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난 쉽게 다룰 수 있는 남자가 아니야!2020.07.08.
“황자님…… 진짜로 짐 싸십니까?”
클라인이 거대한 가방을 가져다 두고 거기에 옷가지를 마구잡이로 욱여넣자, 시종인 바닐은 허공에 대고 손을 어색하게 휘저으면서 끙끙거렸다.
“폐하께서 진짜 가라고 그런 말을 하신 것 같진 않던데요.”
클라인은 가방을 내려놓고서 목에 핏대가 선 채 외쳤다.
“가라잖아!”
“그게…… 물론 가라고는 했지만……”
“짐 싸서 돌아가라잖아!”
“그게…… 물론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가라니 갈 거다. 쉽게 이별을 입에 담는 사람은 나도 싫다.”
값비싼 옷들이 가방 안에서 엉망으로 구겨지자 시종은 저절로 에구에구 소리가 나왔다. 그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다가 옆에 선 악시안에게 얼른 눈짓했다. 그쪽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 좀 어떻게든 말려보라고.
“황자님.”
그 매서운 시선에, 악시악은 결국 앞으로 나서며 클라인을 말렸다.
“폐하께서 홧김에 하신 말일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
“그렇더라도 갈 거다. 내가 가면 폐하께서도 말을 함부로 한 걸 후회하겠지. 사과하는 사절단을 다섯 명 보내기 전엔 돌아오지 않을 거다!”
“돌아올 생각이 있긴 하시군요.”
“시끄럽다!”
클라인이 폐하2 인형까지 챙기자 바닐은 악시안의 등을 조급하게 마구 두드렸다. 더 말려 봐, 빨리, 빨리. 악시안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나섰다.
“황자님.”
원래는 ‘진정하시지요’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악시안은 클라인이 쉽게 진정할 것 같지 않자, 결국 미움 사는 걸 감수하고 강력한 수를 두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하이신스 폐하께서 난처해지실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예상대로 클라인이 우뚝 행동을 멈추더니 휙 고개를 돌렸다. 눈에서 부리부리하고 매서운 기미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악시안은 클라인의 가방 속에서 폐하2 인형을 꺼내며 최대한 덤덤하게 설명했다.
“황자님은 단순한 후궁이 아닙니다. 황자님이 여기에 온 건, 두 나라의 수교를 위해서 아닙니까.”
“아니.”
“……하이신스 폐하께선 그래서 보내셨을 겁니다. 그런데 황자님이 이렇게 가버리시면, 카리센의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클라인은 공부를 못했으나 멍청하진 않았기에 충분히 악시안의 말을 알아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클라인이 손을 멈추고 쳐다보자, 악시안은 망설이다가 폐하2 인형을 클라인의 품에 안겨주었다.
“같은 이치로, 라트라실 폐하께서도 황자님을 이렇게 간단히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일단 기다려 보시지요.”
* * * 라틸은 화를 다스리기 위해 잠시 정원을 서너 바퀴 돈 후에야 원래 목적한 타시르의 방으로 걸어갔다. 서넛은 그 뒤를 따라가다가 라틸의 표정이 풀릴 때쯤 물었다.
“폐하. 클라인 황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질문 내용과 달리 그리 걱정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라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번쯤 따끔하게 말해두는 게 낫습니다. 그 황자가 누굴 때리는 걸 본 게, 내 눈에만 두 번이었습니다. 안 보이는 데선 얼마나 때려대겠습니까?”
“의외로 두 번 때렸는데 두 번 다 들킨걸지도 모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라틸이 되묻자 서넛은 생각해보다가 웃었다.
“가능성이 낮긴 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라틸은 타시르의 방 앞에 도착했다. 별다른 언질 없이 낮에 찾아와서인지 타시르의 방 앞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폐하!”
타시르가 데려온 부하는 부르는 소리에 복도로 나왔다가 라틸을 보고는 너무 놀라서 제자리에서 뜀박질까지 할 정도였다.
“타시르는?”
“안에 계십니다. 소단주님!”
부하가 안을 향해 황급히 외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타시르가 “왜?” 하고 물어보면서 문 밖으로 얼굴만 들이밀었다. 부하가 눈짓으로 라틸을 가리키자 타시르는 잠깐 놀란 표정을 하더니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이 시간에 폐하를 뵈니 기쁘군요.”
* * * 타시르의 방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틸은 아무 생각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가, 뜻밖의 풍경에 놀라 신기하게 둘러보았다. 타시르의 방 안은 하렘 후궁의 방이 아니라 학자의 방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학자가 아니라, 책과 공부에 미친 학자의 방처럼.
“이게 다 뭐야?”
라틸이 책꽂이를 틈도 주지 않고 빽빽하게 채운 책들을 보며 묻자, 타시르는 찻잔을 들고 다가오다 대답했다.
“상단 일에 관련된 책입니다. 계속 상단 후계자로 있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새로운 정보는 계속 확인해야 하니까요.”
이 방은 라틸이 타시르를 직접 만나보고서 ‘마약상 같은데?’라고 생각하기 전, 편견 속에서 상상해 본 지적인 타시르에게 어울릴 법한 방이었다. 라틸은 그 생각을 하자 괜히 우스워져서 히죽히죽 웃다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서 얼른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전에 내가 알아보라던 건? 알아 봤어?”
“연회 이야기는 아니실 테고. 틀라 황자에 대한 건입니까?”
“어.”
“지금으로서는 아직 틀라 황자와 선제 폐하 사이에 이렇다 할 연결 고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타시르가 안타깝단 목소리로 덧붙였다.
“얼른 해결하고 약조대로 품어달라 청하고 싶은데. 아직 좀 멀었군요.”
그가 자기 옷 쇄골 부위를 두 손가락으로 조금 들어올리더니 과장되게 팔랑거리는 바람에 라틸은 웃을 뻔했다. 하지만 아까 클라인과 싸운 일이 라틸의 미소를 막았다. 게다가 지금은 후궁과 노닥거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로 온 게 아니던가.
“타시르. 넌 흑림으로 활동했으니 온갖 것들을 많이 보았겠지.”
“수없이 보았지요.”
“혹시 흑마법사라거나, 그런 쪽 일에 대해선 몰라?”
“제가 아는 것들은 폐하께서도 이미 아는 내용일 겁니다. 흑마법사니 어쩌니 하는 이들이 사라진 지 이미 500년이 되었지 않습니까.”
‘역시 다 이렇겠지.’
그런데 라틸이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서 나중에 또 오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타시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꺼냈다.
“폐하께서 밤에 클라인 님을 찾아가셨다가 5분만에 나가신 일로, 클라인 님이 많이 놀림거리가 되셨습니다.”
라틸이 ‘네가 그 얘기를 왜 해?’란 눈으로 보자 타시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서 클라인 님에게 꺼지라 한 이야기가 벌써 여기까지 들어와서요.”
“벌써 들어온 거야, 벌써 알아낸 거야?”
“이번엔 전자입니다.”
“…….”
“그날 밤, 클라인 님이 밤새도록 정원에서 우셨습니다. 그 탓에 폐하께서 클라인 님을 버리고 간 일을 모두가 알게 되었죠.”
“!”
“클라인 님이 게스타 님을 때린 건 잘못된 행동이지만, 최근에 부적 사건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일이 겹쳐져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폐하.”
라틸은 흥미로운 눈으로 타시르를 바라보았다. 이런 얘길 게스타가 하면 그러려니 할 텐데, 타시르가 하자 재미있었다. 별로 남을 두둔해 줄 사람 같이 안 보이는데.
“황자님도 이번 일로 많이 반성했을 테니,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시지요.”
* * * 라틸이 떠나자마자 타시르의 부하인 히얼란은 자기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몸을 비틀었다.
“소단주님, 미쳤습니까? 지금 후궁들 중에 폐하와 합방하지 못한 사람은 딱 둘이라고요! 그 중 하나가 소단주님이고요! 누가 누굴 돕는 겁니까?”
“뭐 어때. 사실을 알려준 것뿐인데.”
“용서해달라고 대신 청했잖아요!”
히얼란은 미친 멧돼지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돌진하더니 털썩 주저앉아 ‘아이고 아이고’ 하며 카페트를 두드렸다.
“뻔뻔함은 어디에 파시고 왜 갑자기 순한 후궁이 되신 거냐고요! 소단주님은 그 꼬집어주고 싶은 뻔뻔함이 매력이란 말입니다! 소단주님 매력은 그거 밖에 없어요! 그 얼굴론 순하게 굴어봐야 ‘이 새끼, 무슨 계략이지?’ 이런 생각밖에 안 든다고요!”
“…….”
타시르가 빤히 쳐다보자 히얼란은 아차 싶은지 얼른 말을 바꾸었다.
“너무 잘생기셔서요. 너무 잘생겨서 그렇게 보인다고요.”
타시르는 기도 차지 않는단 듯 혀를 차고서 안락의자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머리를 써라 머리를.”
“네, 머리는 제가 쓸 테니 소단주님을 제발 몸을 쓰세요! 옷 좀 벗고 다니세요! 폐하께 그 멋진 몸을 보여주시라고요! 제가 소단주님 옷을 다 찢어둘 겁니다! 폐하 앞에서 자연스럽게 훌라당 벗겨지게요!”
또 이성이 반쯤 나간 듯한 부하를 쳐다보며 타시르는 혀를 찼다. 저놈은 일은 빠릿빠릿 잘하는데, 마음대로 안 풀리면 저렇게 바로 고장나버린단 말이야.
“히얼란. 내가 황자를 도운 이유는 두 가지나 돼. 정신 차리고 그만 진정해.”
“그게 뭡니까? 그렇게 잘생긴 연적을 도와야 할 이유가 어떻게 두 가지나 되는데요?”
“말했잖아. 난 클라인 황자와 가까워져서 하이신스 황제 성격에 대해 알아낼 거라고.”
“아……! 그랬었죠.”
“그러니 오늘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은 뭘까?”
“하렘 안 사람들한테 하소연을 해야죠. 우리 소단주님은 클라인 황자님과 친하지도 않은데, 왜 기껏 찾아온 폐하께 클라인 황자님을 용서해주란 얘기나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좋아. 이제 제정신이 돌아왔구나.”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뭡니까?”
“내가 말했지? 게스타가 겉보기엔 순한데, 사실은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예.”
“그런 구렁이 같은 성격은 먹잇감을 늘 물색하면서 다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미지를 메이킹하려면 돋보이게 할 상대가 필요하거든.”
“그렇죠…….”
“클라인 황자가 없어지면, 아마 다음으로는 자기 본성을 알게 된 날 노릴 거다.”
“!”
“그러니 내가 황자를 지켜줘야지.”
타시르의 설명이 끝나자 히얼란은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고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단합니다, 소단주님! 과연 비상하세요! 소단주님이 착해졌을까 봐 염려한 제가 바보였네요!”
“그럼. 알았으면 그 뭐야, 그거나 해봐.”
“차를 가져올까요? 커피? 과자? 케이크? 머리가 잘 돌아가려면 역시 당이 필요하죠?”
“폐하 앞에서 자연스럽게 훌렁 옷 벗겨지게 할 수 있다면서. 그거 해보라고.”
“!”
* * * 업무 때문에 집무실로 돌아왔지만, 라틸은 내내 타시르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사실 라틸은 자신이 클라인을 두고 와버린 일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타시르가 그 점을 지적하고 클라인이 밤새 울었다고 하자, 새삼 그때 일이 미안해졌다. 척 보기에도 자존심 강한 성격인데 정원에서 대놓고 울 정도면 얼마나 충격을 받은 걸까. 결국 라틸은 고민 끝에 비서에게 지시했다.
“온실에서 개망초로 꽃다발을 만들어와라. 포장을 화사하게 하고, 리본도 좀 예쁘고 반짝반짝하게 달고 해서.”
그리고 그날 저녁. 라틸은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서 클라인을 찾아갔다.
‘응?’
그런데 클라인의 방문 앞에 도착해서 보니, 그의 시종이 나와 있지 않았다. 다른 후궁들은 시종을 앞에 보내두거나 자기가 직접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온단 이야기를 제대로 전한 게 맞느냐?”
라틸이 자신이 심부름을 시켰던 시종에게 묻자, 시종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밤 9시 쯤 폐하께서 찾아오실 거라고 확실히 알렸습니다.”
“그런데 왜 애가 안 보여?”
“그게…….”
시종이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시종이 입을 뻐끔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서넛과 교대해 오늘밤 라틸의 곁을 지키게 된 근위기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곤해서 잠드신 게 아닐까요?”
“시종이랑 같이?”
라틸은 고개를 기웃하면서 자신이 들고 온 하얀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 * * 그 시각. 클라인은 문에 귀를 대고 달팽이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잠들긴 커녕 두 눈은 또랑또랑했고, 귀 역시 문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클라인은 라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웬만하면 그냥 열어 주시지…….”
바닐은 그 행동이 참 무의미하게 여겨져서 초조하게 중얼거렸으나, 클라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황자님, 그러다 폐하가 그냥 가시면 어쩌려고요…….”
“설마. 노크라도 하시겠지.”
“…….”
“피곤한가 보다, 그냥 가자, 이러고 가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클라인은 꿋꿋하게 문에 귀만 대고서 라틸이 노크하길 기다렸다. 그러면 칼 같이 침대로 달려가서 잠든 척 눈 감고 있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애태웠으니, 그 역시 라틸에게 자신이 다루기 쉬운 남자가 아니란 걸 보여주어야 했다. 잠든 자신은 그림처럼 아름다우니 황제는 아마 초조해져서 막말을 퍼부은 걸 후회하겠지. 클라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 클라인의 귀로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급히 보고해야 할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서넛 경? 무슨 일입니까?
-여기서 말씀드리긴 곤란한 일입니다.
클라인은 도끼눈을 떴다. 서넛? 전에도 저놈이 황제를 찾아와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방에서 데려가지 않았나? 그놈이 또 왔다고?
‘저 자식이?’
클라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문을 쾅 열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