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내 동생하고도…… 했어?2020.09.13.
‘하이신스 이 미친놈.’
아니, 하이신스가 미친 거야 대신관이 미친 거야? 대신관은 왜 또 하이신스를 데려간 거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라틸은 빠른 걸음으로 하렘을 향해 걸어갔다. 데려간 사람이 클라인이면 형제끼리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다른 후궁이라면 다른 후궁대로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나 해볼 텐데. 하필 또 상대가 대신관이다보니 둘이서 뭘 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 폐하!”
하렘 안에 들어가자 마침 마주친 게스타가 웃으면서 다가왔지만, 라틸은 나중에 이야기하잔 말만 남기고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폐하…….”
게스타가 뒤에서 멍하니 라틸을 불렀지만, 라틸은 하이신스 그놈이 대신관과 둘이서 뭘 하는지 신경이 쓰여서 게스타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도련님. 폐하께서 그, 바쁘신 일이 있나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게스타의 멍한 표정을 본 시종이 걱정스럽게 달랬지만, 게스타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를 어쩌나.’
그걸 본 시종은 자기가 민망해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머리를 푹 숙였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가 지금 게스타를 보았다면 서늘한 눈동자를 보고서 깜짝 놀랐을 테니. 게스타는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린 채 시종을 불렀다.
“트리.”
“네, 도련님! 아, 도련님. 울지 마세요…….”
“저기. 폐하께서 저렇게 바쁘게 누굴 찾아가시는 건지 좀 따라가서 확인해 줄래?”
“네, 그러겠습니다!”
게스타가 울고 있다 오해한 트리는 황급히 라틸이 가버린 방향으로 뛰어갔다. 홀로 남게 되자 게스타는 천천히 눈가에서 손을 내리고 심호흡을 했다.
‘누구에게 가셨든…… 그 사람은 반드시 제 손으로 없애버릴 겁니다, 폐하. 다른 남자에게 보내려 구해드린 목숨이 아닙니다.’
* * * 자신이 길거리 돌멩이처럼 스쳐 지나온 게스타가 질투심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라틸은 대신관의 방으로 곧장 향했다. 빨리 하이신스를 찾아내서 카리센까지 뻥 던져버려야 한단 생각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랬는데 대신관 방에 없으면…….’
아냐, 그래도 대신관은 찾아가야 한다. 마지막 행적이 대신관과 함께 사라진 거니까.
“응? 폐하 아니십니까!”
다행히 하이신스는 대신관과 함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사이 좋은 모습으로…… 나란히 운동 중이었다.
“뭐 하는 거야?”
씩씩거리며 달려온 라틸이 문을 열자마자 발견한 의외의 광경에 황당해서 묻자, 대신관은 얼른 몸을 일으키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 이 친구가 카리센 사람인데, 근골이 아주 좋더라고요. 게다가 검술에도 재능이 있지 뭡니까.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듯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만! 라틸은 머리가 다 지끈거려서 대신관의 입을 턱 틀어 막아 버렸다. 눈치가 없어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 대신관은 진짜……. 라틸은 대신관의 입을 틀어 막은 채 하이신스를 째려보았다. 얘야 몰라서 이랬다 쳐도 너는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않아? 하지만 이미 하이신스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웃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우습겠지. 우스울 거다. 전 여자친구의 애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 앞에서 재롱을 떨어 댔는데 우습지 않을 리가.
“폐하?”
라틸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대신관이 뒤늦게 뭔가 이상한 걸 알아채고는 자신의 입을 막은 라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원래 라틸은 하이신스를 대신관의 방에서 발견하면 당장 끌고 나오려 했다. 인적 드문 곳에 가서 정강이라도 한 대 뻥 찬 다음, 장난하냐고 윽박지르고 다그치려 했다. 하지만 하이신스가 ‘네 애인 귀엽네?’ 하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자신을 보자, 라틸의 자존심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분노와 상한 자존심이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어떤 게 분노이고 어떤 게 상한 자존심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전 애인, 그것도 자신을 버리고 간 애인 앞에서는 가장 완벽하고 멋진 모습이어야 하지 않는가. 웃음으로 물든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라틸은 분노를 펑 날려 보내고서 대신관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폐하.”
끌려온 건 대신관의 입술이었다.
“!”
말랑한 감촉을 입 안에 가둔 채 대신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고서, 라틸은 그에게 분노로 점철된 키스를 퍼부었다. 하지만 시선은 하이신스에게 고정되었다.
이건 하이신스에게 알려주기 위한 키스였다. 네가 내 후궁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든 무시를 하든 속여먹든, 어쨌든 지금 내 후궁은 얘야. 네가 아니라. 만약 하이신스가 정말로 자신을 보고 싶단 마음만으로 여기에 왔다면…… 이번엔 그가 자존심이 상하겠지.
“폐하.”
태어나 처음 하는 입맞춤에 대신관이 숨을 헐떡거렸다. 제대로 숨 쉬는 법조차 모르는지 가슴이 빠르게 들썩였다. 그러면서도 대신관은 생전 처음 맛보는 감각에 뒤에 누군가 있단 것도 잊어버리고 라틸을 감싸 안았다. 라틸은 대신관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고, 단 한 사람도 탐하지 못했을 그의 뺨 위에 자신의 잇자국을 남기며 하이신스를 노려보았다. 효과가 아주 좋았다. 웃음으로 가득하던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으니. 그걸 보자 새카맣게 차올랐던 분노가 서서히 옅어졌다. 꼭 하이신스의 눈동자 같은 회색으로 변해갔다. 그제야 라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 * *
“대신관 님, 또 귀족들이 대신관님께 선물 보따리를…….”
라틸이 하이신스를 데리고 나간 뒤. 수행사제는 대신관에게 온 선물을 정리해 끙끙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가, 퉁퉁 부은 대신관의 입술을 보고는 “흐억!” 소리를 내면서 선물 꾸러미를 죄다 떨어트렸다. 그것도 모자라 엉덩방아를 찧은 수행사제는 입술을 달달 떨면서 손가락으로 대신관의 얼굴을 가리켰다.
“대, 대신관님, 대신관님 입술이……!”
대신관은 방 한 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다가 수행사제의 말을 듣자 자기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어, 어떤 자식이 우리 대신관님 입술을!”
그 모습을 본 수행사제는 거의 울 뻔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며 다닐 때에도 대신관으로서 몸과 마음에 조금의 세속도 묻히지 않으려 그렇게 애썼는데. 감히 어떤 자식이 대신관님의 입술을 저렇게 망가뜨렸단 말인가!
“누굽니까! 누가 대신관님을!”
“폐하가.”
울면서 외쳤던 수행사제는 대신관이 부끄러워하며 속삭이자,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관은 지금 후궁 신분이고 후궁의 주인은 라트라실 황제였다. 황제가 자기 애인을 찾아와 입을 맞추었다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대신관 본인이 저렇게 넋 나간 얼굴이지 않은가.
“키, 키스 하시면서 영혼이라도 빼앗기셨습니까?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대신관님. 대신관님 답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긴 뭔가 서러워서 수행사제는 괜히 목소리를 떨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서러울 게 없긴 한데, 그래도 그냥 좀 서러웠다. 늘 ‘운동!’ ‘근육!’만 외치던 대신관이 저렇게 색정적으로 변한 입술에 손을 올리고 멍하니 있자 뭔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대신관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그냥 조용히 웃고서 침대로 다가가 몸을 돌돌 말아 웅크렸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걸 보자 수행사제는 더욱 기가 막히고 화가 나 물었지만, 대신관은 사람 속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활짝 웃었다.
“아주 좋더라. 사람들이 왜 주둥이를 비벼대나 이해가 안 갔는데. 생각보다 더 좋더라.”
* * * 의도치 않게 수행사제에게 충격을 준 라틸은 자신이 발끈해서 저지른 짓을 후회하며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후궁들이야 평생 데리고 있을 이들이지만, 대신관은 위험이 사라지면 언젠가 보내야 할지도 모를 이인데. 충동적으로 키스를 해 버리다니…….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대신관이 아닌 다른 후궁이었어도 키스는 했겠지만, 어쨌든 대신관에게 키스를 하고 나자 건드려서는 안 될 성역에 입술 자국을 남기고 온 배덕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하이신스의 꽉 다물린 입술을 생각하면 통쾌한 마음이 드니, 대체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되어먹은 걸까. 얼마나 그렇게 걸어갔을까. 밤의 적막 사이에서 들려오는 건 새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 뿐이었는데. 그 사이로 하이신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난 너 말고 누구와도 입 맞춘 적 없어.”
라틸은 회랑을 빠르게 걸어가다가 우뚝 멈추어서서 확 돌아섰다. 비스듬하게 뒤쪽에서 따라오던 하이신스 역시 덩달아 멈추어서서 라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라틸은 하이신스의 표정이 아까는 분노뿐이었다면, 이번에는 슬픔으로 얼룩져 있단 걸 발견했다. 어쩌면 질투도 한 움큼 정도.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게 진실인진 모르겠으나, 보고 싶었단 마음은 진실인 듯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라틸은 빙그레 웃으면서 거만하게 말했다.
“그래? 난 많은데. 후궁이 여섯 명이나 되거든.”
“!”
하이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본 라틸은 더욱 통쾌해져서 삐딱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왜 충격 받은 척이야. 너도 후궁 많잖아. 즐겁게 살아. 너 그런다고 나 안 돌아가. 너 혼자서 순정 지킨다고 남는 거 하나도 없다? 넌 결혼도 했잖아.”
말을 하고 나니 ‘내가 구질구질하게 이런 말은 왜 한 걸까’ 잠시 후회가 되었지만, 라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어쨌든 오늘 하이신스에게 왜 여기에 온 건지 묻는 건 글렀다. 이런 상태로는 하이신스도 자신도 서로 침착하게 말을 나눌 수가 없었다.
“다른 놈들은 상관 없어. 하지만 하나만 묻자.”
그러나 뒤에서 들려온 하이신스의 목소리가 라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목소리가 너무 애처롭게 들려서. 그리고 이 목소리…….
-헤움 황자님께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전하.
-부황께서는? 아버님은 어쩌고?
하이신스가 유학 와 있던 시절, 헤움의 반란을 알리는 급사가 왔을 때. 그에게 선황의 부고를 묻던 하이신스의 목소리가 꼭 이래서. 라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이신스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채 눈물 고인 눈으로 라틸을 보고 있었다.
“내 동생하고도…… 했어?”
“!”
“내 동생하고도…… 입 맞췄어?”
* * *
“소단주님. 그러다 들키십니다.”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채 어딘가를 빤히 쳐다보는 타시르를 보다 히얼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넋 놓고 보십니까?”
그러나 타시르는 대답 대신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고서 어딘가를 뚫어져라 계속 보기만 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타시르는 나무에서 내려와서는 “어이쿠.” 하는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어마어마한 광경을 봤다, 내가.”
“뭘 보셨든 제가 본 것만 못할 걸요.”
“네가 뭘 봤는데?”
“나무 위에 걸린 소단주 엉덩이요!”
히얼란이 이를 갈며 말하자 타시르는 낄낄 웃으면서 수하의 등을 두드렸다.
“농담 아니고. 내가 뭘 봤는지 들으면 너 진짜 놀랄걸?”
“뭔데요. 폐하께서 일곱 번째 후궁이라도 들이신답니까.”
“하이신스 황제.”
히얼란은 툴툴거리면서 제발 좀 체통 좀 지켜달라 잔소리를 퍼붓다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누구요?”
“하이신스 황제. 거리가 멀어서 대화는 안 들렸지만, 분위기가 딱 그래.”
히얼란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한껏 죽여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비공식적으로 온 건가요?”
“전에 하이신스 황제랑 우리 폐하가 사귀었잖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소단주는 그렇게 추측하셨죠.”
“헤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좀 감정이 질척질척 한가 봐.”
히얼란은 놀란 표정으로 토끼눈을 떴다.
“아니, 그러면 큰일 아닙니까?”
“큰일일 게 뭐가 있어. 지금 두 사람 감정이 어떻든, 하이신스 황제는 이미 결혼해서 황후까지 봤는데. 그러면 끝난 거지.”
히얼란은 다시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아까보다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서 속삭였다.
“그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단주님. 요즘 카리센 쪽으로 이상한 소문이 많이 돌고 있대요.”
“이상한 소문? 아. 하이신스 황제가 이혼할 거라던가 그 소문?”
타시르는 그 소문은 자신도 들었지만 별거 아니란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진행된 건 없잖아. 아이니 황후나 그 집안이 뭐 이렇다 할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뒤에선 뭔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앞으로는.”
“아니요, 그 오래된 소식 말고, 방금 막 들어온 뜨끈뜨끈한 소식입니다.”
히얼란은 앙제스 상단 내에서도 손꼽히는 정보통이어서, 상단의 정보원들 중에서도 유독 정보를 습득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이따금은 흑림보다 더 정보가 빠를 때도 있는 부하이다 보니, 타시르는 무시하는 대신 얼른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소식인데?”
“아이니 황후요. 미쳤단 얘기가 있던데요?”
“뭐? 무슨 소리야? 멀쩡한 사람이 왜?”
“유령이 보인다, 귀신이 보인다, 죽은 황자가 친구를 잡아먹었다, 뭐 그런 얘길 하면서 지금 난리를 부리고 있답니다. 아마 그것도 며칠 전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