류들을 보았다. 두툼하게 쌓인 서류들을 본 그는 인상을 조금 구겼으나, 다시 라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제안했다.

1655107237992.png“스트레스도 받으셨을 텐데. 몸 좀 쓰시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비무해 드리겠습니다.”

16551072379912.png“비무요? 지금?”

라틸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오전 9시 30분이었다. 평소 일과대로라면 아침 9시까지 공개 집무실로 간 후 밤사이의 중요 보고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미 30분이나 지나 버렸고…… 집무실로 가면 10시가량일 텐데. 11시에는 국무회의가 있다.

16551072379912.png“음.”

라틸은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16551072379912.png“좋습니다.”

  * * * 레이피어를 쥔 라틸은 잠시 자세를 취하는 듯하다가, 바로 서넛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라틸이 마음을 놓고서 마음껏 검을 휘둘러도 되는 몇 안 되는 기사였기에 처음부터 제대로 내리치는 것이었다. 서넛은 검 끝으로 라틸의 검을 흘려내며 유연하게 몸을 움직였다. 눈으로도 방향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검이 수십 번을 오갔다. 훈련 중이던 기사들도 행동을 멈춘 채, 두 사람을 둘러싸고서 환호성을 뱉었다. 라틸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검을 휘두르다가, 서넛이 자신 쪽으로 확 검을 찌르는 순간 옆으로 틀며 막바지 공격을 찔러 넣었다. 속도가 붙은 탓에 중간에 공격을 멈추지 못한 서넛의 검이 주욱 라틸에게 흘러왔다. 여기까지. 여기까지가 라틸이 계산한 궤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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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라틸이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서넛은 얼음처럼 바로 검을 회수하며 라틸의 검을 베어냈다. 라틸도 서넛의 검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힘의 차이가 컸다. 라틸의 검은 결국 데구루루 굴러 저만치 날아갔다. 젠장, 라틸이 투덜거리자 서넛이 웃으며 물었다.

1655107237992.png“제가 이긴 겁니까?”

16551072379912.png“언제는 안 이긴 것처럼 말합니다?”

라틸은 부루퉁하게 말하고는 직접 검을 주웠다. 다른 사람이 검을 주워주면 검을 건네다가 기습을 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검을 잡았을 때부터 내내 이렇게 배웠다. 자신의 검은 자신이 챙겨야 한다고.

1655107237992.png“전 검으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폐하께 지면 기사단장 역할을 못 합니다.”

서넛의 말투는 달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능글맞았다. 라틸은 헹 코웃음을 치면서 검을 챙겨 넣었다. 틱틱거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실컷 뛰어서 그런가, 아까보다는 기분이 덜 갑갑했다. 아마 서넛이 뜬금없이 검을 겨뤄보자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 무덤 건으로 놀란 걸 눈치채고서, 일부러 몸을 움직이게 유도한 것일 거다. 서넛의 배려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16551072379912.png‘고맙다고 할까?’

라틸은 검을 만지는 척 슬쩍 서넛을 쳐다보았다. 서넛은 이렇게 뛰었는데도 이마에 땀 한 방울조차 나지 않은 상태였다. 멀끔한 모습으로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짓궂게 웃기만 한다. 라틸은 머뭇거리다가 인사는 생략하기로 했다. 괜히 고맙다고 각 잡고 말하려니 쑥스러웠다.

1655107237992.png“이상합니다, 폐하.”

16551072379912.png“뭐가요?”

1655107237992.png“방금 폐하께서 뭔가를 말하려 했는데. 도로 삼켰습니다.”

16551072379912.png“아닌데. 아닐걸요?”

1655107237992.png“제게 좋은 말을 하려다 말았습니다.”

16551072379912.png“아닐걸요…….”

계속되는 라틸의 부정이 웃긴지, 서넛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라틸은 그가 내민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그렇게 뛰었는데도 서넛의 손수건은 서늘했다. 라틸은 그게 신기해서 괜히 손수건을 뺨에 가져다 대어 보았다.

16551072379912.png“이상하단 말이지…….”

얼음 사이에 넣었다 뺀 만큼 차가운 건 아니었으나, 이렇게 뛰고도 체온이 서늘한 건 역시 신기했다.

1655107237992.png“폐하께서 뭘 이상하게 여기시는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16551072379912.png“응?”

1655107237992.png“제 눈엔 제 손수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게 더 이상해 보입니다.”

16551072379912.png“!”

1655107237992.png“좀 부끄럽네요.”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표정으로 서넛이 말하자, 라틸은 손수건을 황급히 손에서 뗐다. 하지만 건수를 잡았다 싶은지, 서넛은 이미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1655107237992.png“이런 건 제가 안 보는 데에서 해 주십시오, 폐하.”

16551072379912.png“그런 거 아닙니다.”

1655107237992.png“아닌 거로 하고 싶은데, 목격자가 너무 많습니다.”

16551072379912.png“목격자는 무슨. 이봐. 너. 뭐 본 거 있어?”

라틸이 무작위로 지목한 기사가 대번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하고 외치자, 서넛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더니 음흉하게 중얼거렸다.

1655107237992.png“저 기사는 폐하보다 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단 걸 잠시 잊었나 봅니다.”

라틸에게 아부했던 기사가 ‘아니, 그럼 제가 무슨 대답을 했어야 하나요?’라는 듯 억울하단 눈으로 서넛을 쳐다보았지만, 서넛은 ‘얄짤없단’ 표정이었다. 라틸은 자신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 확실히. 다른 후궁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편하기는 서넛이 최고였다. 가끔 너무 편해서 짜증 날 때도 있지만.

1655107237992.png“흐음.”

그러고 있자니, 서넛이 이번에는 묘한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은 라틸의 뒤를 향해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슬쩍 삐딱하게 올라갔다.

1655107237992.png“목격자가 여기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16551072379912.png“뭔 소립니까?”

라틸은 서넛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멀리에 라틸의 후궁 한 명이 수행원인지 시종인지를 데리고 서 있었다. 상대도 라틸이 자신을 쳐다본다는 걸 알았는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라나문이었다. 라틸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 손은 머쓱하게 내려야 했다. 상대가 다시 한번 꾸벅 인사하고는 바로 돌아서 가버렸기 때문이다.

16551072379912.png“……방금 저 엄청 민망했습니다.”

1655107237992.png“못 본 거로 해 드리겠습니다.”

16551072379912.png“목격자가 많아서 안 된다면서요”

1655107237992.png“뭔 말을 못 하겠습니다.”

  * * * 황제가 근위기사단장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자, 근위기사단장은 마주보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잘 어울렸다. 저 주위에서만 밝은 분홍색 빛이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불쾌할 정도로.

16551072531146.png“…….”

라나문은 기분이 나빠져서 휙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1655107253115.jpg“앗, 도련님!”

시종은 황제와 서넛 기사단장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라나문을 따라갔다.

1655107253115.jpg“그냥 가십니까?”

시종은 라나문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 물었다. 황제와 눈도 마주쳤겠다, 서로의 존재도 눈치챘겠다, 가까이 가서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라나문이 멀리서만 예를 갖추고 돌아서자 의아했다.

1655107253115.jpg“아까 폐하께서 여기 보고 손 흔드셨는데요.”

혹시 못 본 건가 싶어서 물었으나, 라나문은 차갑게 말했다.

16551072531146.png“안다. 그래서 인사했잖나.”

근데 그냥 가신다구요? 시종은 당황해서 주절거렸다.

1655107253115.jpg“인사만 할 게 아니라, 좀 가셔서…….”

하지만 시종은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16551072531146.png“저자.”

라나문이 시종의 말을 끊어버려서.

16551072531146.png“폐하와 있던 자. 근위기사단장이던가?”

1655107253115.jpg“네. 서넛 근위기사단장입니다.”

질문이 씹힌 건 시종이었으나 표정은 라나문이 좋지 않았다. 시종은 라나문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뭐가 불편한 건지, 얼음꽃 같은 얼굴에 ‘심기가 불편하다’고 쓰여 있었다. 시종은 주인의 고상한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1655107253115.jpg“도련님. 혹시 신경 쓰이십니까?”

라나문은 입술을 꾹 닫았다. 신경 쓰이냐고? 당연히.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둘이서 같이 검을 맞대면서 웃고 떠들고, 황제는 그 남자가 준 손수건에 뺨을 비비적거리고, 그 남자는 그걸 보며 뭐라 뭐라 웃고, 주위 기사들은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흐뭇하게 바라보고……. 꼭 누가 보면 부부라고 할 모습 아니던가? 라나문의 생각이 끝도 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상념이 깊어질수록 걷는 속도 역시 높아져서, 시종은 나중에는 반쯤 뛰다시피 따라가야 했다. 그러다가 라나문이 갑자기 확 멈춰서는 바람에, 시종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비틀 멈춰섰다. 라나문의 등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1655107253115.jpg“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16551072531146.png“혹시 그건가.”

1655107253115.jpg“그거라니요?”

16551072531146.png“저놈 때문에 내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셨나?”

1655107253115.jpg“예?”

16551072531146.png“분명 서넛 기사단장은 레안 황자님의 친구였지. 선황제께서도 그 기사단장을 내내 총애하셨고. 덕택에 자연스럽게 라트라실 폐하의 최측근으로 올라왔다. 맞지?”

1655107253115.jpg“그렇지요? 검술 실력이 대단하다 들었습니다.”

시종의 순순한 칭찬에 라나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불쾌하단 기색이 역력했다.

1655107253115.jpg“도련님?”

평소보다 더 냉기가 날리는 모습에 시종은 눈썹을 치켜내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도련님…… 질투하시는가? 차가운 태도야 늘 그렇다지만, 오늘따라 유독 정도가 심했다. 황제와 근위기사단장의 비무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 희미하게 웃으며 농담도 받아주고 그랬는데. 그때였다. 하렘에 난 하얀 길을 걸어가던 두 사람은,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던 게스타와 딱 마주쳤다. 시종은 게스타의 뒤에 선 시종에게 아는 척 눈인사를 하였으나, 라나문은 그대로 휙 게스타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인사고 뭐고 없었다. 게스타가 눈도 못 맞춘 채 시선을 내리며 씁쓸하게 웃자, 시종은 자기가 더 미안해져서 머뭇거리다가 라나문을 뒤쫓았다. 문득 시종은 불안해졌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저렇게 질투심이 넘쳐나시는데. 나중에 진심으로 폐하를 사랑하게라도 된다면……?

1655107253115.jpg“으.”

시종은 자신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주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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