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눈치 없는 사람이 둘이면2020.09.09.
“얘기 좀 하지.”
알현이 끝나고 대기실로 가자마자, 라틸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따라온 그 사신의 팔을 움켜잡았다.
“박력 넘치시는군요.”
얼굴을 가린 하이신스가 놀라는 척 자기가 아닌 척 말했으나 라틸은 넘어가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오지, 카리센에서 온 사신8.”
“왜 팔번입니까?”
“제일 뒤에 서 있었잖아.”
라틸이 턱으로 사람들이 없는 곳을 가리키자, 하이신스는 순순히 따라왔다. 하긴. 황제이면서 사절단 틈에 끼어서 여기까지 온 놈이니 따라오겠지. 카리센 사신 놈들. 오는 길에 아주 고생 좀 했겠는데? 소수 일행 사이에 황제가 끼어 있으니 뭘 슬렁슬렁 하지도 못했겠어. 가장 뒷줄에 선 막내 사신이 알현이 끝나자마자 따라올 수 있던 것도, 카리센 사신들이 이 모자 눌러쓴 사신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겠지.
“폐하.”
서넛이 뒤따라오려 하는 것도 말리고서, 라틸은 아무도 없는 복도로 그를 데려가 모자를 벗겼다.
“역시 너네.”
모자를 벗자마자 갈색 머리카락이 가을날 밀처럼 흘러내렸다. 신비로운 회색 눈동자와 함께 눈가에 고인 미소도 같이 드러났다.
“하이신스.”
라틸은 숨을 멈추고서 하이신스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참 징글징글하지. 어떻게 이 와중에 보고 싶었단 생각이 들 수 있을까. 안 보고 살 때는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대로 몇 년이 더 지나면 정말 잊었을 수도 있었는데. 하이신스의 눈을 보자마자 라틸은 알 수 있었다. 몇 년 간 그를 잊으려던 노력이 또 헛것이 되어버렸단 걸. 아니, 오히려 시간은 안 좋았던 일은 희석시키고 좋았던 일만 머리에 남겨주었나 보다. 라틸은 급격하게 무거워진 호흡을 되찾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여긴 왜 온 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제법 침착하게 들린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이쪽의 마음엔 풍파를 일으켜 놓고서. 하이신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라틸은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걸 통쾌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안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을 버리고 딴 여자와 결혼한 전 애인이란, 과거를 잊고 그 여자와 잘 살면 잘 사는 대로, 과거를 잊지 못해 미련을 뚝뚝 보내오면 보내오는 대로 화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너 진짜 뻔뻔하구나. 양심 어디 갔어? 원래 없던 거야, 있었는데 팔아치운 거야?”
라틸은 분노를 누르며 하이신스의 멱살을 잡고 속삭였다.
“결혼했으면 네 신부나 챙겨. 난 내 후궁들 챙길 테니.”
말을 마친 라틸은 하이신스를 밀치듯 놓고서 확 돌아섰다. 그러나 카리센에서 했던 것처럼 성큼성큼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는 없었다. 하이신스가 직접 여기까지 올 정도면, 무언가 다른 일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보고 싶어서 왔단 헛소린 집어 치우고. 정말 무슨 일로 온 거야? 그 편지 건 때문에 그래?”
하이신스가 대답하기 전.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라틸은 두 걸음 더 하이신스에게서 물러났다. 모습을 드러낸 건 윌랑의 사절단이었다.
“폐하.”
그들 역시 황제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라틸을 보자 얼른 인사를 올렸다.
‘아. 하이신스.’
하이신스가 아직 모자를 안 쓰고 있는데. 라틸은 뒤늦게 아차 싶어서 옆을 보았으나, 그 사이 하이신스는 알아서 얼굴을 잘 가리고 있었다. 다행이긴 한데 얄밉네. 라틸은 속으로만 괜히 툴툴거리고서 윌랑의 사절단을 향해 인사는 그만해도 좋단 손짓을 보냈다.
“여기까지 왔으니 머무는 동안 편히 보내길 바라지. 물러들 가시오.”
“예, 폐하.”
알현실에서와 달리 모두들 순순히 대답했다. 단 한 명. 알현실에서 유독 라틸을 날카롭게 도발하던 그 사신 한 명을 제외하고. 게다가 그 사신은 일행을 따라 다시 가던 길을 가면서도 라틸은 계속 돌아보기까지 했다.
“너한테 반한 모양인데?”
하이신스까지 눈치채고서 놀릴 정도로 노골적이게. 네가 지금 나랑 농담 따 먹기 할 때야, 자식아? 라틸이 어이가 없어 노려보았으나, 하이신스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당부했다.
“표정 풀어, 라틸. 윌랑 사신이 돌아보잖아. 사이 좋은 흉내 내야지?”
“난 네 이런 점이 싫어.”
“그리고 사랑하지.”
“!”
“아닌가?”
윌랑 사절단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라틸은 하이신스의 멱살을 움켜 잡고서 눈을 부릅떴다.
“사랑‘했’던 거지. 현재형으로 말하지 마.”
하이신스를 밀치듯 놓아버린 라틸은 그를 최대한 무시하듯 노려보고서 확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이 마음이 티가 날 것 같아서. 눈치 좋은 하이신스가 이 짧은 틈을 눈치채버릴 것 같아서. * * *
“폐하.”
라틸이 떠나고서도 거의 15분 가량이 지난 뒤에야 하이신스의 근위대장이 나타났다.
“네가 없던 15분 사이에 적이 왔으면 난 죽었겠다.”
하이신스가 작게 질책하자 근위대장은 시무룩해져서 변명했다.
“타리움의 관리에게 걸려서 짐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아. 타리움 관리.”
하이신스는 픽 웃고서 근위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거라면 할 수 없지.”
카리센의 사절단이야 자기와 함께 온 게 황제란 것도, 사절단 호위 중 황제의 근위대장이 있단 것도 알고 있지만 타리움 관리들은 이를 알 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하이신스가 넓은 이해심을 발휘해도 근위대장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폐하. 저는 아직 염려됩니다. 다가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먼 곳까지 자리를 비우셔도 될지…….”
“어떻게든 나오라고 비워준 거다.”
“예?”
“움츠리고서 움직일 생각을 않으니, 움직여 보라고 비켜준 거라고.”
“!”
망토에 달린 까만 모자 아래로 하이신스의 입술 양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게다가 한 번 꼭 와보고 싶었거든.”
“라트라실 황제 때문입니까.”
하이신스는 대답 대신 복도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쭉쭉 걸어가기 시작했다. 근위대장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하이신스를 열심히 따라갔으나, 황제가 향하는 곳이 영 찝찝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폐하? 어디 가십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렘에.”
“폐, 폐하!”
* * *
“이래도 괜찮을까요……?”
하렘 정원을 걸어가면서 근위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위대장은 라트라실 황제에 대해 잘 알진 못했으나, 그녀가 즉위하면서 자신의 이복오빠를 처형시키고 아버지가 총애하던 후궁은 탑에 가두어버렸단 이야기는 들어서 알았다. 그렇다면 좀 무서운 사람일 텐데. 전 애인이 현재 애인들을 만나려 하면 싫어하지 않을까? 그러나 하이신스는 다른 나라 귀족들까지 입을 모아 떠들어대는 라틸의 하렘 속 후궁들을 꼭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폐하아…….”
근위대장이 작은 목소리로 하이신스를 재차 조르는 그때. 말없이 걸어가던 하이신스가 우뚝 멈추어서서 어딘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에 있는 건 천사 같은 얼굴과 호랑이 같은 근육을 가진 남자였는데,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저자가 대신관인가 보군.”
하이신스는 그 천사의 얼굴을 가진 호랑이 근육을 보자마자 바로 정체를 꿰뚫어보고서 중얼거렸다.
“저자가요?”
“특징이 일치해.”
말을 마친 하이신스는 바로 그쪽으로 걸어가며 근위대장에게 당부했다.
“따라오지 마라.”
근위대장은 하이신스 쪽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곧 얼른 손을 내리고서 걱정스럽게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사이. 어느새 하이신스는 대신관의 곁에 거의 도착했다. 대체 뭘 하시려고. 근위대장은 초조해져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물론 하이신스 황제는 클라인 황자와 달리 침착하고 계산적이니, 큰 사고를 치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클라인 황자가 여기에 와 있으니, 누군가 그들을 보더라도 ‘카리센 사신들이 클라인 황자를 만나러 왔나보다’ 생각하긴 할 것이다. 그래도 남의 나라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보니, 하이신스의 안전을 책임지는 입장에선 자꾸 초조해졌다. 결국 근위대장은 조금 더 앞쪽으로 다가가,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언제라도 끼어들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했다.
“실례합니다.”
그러는 동안 대신관의 곁으로 간 하이신스는 아예 대놓고 그를 불렀다.
“네.”
대신관은 떨어진 꽃잎을 줍고 있었는데, 하이신스가 자신을 부르자 조금도 거만해하는 기색 없이 대답해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래. 과연 무슨 일로 왔다고 그럴까. 근위대장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하이신스의 핑계를 기다렸다.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걷기가 힘든데.”
의외로 하이신스가 꺼낸 건 무난한 변명이었다.
“괜찮다면…….”
그리고 뒤에 무어라 덧붙이려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근위대장이 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뒷말은 나오지 못했다. 하이신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신관이 “아 그래요?” 하고 되묻더니, 하이신스의 다리를 한 손으로 덥석 쥐어버린 것이다.
‘으헉. 폐하!’
난데없는 상황에 근위대장은 자기도 모르게 하이신스를 향해 손을 뻗을 뻔했다. 하이신스 역시 대신관이 커다란 손으로 자기 다리를 잡자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아픈 건 머리인데.”
그러나 대신관은 소신껏 다리를 주물거리더니면서 “음. 다리는 괜찮고.” 하고 중얼거리더니, 쪼그렸던 몸을 일으켜곤 이번에는 하이신스를 번쩍 들어올렸다.
“!”
근위대장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봐.”
하이신스 역시 아까보다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대신관을 불렀으나, 대신관은 친절하게 묻기만 했다.
“어디로 갑니까? 내가 데려다 드리지요.”
착하지만 정말 눈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대신관이 하이신스를 데려가게 둘 수도 없어서, 근위대장이 결국 직접 나서려는 찰나.
“오? 로즈타 경 아냐?”
또다른 눈치 없는 누군가 나타났다. 근위대장은 기척도 없이 다가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로즈타 경 맞지?”
역시. 클라인 황자였다. 하필 이 와중에.
“여긴 무슨 일이야? 설마. 사절단 틈에 섞여 따라왔어?”
따라왔죠. 폐하와 함께. 클라인 황자는 퍽 반가운 듯 웃으면서 말을 걸었으나, 근위대장은 무어라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하이신스가 자신의 방문을 클라인 황자에게 알릴지 말지, 그는 아직 주군의 뜻을 모르기에. 그렇게 대답이 조금 늦어진 사이. 클라인 황자는 “아차.” 하고 근위대장의 팔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카리센 황제의 근위대장인 자네가 여기 왔단 건 비밀이어야 하지?”
눈치 없는 놈이 눈치 있는 척 굴면 일이 더욱 꼬이는 법. 지금도 그랬다. 근위대장이 무어라 할 틈도 없이 클라인 황자가 그를 끌어당긴 것이다.
“전하, 저는…….”
당황한 근위대장은 쩔쩔매다가 빠르게 황제 쪽을 눈으로 살폈다. 이를 어쩌지요, 하는 시선을 담아.
“!”
그러나 없었다. 하이신스는 이미 대신관이 어디로 안고 간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폐하!’
* * * 하이신스가 왔지만, 아니, 하이신스가 왔기 때문에 라틸은 더욱더 빠릿빠릿하고 적극적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자신이 하이신스 따위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이런 걸 보여주고 싶어한단 것부터가 휘둘린단 것이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왜 온 거야 하이신스!’ 하고 분노만 토해내는 것보단 나았다. 적어도 라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분량으로 정해둔 할 일을 모두 마친 후.
“카리센에서 온 사절단은 어디에서 머뭅니까?”
라틸은 책상에서 일어나며 서넛에게 차갑게 물었다. 이제 일을 모두 마쳤으니, 하이신스 그놈을 방 안에 꽁꽁 가둬 놓고서 왜 갑자기 나타난 건지 따져야 했다.
“이쪽입니다.”
그러나 카리센의 사절단이 머무는 숙소에 하이신스는 없었다. 방 안을 하나하나 다 확인했는데도.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너희 황제는?”
“예?”
“같이 온 걸 아니 거짓말할 필요 없다.”
하이신스를 찾지 못한 라틸이 결국 대놓고 묻자, 사신이 쩔쩔매며 거짓말을 했다.
“저…… 폐하께서는 이미 주무십니다.”
그리고 대답하는 사신의 거짓말 너머로, 더욱 기막힌 속마음이 들려왔다.
[어쩌지? 대신관이 폐하를 데려갔는데 이후 안 돌아오고 계신다고는…….]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아야 하나?]
라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이신스가 어디 가 있어? 누가 누구를 데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