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저도 아파요2020.09.02.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지? 라틸은 잠시 싸한 눈으로 백화랑술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장난하나 싶었다. 기껏 대신관을 하렘에 감춰두었는데. 대번에 위치가 들통나게 생기자 화가 났다. 하지만 국교가 없다 해서, 성기사들을 무작정 핍박할 수는 없는 일.
‘일단 대신관이 이미 내 후궁이 됐단 건 모르는 눈치인데……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수도 있다.’
라틸의 귀에도 사람들이 ‘폐하께서 종교를 권력 아래에 두시려나 보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 들려왔다. 라틸은 분노를 누르며 팽팽히 머리를 굴렸다. 1번. 꺼져. 내보낸다.
‘안 돼. 다들 뭐가 있으니 급히 내보낸 거라 생각할 거야.’
2번. 좋아. 환영한다.
‘절대 안 되고.’
3번.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자며 은근히 모른 척?
‘좋아. 이걸로 하자.’
라틸은 결정을 내리자 웃으면서 알현실 뒤로 난 문을 가리켰다.
“일단 무슨 얘긴가 한 번 들어보지. 따라오게.”
라틸이 나가고 백화랑술도 그 뒤를 두 줄로 서서 따라 나가자, 숨 죽이고 있던 귀족과 관리들은 다들 놀란 얼굴로 서로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들으셨습니까? 대신관이요? 분명 대신관이라 했지요?”
“세상에. 결혼으로 대신관을 품으려 하시다니. 폐하께선 몇 수까지 계산하고 움직이시는 걸까요.”
“국혼 정책을 펼치시려나 봅니다.”
“우리한텐 나쁠 게 없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아주 깊으니까요.”
“지금 남은 권력자들은 다 다른 사람을 지지하다가 폐하께 간 이들 아닙니까. 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폐하만의 세력을 만드려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대신들은 사실 선황의 사람들이었고, 레안 황태자의 지지자들이었고, 내색하진 않았으나 틀라를 마음으로 지지했던 이들이었다. 라틸은 황태녀로 있던 기간이 짧은 데다 암살 전까지 선황이 젊고 정정하다 보니,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 시간이 없던 탓에 그런 이들을 모아 대신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능력과 경험을 고려해 만든 인선이지만, 어쩌면 황제는 이런 구도가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황제가 신전과 대신관을 이용해 자기만의 세력을 구축하려는 건지도 모른다고, 꿈보다 해몽이 더 대단한 해석을 내어놓았다.
* * *
“성기사들은 식당으로 보내라.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플 테니 식사부터 하라 해.”
라틸은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뭐라 떠드는지 모른 채 우선 방으로 바쁘게 걸어가며 지시했다.
“예, 폐하.”
“함께 식사하면 좋긴 한데. 내가 있으면 불편할 것 같으니, 나와는 식사 후에 얘기를 나누자 말하고.”
“예.”
“나랑 면담할 사람을 한 명에서 세 명 정도 골라두라 하고.”
“예.”
지시를 받은 비서가 뒤로 빠져서 성기사들에게 달려가자, 라틸은 더욱 걸음을 빠르게 했다. 변복하고 하렘으로 가서 자이신을 만날 생각이었다. 이 와중에 자이신을 직접 부르면 사람들이 ‘자이신 님이 대신관이었나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기 전엔 아직 자이신이 대신관이란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틸의 방문 앞. 그곳에는 이미 자이신이 도착해 라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이신? 네가 어떻게 여길?”
“잠시 폐하와 얘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라틸이 자이신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자이신은 자신이 여기에 와 있던 이유를 설명했다.
“백화랑술이 왔단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왔습니다. 폐하께서 절 찾으실까 봐요.”
‘의외로 눈치가 좋구나.’
라틸은 자이신이 순간적으로 내린 판단에 감탄하며 물었다.
“그자들은 어떻게 네가 후궁이 됐단 이야기를 알고 온 거야?”
“제가 ‘후궁으로 들어갈 거다’고 말했거든요.”
“뭐? 진짜야?”
‘어떤 놈이 기밀을 유출했나 했는데, 그게 본인이었다고?’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백화랑술은 제 신변 보호를 해주기에, 제가 어디에 있단 정도는 알려야 해서요. 보통은 그냥 알려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는데……. 이번엔 많이 놀랐나 봅니다.”
“……”
라틸이 대답하지 않자, 자이신이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제가 돌려보낼까요?”
라틸이 이 일을 백화랑술에게 전한 것 때문에 화가 났다 여기는 눈치였다. 화가 난 건 아니지만 일이 꼬인 건 탐탁지 않았기에, 라틸은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돌려보내면? 어쩔 건데? 사람들은 이미 그자들이 대신관 얘길 하며 여기 온 걸 다 봐버렸는데.”
질문이라지만 타박하는 목소리였다.
“그렇군요.”
자이신은 시무룩해서 인정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폐하. 차라리 밝힐까요?”
그 질문은 라틸도 사실 자이신을 찾아가서 제안하고 싶던 것이었다. 하지만…….
“괜찮겠어? 널 노리는 이들이 많아서 여기 숨은 거잖아.”
이런 이유 때문에 자이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던 제안이기도 했다. 다행히 자이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악한 기운이 이미 하렘 내에서 절 노렸지 않습니까. 이번 백화랑술 건도 그렇고, 위치가 들통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들의 호위를 받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 * 라틸은 자이신과 대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비서를 보내, 백화랑술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눌 몇 명을 개인 집무실로 불러오라 지시했다. 그리고 집무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백화랑술의 하얀 제복을 입은 성기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알현실에서 라틸에게 대신관을 지키게 해 달라면서 앞에 나서서 외쳤던 그 사람이었다.
“자네들 주장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았네. 대신관과도 이야기를 나눴고.”
“대신관님께서 이미 도착하셨습니까?”
“이미 후궁이 되어 있지.”
“!”
“호위로 들어와도 좋다. 기타 자세한 얘기는 자이신과 직접 하고…….”
“예.”
“사실 자이신 건과 별개로 그대들에게도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너 이름이?”
“진짜 이름은 아니오나, 다른 이들은 저를 ‘백화’라 부릅니다.”
‘진짜 이름은 알려주기 싫단 건가?’
라틸은 백화가 이름을 묻는데 엉뚱한 대답을 하자 인상을 찌푸렸지만, 원래 신관들은 성직자가 될 때 기존의 이름을 버린다고 들었기에 그냥 넘어가고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 백화. 내가 물어볼 건 말이야. 혹시 그대, 흑마법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백화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라는 표정으로 눈을 똘망하게 뜨고 있다가, 정색하고서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관심 가지실 주제가 아닙니다. 흑마법은 얼핏 유용하고 강력해 보이지만, 그 후유증이 크고 사람들에게 해롭습니다.”
“배우겠단 게 아닌데.”
“하면……?”
“흑마법의 흔적을 보아서.”
“어디서 보셨습니까? 그런 게 있다면 전부 다 잡아 없애 합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데, 아까와 달리 말을 할수록 눈이 위험하게 번뜩거렸다. 라틸은 그걸 보면서 ‘잘됐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무례한 말씀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폐하.”
그 표정을 눈치 챈 백화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얼른 사과했으나,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쪽.”
“예?”
“나랑 만난 적이 있던가?”
백화가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자, 라틸은 손가락을 몇 번 까딱이다가 방긋 웃었다.
“아니. 아니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뭔가가 떠오를 듯 말듯 느낌이 묘했다. 하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라틸은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중요한 건 백화가 흑마법 이야기에 보여준 저 반응이었으니까. 라틸은 그가 흑마법 소리가 나오자마자 보여준 그 적대감,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 틀라가 정말 ‘로드’ 어쩌구가 되어서 사람이 아닌 걸로 부활했다면? 그가 흑마법사들을 이용해 황위를 되찾으려 하는 거라면?
‘나는 성기사들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그럴 것이다. 계산을 마친 라틸은, 자신의 특기인 선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거 아는가?” 하고 말문을 열었다.
“난 신앙심이 아주 깊다네.”
그러고서 한 번 더 웃어주자, 백화가 놀라 되물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내게 있어 신앙심이란 말이네, 그 뭐야. 그…… 그거지. 뭐야. 그거. 있잖아. 좋은 거.”
사실 라틸은 신앙심이 거의 말라붙은 인간이었기에 대충 얼버무렸으나, 백화는 감동 받은 얼굴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흑마법이 강건할 때는 백화랑술의 힘도 비슷하게 세지고 사람들 역시 신앙심이 깊었다. 하지만 흑마법사와 어둠에 속한 이들을 다 처리하고 나자, 아이러니하게도 백화랑술 역시 힘이 쇠하고 사람들의 신앙심도 줄어들었다. 자연스럽게 신전의 영향력도 약해졌고, 요즘은 신전을 자기 힘 아래 두려 하는 왕족과 황족들도 많아졌다. 하여튼 여러모로 여기저기 치이고 있어 화가 나는데, 강대국의 황제인 라틸이 이렇게 먼저 나서서 말해주자 어쩐지 감동이었다. 이래서 ‘대신관님이 황제에게 반했구나’ 싶을 만큼. 그리고 라틸은 그런 백화 표정을 보고서 안심했다. 일단 어떻게든 넘어간 모양이네. 아깐 신앙심을 뭔가 아주 좋은 데 비유하고 싶었는데. 뭐에 비유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갑갑했던 것이다.
“사실 폐하. 아까 알현실에서 처음 폐하를 뵈었을 때부터 좀 놀라긴 했습니다.”
“응? 뭐가 말인가?”
“폐하에게서는 무척이나 반짝거리고 맑은 느낌이 났거든요.”
“나한테?”
“예. 몇 년 전엔가. 사실 신탁이 내려와 딱 폐하 나이대의…… 아차.”
‘내 나이대의 뭐?’
“하하, 이런 일은 관심 없으시겠지요. 게다가 지난 일이니까요.”
“말하다 끊으니까 관심이 갑자기 생기는데.”
“하하 별거 아닙니다. 어쨌든 폐하께선 정말 맑은 분 같습니다. 대신관님이 사모하실 만도 합니다.”
라틸은 백화가 하려던 말이 궁금했으나, 그가 더 설명할 기미가 없기에 결국 호기심을 누르고 넘어갔다. 게다가 백화의 말을 듣고 있자니, 여우가면을 만난 후 조금 찝찝했던 부분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바로 여우가면이 라틸에게 ‘로드’라고 불렀던 그 부분 말이다. 아직도 그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진 모르겠으나, 이걸로 그자는 헛소리를 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대신관은 물론 신만 따른다는 성기사들도 라틸에게 수상한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맑은 느낌’을 받았다지 않은가. 여우가면이 그런 말을 한 건 역시 라틸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 * * 라트라실 황제가 여섯 번째 후궁으로 받아들인 카지노 딜러가 사실은 대신관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다들 라트라실 황제가 하렘을 만든 게 굉장한 정치적 전략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많은 국혼을 통해서 힘을 기르려는 노림수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라틸의 의도를 분석했다.
“흠. 어쩐지. 그런 근육 밖에 없는 몸치한테 왜 관심을 가지시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소문을 들은 아트락시 공작도, 연회장에서 라틸이 라나문을 버려두고 집었던 카지노 딜러가 실은 대신관이었단 이야기를 듣자 가까스로 분노를 좀 가라앉혔다. 하지만 이 소문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건, ‘황제를 유혹해 후궁이 된 평민 출신 카지노 딜러’라며 무시 받았던 대신관 본인이었다.
“저게, 아니, 저분이 대신관님이라고?”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고귀한 인상이다 싶었어.”
“나도. 근데 너희들이 하도 욕을 해대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던 거라니까?”
매일같이 자이신을 무시하던 하렘 궁인들이 태도를 바로 싹 바꿔 버리자, 수행사제는 자이신의 휠체어를 밀어주다 말고 혀를 끌끌 찼다.
“사람들이란 참 간사하네요.”
“어쩔 수 없지. 사람 속은 알기 어려우니, 다들 겉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이걸 탓해 어쩌겠느냐.”
“그래도 너무 확 바뀌잖아요. 얄밉습니다.”
“그만큼 외부의 변환에 민감한 입장이란 거겠지. 너무 사람을 미워하지 말거라.”
“전 수행이 부족해서…….”
그게 잘 안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수행사제는 클라인 일행과 마주쳤다. 수행사제는 전에 클라인이 대신관을 벌레 보듯 쳐다보았던 게 떠올라서 이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펼쳤다. 저 사람도 입장을 바꿔서 대신관님에게 깍듯하게 대하겠지 싶어서.
“너 대신관이라며? 대신관이 여기 왜 와? 꺼져.”
그러나 클라인은 이번에도 딱 잘라 내뱉고 가버렸고, 수행사제는 기가 막혀서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네요. 일관적으로 재수 없는 사람보단 간사한 사람이 좀 더 낫네요.”
* * * 하지만 클라인은 수행사제가 뒤에서 자신을 욕하거나 말거나, 지금 머리를 굴리느라 아주 바빴다.
“그 딜러가 꾀병을 부려서 폐하에게 종일 간호를 받았지…….”
“딜러가 아니라 대신관님이요, 황자님. 그리고 꾀병도 아니었는데요.”
“그거나 그거나.”
“전혀 다르죠…….”
시종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흘려 넘기면서, 클라인은 자기 방에 돌아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바닥에 드러눕더니 시종의 등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그만 칭얼거리고. 넌 빨리 폐하께 가서 내가 아프단 얘기나 전해.”
“예? 편찮으십니까?”
“아니. 근데 아프다고 전해. 빨리!”
꾀병을 부리려 저러시나? 시종이 놀라서 보자, 클라인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재차 재촉했다.
“얼른 안 가?”
“뭐, 뭐 때문에 아프다 하면 될까요?”
“머리가 아파 쓰러졌다고 해. 빨리!”
* * * 라틸은 백화랑술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클라인이 보낸 시종 바닐에게 그가 아프단 얘기를 전해 듣고 놀라서 하렘으로 달려갔다.
‘혹시 그 사악한 기운을 가졌단 놈이 또 내 후궁을 건드린 건가?’
“클라인!”
대신관이 떠밀린 게 며칠 안 된 일이기에 덩달아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황급히 그의 방으로 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클라인은 바닥에 상의를 풀어헤친 채 누워있을 뿐이었다.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모습으로.
“클라인, 너!”
“폐하. 몸이 뜨겁습니다. 열이 나는 듯한데……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