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2020.07.05.
서넛은 웬만한 일로는 절대로 심각하단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저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당장 들어야 할 일이 틀림없었다.
“알았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얼른 일어났다.
“가자.”
라틸이 밖으로 나가자, 클라인의 수행원이 불안해하는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였다. 기사단장이 갑자기 안으로 들어가자 무슨 일인가 싶어 초조한 듯했다. 그러다 아예 황제가 같이 밖으로 나오자, 수행원은 놀라서 라틸을 붙잡았다.
“폐하, 지금 가시면…….”
그러나 기사단장의 얼음 같은 시선에 수행원은 뒷말을 다 잇지도 못했다.
“클라인 좀 잘 위로해주어라.”
“예?”
“나는 바쁜 일이 있어 급히 가야 해. 클라인은 지금 욕실에 있으니, 나오면 네가 대신 달래다오.”
“하지만…….”
이곳에 온 후로 내내 폐하만 기다린 분인데, 이렇게 훌쩍 가버리시면…… 수행원은 라틸을 간절히 바라보았으나, 황제는 기사단장을 데리고 휑하니 가버렸다. 수행원과 악시안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다가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아직 클라인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수행원은 클라인에게 황제가 갔으니 그만 나오라 해야 할지, 아니면 기다렸다가 말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아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잠시 뒤. 문이 느리게 열리더니 클라인이 욕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가만히 있어도 잘난 모습이 막 세수까지 한 탓인가, 머리카락에 물기가 촉촉하게 달라붙어서 평소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게다가 안에서 향수를 뿌린 건지 몸에서 은은하고 달콤한 과일향이 풍겨왔다. 황자가 목욕 가운을 느슨하게 입고서 나오자, 수행원은 눈물이 날 뻔했다.
“뭐야? 너희가 왜 여기 있어?”
아직까지 사태를 모르는 클라인은 영문을 모른 채 수행원과 악시안을 번갈아 보았다.
“폐하는?”
시선이 라틸이 기다리고 있던 침대로 향했다. 그러나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폐하2’라는 명찰을 단 곰돌이 인형만 댕그라니 놓여 있을 뿐. 클라인은 사색이 되어서 물었다.
“이거 보고 화나서 가셨어? 그런 거야?”
“아닙니다, 전하. 폐하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돌아가셨습니다.”
“급한 일이라니?”
클라인은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이 밤중에 날 두고 가버리실 만큼 급한 일이 뭔데?”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사단장이 직접 폐하를 모시러 온 걸 보니, 정말, 아주, 아주 많이 긴급한 일로 보였습니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수행원은 일부러 좀 과장해서 말했다. 이렇게 말해야 클라인이 덜 상처받을 것 같아서.
“…….”
그러나 이미 클라인은 충분히 상처받은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클라인의 머릿속엔 ‘아주 많이 급한 일’보다 라틸의 뒤를 늘 졸졸 따라다니는 그 기사단장의 반듯하고 잘난 얼굴만 떠올랐다. 클라인은 주먹을 꽉 쥔 채 빈 침대를 쳐다보다가, 목욕 가운을 벗어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폐하!”
“목욕할 거다. 들어오지 마.”
“목욕은 아까 하셨…… 예.”
욕실에 들어간 클라인은 문을 단단히 닫고서 문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가가 뜨끈하고 심장이 덜 반죽된 밀가루 반죽처럼 퍽퍽했다.
* * * 클라인이 자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리고 지금 얼마나 실망하고 있는지 모르는 라틸은 빠른 걸음으로 하렘의 도넛형 건물을 빠져나가면서 서넛에게 물었다.
“무슨 급한 일입니까?”
“힛라 노신관이 살해당했다 합니다.”
“!”
보통 급한 일이 아닐 거라 짐작은 했지만, 서넛이 전한 건 예상 외로 더욱 좋지 않은 이야기였다. 라틸은 우뚝 멈추어서서 확 서넛 쪽으로 돌아섰다.
“누가 살해당해?”
“……힛라 노신관이 살해당했습니다.”
힛라 노신관이 라틸의 부름을 받고 궁전에 온 건 오늘 낮이었다. 오늘 낮. 그런데 지금 살해당했다고? 아직 수도에서 멀리 떠나지도 않았을 텐데? 아니, 어쩌면 아직 수도 안에 있을 수도 있는데?
“어디서요? 누구한테? 범인은?”
서넛은 손으로 길을 가리켰다.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좋지 않았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걸어갔다.
“신관은 수도를 빠져나가 마차로 15분쯤 이동한 뒤 살해당했습니다.”
“흑마법사가 죽인 겁니까?”
“시체에는 그런 흔적은 없었습니다. 마부와 수행원이 모두 죽어서 범인이 누군지는 오리무중입니다. 그리고…….”
“또 뭡니까.”
“폐하께서 대신관에게 전하라 건네신 편지가 사라졌답니다.”
집무실로 돌아가는 긴 회랑에서 라틸은 다시 한 번 우뚝 멈추어섰다.
“노신관이 대신관에게 전하기로 한 그 편지?”
“예.”
라틸은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거칠게 의자를 빼서 앉고는, 시종장을 불러 오라 지시했다. 그러고는 시종장이 불려올 때까지 혼자 생각에 잠겨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종장이 오고서도 거의 30분 가량이 지나서야 라틸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일단 이건 확실하네요. 범인은, 내가 대신관을 불러오길 원하지 않는단 거.”
시종장은 라틸이 상념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다가 얼른 물었다.
“흑마법사들이 선제 폐하 시해범과 관련이 있을까요?”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들이 황제시해범이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묻혀갈 수 있는데, 굳이 제게 존재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요?”
드러내도 그냥 드러내는 게 아니라, 무덤을 훼손한다거나 ‘너 때문에 황제가 죽었다’는 편지를 적는다거나, 가짜 범인을 보낸다거나 하나같이 기가 막힌 일들 뿐이었다. 사방이 적인 그들이 굳이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 폐하를 시해한 범인들과는 관련이 없겠군요?”
“그것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들 악행을 소문내면서 즐거워하는 미친놈들도 있으니까요. 뭐, 몰살당했던 집단이니 ‘우리가 돌아왔다!’ 이런 신호를 보내려는 걸 수도 있고…….”
여러가지 방향을 동시에 생각하다보니 오히려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해범이 따로 있고,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은 건? 아니, 틀라 이름을 꺼냈지. 혹시 틀라가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았나? 틀라가 부황을 살해한 게 나라고 오해해서 복수를…… 아니, 틀라는 죽었어.’
게다가 사이가 나쁘긴 해도 틀라 역시 알았을 것이다. 라틸은 아버지가 오래 살아 있고 황태녀로 오래 머물수록 유리한 입장이었단 걸. 사이가 나쁘긴 하지만, 라틸은 틀라가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멍청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대체 누구지?’
시종장과 서넛이 옆에서 여러 가지 의견을 같이 냈으나 이렇다 싶은 게 없었다. 범인을 찾아내라 명령은 했으나, 라틸은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범인을 잡을 수 없으리란 것을. 굳이 수도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인적 드문 곳에서 살해한 것만 보아도 상대의 준비가 철저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한참 생각하던 라틸이 다시 입을 열자, 시종장과 서넛이 조사 방향을 두고 의견을 나누던 걸 멈추고 라틸을 쳐다보았다.
“대신관은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적들은 그걸 막으려고 힛라 노신관을 죽인 거니까. 막으려던 걸 해야죠.”
“옳은 말씀입니다.”
시종장은 라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노신관이, 대신관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고…….”
“우리는 모르죠.”
“?”
“하지만 대신관 본인은 알겠지.”
“설마…… 폐하?”
“라트라실 황제가 대신관을 초청한다고, 대놓고 아예 공표를 해버리세요.”
서넛이 놀라서 물었다.
“그러면 노신관을 살해한 범인이 폐하를 노리지 않을까요?”
라틸은 코웃음을 치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쓴 편지를 훔쳐 갔잖아요. 내가 대신관 찾는 건 이미 범인도 알 건데요 뭐.”
* * * 다음 날. 라틸의 명령에 따라 온 나라에 대신관을 찾는 공문이 붙었다. 사람들이 동요할 걸 우려해서 흑마법사나 저주, 암살 이야기는 쓰지 않았으나, 라틸은 대신관 정도 되는 이라면 힛라 노신관이 살해당했단 건 이미 알리라 생각했다. 정체를 철저하게 숨기는 사람이 자기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을 아예 방치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라틸은, 대신관이 몸을 사리느라 자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으리란 가능성도 내내 염두에 두었다.
“흑마법사라 소문난 사람들은? 잡아 왔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대신관을 기다리고 난데없는 흑마법사 건을 고민하느라, 라틸은 며칠 전 자신이 클라인의 방에 갔다가 말없이 돌아와버린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러나 클라인은 여전히 그날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 * * * 타리움 제국에 온 후, 클라인은 불쾌한 일들을 연달아 겪었다. 라나문이라는 재수 없는 놈은 클라인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해댔고, 게스타란 무말랭이한테는 물벼락을 맞았고, 그 무말랭이의 시종은 자기 주인이 물 쏟은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면서 자기 주인이 물벼락을 맞자마자 눈이 뒤집어지더니 다짜고짜 찾아와 폭언을 퍼부었다.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소중한 부적은 사라져버렸고, 이 일 때문에 즉위 축하 연회를 준비하는 일을 무말랭이와 눈 퀭한 놈한테 뺏기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황제가 그를 찾아와 놓고서는 잠시 욕실에 들어간 틈에 말도 없이 가버렸다. 또. 또. 또. 카리센에서도 말없이 모국에 돌아가 놓고서는, 이번에도 말없이 자기 방에 돌아가버린 것이다. 클라인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성격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남의 나라에 후궁으로 왔다고 나름대로 꾹꾹 성격을 누르고 다듬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쾌한 일들이 축적되자 클라인의 인내심은 한없이 가늘어져서, 누구든 건드리기만 하면 툭 끊어지기 직전으로 변했다.
‘제발 아무도 우리 황자님을 안 건드려야 할 텐데…….’
이를 아는 클라인의 시종은 절벽에 줄 하나를 매어 놓고 걷는 것처럼 살벌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결국 누군가 그 줄을 흔들고 말았다. 날씨가 덥고 햇빛은 화창한 날씨였다. 클라인이 혼자 방 안에서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자, 수행원과 악시안은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황자를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정원이라도 좀 거니시지요.”
“황자님, 이 안에 틀어박혀 있어봐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안에 있으면 폐하의 눈에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가까스로 황자를 데리고 나와 도넛 모양 건물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는데, 저편에서 게스타가 자기 시종을 데리고 걸어오는 게 아닌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다더니, 클라인과 게스타 역시 딱 길 하나에서 마주치고말았다. 입궁한 이래 내내 사이가 나빴던지라, 클라인과 게스타는 물론 두 사람의 시종들까지도 다들 표정이 굳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비켜.”
다행히 이번에는 클라인이 게스타와 싸울 여력도 없어서 시름시름 말하고 손을 저었다.
“꺼져.”
물론 평소보다 힘이 빠져 있을 뿐 여전히 말은 거칠었다. 그러나 게스타는 비키지도 꺼지지도 않았다.
“폐하께서 클라인 님을 찾아갔다가, 5분도 있지 않고 나오셨단 이야기를 들었어요……. 클라인 님, 안색이 나쁜데. 혹시 그 일 때문이실까요……?”
그러기는커녕 게스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픈 상처를 헤집자, 클라인의 이마에 파랗게 힘줄이 올라왔다.
“뭐야?”
“저…… 하지만 클라인 님은 아주 잘생기셨으니 곧 폐하께서 찾아주실 거예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이어서 게스타는 위로하듯 말하고서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그 목소리는 조곤조곤한데다 상냥했으나, 클라인에겐 칠판을 긁는 소리만큼 끔찍하게 들렸다. 클라인의 머릿속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밧줄은 이미 뚝 끊어진 후였다.
“이 새끼가 사람을 놀리나!”
* * * 타시르에게 흑마법사에 관련된 일을 물어보려 하렘에 찾아온 라틸은 기가 막힌 꼴을 보고서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사고뭉치 진짜…… 망아지야?”
클라인이 게스타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고, 게스타는 머리카락이 뽑히다 못해 목이 뽑히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게스타의 시종 겸 호위 트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클라인을 떨어트리려 했으나, 클라인의 호위인 악시안에게 가로막혀서 게스타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황자님, 안 돼요, 황자님, 안 보이는 데서 때리세요!”
클라인의 호위는 자기 주인을 말린다고 말리는데 이런 소리나 할 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클라인!”
라틸이 차갑게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다섯 사람은 서로를 놓고서 황급히 떨어졌다. 온갖 일이 겹치면서 머리가 아프기는 라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클라인, 재수 없는 전 남자친구의 동생인 클라인이 와서 내내 소란을 부려대자 라틸은 무척이나 화가 났다. 클라인처럼 분노를 대놓고 토해내진 않았으나, 눈빛이 평소보다 가라앉았다.
“게스타 시종. 네 주인을 데려가라.”
그래도 게스타 앞에서 클라인에게 모욕을 줄 수는 없었던지라, 라틸이 우선 게스타와 그의 시종에게 명령했다. 황제가 명령하자마자 트리는 얼른 게스타를 부축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라틸은 차가운 목소리로 클라인에게 물었다.
“넌 자제심이라는 게 없는 거냐?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왜 다른 사람 머리를 쥐어뜯어?”
“하지만 그 구렁이 같은 게 절 놀렸습니다!”
“그럼 너도 같이 놀려! 주먹을 놀리지 말고 입을 놀리라고!”
“저는……!”
“그게 안 된다면 돌아가. 난 후궁을 들인 거지 망둥이를 들인 게 아냐. 너 같은 망둥이는 필요 없다. 당장 짐 싸서 너네 나라로 돌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