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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부하가 아닌 남자와 아픈 첫사랑 (28/367)

28화. 부하가 아닌 남자와 아픈 첫사랑2020.06.03.

칼라인이 대번에 허리춤으로 손을 내렸다. 하지만 반사적인 반응이었을 뿐.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 이미 무기를 다 압수당했기 때문에 잡히는 건 없었다. 타시르는 이 와중에도 비실비실 웃었지만 라틸은 좀 걱정이 되었다. 타시르 저거, 하렘에 돌아가자마자 칼라인에게 맞아 죽는 건 아닌가 몰라…….

16551073491365.png‘어찌 되었건 둘 다 하는 일이 위험하단 거지.’

그래도 라틸이 손을 휘휘 젓자 두 사람 다 싸워대던 건 바로 멈추었다. 두 남자가 진정하자 라틸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16551073491365.png“일단 넌 나가 있어, 칼라인.”

16551073491375.png“주인!”

16551073491365.png“나가 있어.”

라틸이 재차 단호하게 지시하자, 칼라인은 입술을 꿈틀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집무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6551073491365.png“서넛 경. 들어와.”

라틸은 칼라인을 내보낸 대신 서넛이 들어오도록 한 다음, 집무실 문을 굳게 닫았다.

16551073491365.png“이제 말해봐.”

타시르는 서넛을 쳐다보며 물었다.

16551073491398.png“저자는 있어도 됩니까?”

16551073491365.png“어. 서넛은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16551073491398.png“그러시다면야 뭐.”

앞 이야기를 모르는 서넛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일단 라틸의 옆에 제대로 붙어 섰다. 타시르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16551073491398.png“저희가 처음 폐하를 선제 폐하의 암살 배후로 의심했던 건, 그 전에 내려진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16551073491365.png“명령? 무슨 명령?”

16551073491398.png“선제 폐하께서는 암살당하시기 전, 저희에게…… 크흠. 죄송합니다, 폐하. 저희에게 당시 황태녀이셨던 폐하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셨거든요.”

뭐가 죄송한데? 어리둥절하게 듣다가 라틸은 머리를 주먹으로 꽝 맞은 충격에 멍해졌다. 뭐? 누가 누구를 조사해?

16551073491365.png“아바마마가 나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셨다고?”

너무 놀라서인가.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라틸은 초조하게 입술을 눌렀다.

16551073491365.png“뭘 조사하라 하신 거지? 왜 조사하라 하신 건데?”

16551073491398.png“조사 목적에 대해 알려주시진 않았습니다.”

타시르는 라틸의 눈치를 살피고서 덧붙였다.

16551073491398.png“어쩌면 간단한 이유였는지도 모릅니다. 황태녀이시니, 보위에 오르기 전 제대로 파악해두고 싶으셨던 걸지도 모르지요.”

그저 파악해두고 싶어서 암살 비밀 단체에게 조사를 명령한다고?

16551073491365.png“…….”

16551073491398.png“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선제 폐하께서 암살당하셨습니다. 저희로서는 시기적으로 라트라실 폐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틸은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도저히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거짓말. 어쩌면 저자는 전부 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 흑림이 초대 황제 때부터 음지의 일을 맡아왔단 것도 거짓 아닐까?

16551073491365.png‘전에 우리나라는 비밀 정보 조직 같은 거 없나 생각해본 적이 있긴 한데……. 와. 미치겠네.’

라틸은 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부분은 서류를 가져오라 지시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겠지. 게다가 앙제스 상단은 거미줄처럼 타리움 제국과 얽혀 있는 상단이었다. 그런 곳의 후계자가 상단을 말아먹을지도 모르는데 당장 들통날 거짓말을 하진 않을 터였고.

16551073491365.png“그런데 왜 갑자기 나의 후궁으로 들어온 거지? 대관식 때야 뭐. 날 못 믿어서 넘어갔다고 쳐도. 다른 길로 와도 됐잖아.”

16551073491398.png“여러모로 조사한 결과 흑림에서는 폐하께서 선황제 암살의 배후가 절대 아니란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후 자연스레 접근할 길을 찾다가…… 네. 이렇게 된 거지요.”

하렘 얘기를 자신이 먼저 꺼낸 게 아니라면, 라틸은 아마 하렘 얘기를 꺼낸 사람이 타시르와 한 패일 거라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신들의 예상을 뒤엎고서 하렘을 도입한 건 라틸 자신이었다.

16551073491365.png“이건 전부 앙제스 상단주가 지시한 거냐?”

16551073491398.png“아, 그건 아닙니다. 아버님은 흑림에 관해 모르십니다.”

16551073491365.png“뭐?”

16551073491398.png“흑림은 앙제스 상단 소속이 아니거든요. 저희 가문이 맡아온 집단인 건 맞지만, 제게 수장 자리를 물려준 분은 다른 친척입니다.”

타시르는 라틸의 눈치를 살피다가 덧붙였다.

16551073491398.png“역대 황제 폐하들의 명을 따르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림이 완전히 황제 폐하의 소속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긴밀한 협력관계에 가깝지요.”

라틸은 무거운 머리를 손으로 짚고 눈을 감았다. ‘네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만큼 사안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복잡한 건 타시르가 흑림의 수장이란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자신을 조사하라 시켰다는 것. 이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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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날 늦은 저녁. 라틸의 명에 따라, 타시르는 흑림의 충성 문서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라틸은 그곳에 찍힌 역대 황제들의 인장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16551073491365.png“진짜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문서와 인장은 전부 진짜였다. 초대 황제의 것도 아버지의 것도. 문서를 살핀 라틸이 인정하자, 타시르는 자신만만해서 물었다.

16551073491398.png“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지요? 어쩌다 보니 오해를 받긴 했습니다만, 흑림은 절대로 선황제 폐하를 모욕한 일이나 암살한 일과는 절대로 관련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렇기에 제 정체를 스스로 밝힌 거고요.”

하지만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16551073491365.png“네 말이 진짜인 건 알겠어. 그렇다고 네 말을 다 믿는단 뜻은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어디 있냐는 듯 타시르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라틸은 다 살핀 문서를 도로 타시르에게 내밀었다.

16551073491365.png“아바마마께서 흑림의 존재를 허락하셨다고 해서, 흑림이 아바마마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라틸이 웃으면서 동의를 구하자, 타시르는 문서를 받아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16551073491398.png“하오면 폐하께서는, 흑림이 선제 폐하를 암살했을 거라 계속 의심하십니까?”

16551073491365.png“꼭 그런 것도 아니고.”

16551073491398.png“?”

16551073491365.png“난 너희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의심하고 있거든. 전반적으로 전부 다.”

16551073491398.png“!”

16551073491365.png“가장 아낀 자식인데다 공식적 후계자였던 나까지 용의자에 올랐어. 그럼 나는 나만큼 아버지 신뢰를 못 받은 모든 사람들을 다 의심해야지. 안 그래?”

타시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딱 잡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감정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라틸은 그에게 정확히 누구누구를 가장 의심한단 말을 하는 대신, 서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16551073491365.png“이거. 확인해 봐.”

16551073491398.png“무엇입니까?”

16551073491365.png“확인해 봐.”

타시르는 조심스레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고,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라틸이 타시르에게 건넨 건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발견한 편지였다. 라틸이 선황제를 죽인 거라 주장하는 편지.

16551073491398.png“이건……?”

16551073491365.png“이것도 네가 남겼어? 아니면 흑림에서 남겼어?”

16551073491398.png“이 질문을 하시려 보여주신 겁니까?”

16551073491365.png“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게 그 편지를 쓴 사람이랑 너뿐이어서.”

16551073491398.png“흑림에서 남긴 편지는 아닙니다.”

타시르는 미간을 찡그린 채 대답하고서 편지를 다시 라틸에게 돌려주었다. 라틸은 편지를 서랍 안에 집어넣으며 타시르를 기민하게 관찰했다. 그냥 둘러댄 말이 아닌지, 타시르 역시 그 편지 내용을 의외라 여기는 기색이었다.

16551073491398.png“확실한 건, 누군가 저희들 쪽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덮어씌우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16551073491365.png“모든 것?”

16551073491398.png“선황제 폐하의 암살, 무덤 훼손, 게다가 범인으로 폐하를 지목하는 것까지 다요.”

16551073491365.png“누가 그랬는지 짐작은 안 가?”

16551073491398.png“적이 많아서요.”

타시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16551073491398.png“선제 페하의 밀명 아래 행동한 게 많다 보니, 황실과 공통의 적도 많습니다.”

16551073491365.png“그래.”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를 어떻게 부강하게 할지, 국민이 어떻게 더 질 좋은 삶을 누리게 할지 등등을 고민해도 모자랄 판인데. 즉위 후부터 내내 이런 일들에 휘말리니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겨 있자니, 타시르의 시선이 계속해서 와 닿았다. 라틸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타시르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라틸을 응시하고 있었다.

16551073491365.png“왜? 할 말 있어?”

라틸은 그가 뭔가 떠오른 게 있나 싶어 물었다. 타시르는 대답 대신 라틸의 책상 앞까지 다가와서는, 책상 위에 팔을 괸 채 쪼그리고 앉았다. 부하가 하기엔 격의 없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라틸이 쳐다보자, 타시르는 조용히 항의했다.

16551073491398.png“저를 너무 부하로만 보시는 거 아닙니까?”

16551073491365.png“뭐?”

16551073491398.png“시작이야 어쨌든 저도 폐하의 남자입니다.”

16551073491365.png“!”

16551073491398.png“그런데 제가 흑림이란 걸 알려드렸을 때부터…….”

가만히 응시해오는 타시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16551073491398.png“자꾸 저를 부하들 대하듯 하시네요.”

16551073491365.png“이 와중에 이래야겠어?”

16551073491398.png“이 와중에 안 이러면, 정보만 빼가시고 정은 다른 놈들한테 보내실까 봐.”

라틸이 황당해서 쳐다보자, 타시르는 돌연 눈꼬리를 휘어 웃고는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일으켰다.

16551073491398.png“선대 폐하께야 어찌했든, 이번에는 흑림의 수장으로 계약을 한 게 아니라 폐하의 남자로 계약한 것이니까요.”

라틸은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으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16551073491365.png“그래서.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남자로 대해주는’게 뭔데?”

허리를 숙인 타시르의 얼굴이 라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라틸은 그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늘 약에 취한 눈이라 생각했는데. 아주 가까이에서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게, 안구에는 탁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16551073491398.png“입맞춤? 쓰다듬? 원하신다면 그보다 더한 거?”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타시르의 까만 머리카락에 손을 뻗어 벅벅 문질렀다. 거칠거칠한 머리카락이 손끝에 착착 달라붙었다.

16551073491398.png“……애정이 안 들어가 있는데요. 제 머리가 수세미입니까.”

16551073491365.png“쓰다듬어 달라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타시르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 * * 이런저런 일들로 머리가 복잡해져서 쉽게 잠들 수가 없어서, 라틸은 새벽에 홀로 빠져나와 천천히 정원을 산책했다. 뒤를 따르는 건 서넛뿐이었다. 라틸은 말없이 걸어가다가 힐긋 서넛을 쳐다보았다. 항상 그랬지만, 서넛은 입을 다문 채 라틸만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눈가에 미소를 띤 채 “왜 그렇게 봅니까?” 하고 물었다.

16551073491365.png“방금 알아차린 건데. 서넛 경은 내가 말 걸기 전엔 웬만하면 먼저 말 안 겁니다?”

16551073663198.png“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

16551073491365.png“그러니까. 항상 그런 건 아닌데 자주 그럽니다.”

왜 그러지? 라틸이 고개를 갸웃하자, 서넛이 자연스럽게 뒤에서 라틸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웃었다.

16551073663198.png“항상 붙어 다니는데 수시로 말 걸면 귀찮으실까 봐.”

16551073491365.png“안 귀찮습니다.”

16551073663198.png“아직 수시로 말을 안 걸어 봤으니까요. 제가 계속 말 걸면 귀찮아지실 겁니다.”

16551073491365.png“아닌데?”

16551073663198.png“그럼 이제부턴 계속 말 걸어도 됩니까?”

16551073491365.png“음…… 안 됩니다.”

라틸이 갑자기 확 말을 바꾸며 짓궂게 웃자, 서넛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16551073663198.png“사람 심장 그렇게 들었다 놨다 하시는 건 치사합니다.”

16551073491365.png“서넛 경 심장이 이 정도에 들리긴 합니까?”

16551073663198.png“모르시나 본데. 저 되게 가벼운 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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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틸은 다시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서넛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아서인가. 아까보다는 복잡한 기분이 많이 풀려 있었다. 라틸은 일부러 하얀 자갈을 뿌드득 뿌드득 소리가 나게 밟으며 물었다.

16551073491365.png“그렇게 심장 가벼운 사람이 왜 아직 결혼 안 했습니까?”

16551073663198.png“…….”

그런데 이 질문을 하는 순간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져 버렸다. 라틸을 발장난을 치며 걷다 말고 돌아보았다. 서넛이 무거운 표정으로 억지 미소를 지은 채, 다시 뒤에서 느리게 따라오고 있었다.

16551073491365.png‘옆에 있더니. 왜 갑자기 또 뒤로 갔지?’

16551073491365.png“서넛 경?”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의아해서 부르자, 서넛은 그제야 표정을 다시 바꾸고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16551073663198.png“첫사랑이 아파서 그럽니다.”

첫사랑? 라틸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넛에게 첫사랑이 있던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라틸이 기억하는 서넛은 언제나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는 이였다. 휴식 시간에는 레안과 있거나 라틸을 찾아왔다. 그런 서넛에게 첫사랑이라니…….

16551073491365.png“첫사랑이 누굽니까?”

16551073663198.png“그 사람. 벌써 결혼했습니다.”

호기심에 질문을 던졌던 라틸은 서넛의 덤덤한 대답에 ‘아아’ 소리를 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결혼했구나. 상대가 미혼이건 기혼이건 상관 없단 귀족들도 많고, 상대가 기혼이라는 데 더욱 불이 붙어서 투지를 불태우는 귀족들도 많았다. 하지만 라틸이 아는 서넛은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라면 그냥 농담조로 넘어갔을 텐데. 지금의 서넛은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좀 아파 보이기도 했다. 이럴 때 상대의 아픈 사랑을 농담거리로 취급하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16551073491365.png“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라틸은 머뭇거리면서 진심으로 말했지만, 서넛은 이번에도 아프게 웃었다.

16551073663198.png“없습니다,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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