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전연인은 어떻게 해야 완전히 잊을 수 있나2020.10.18.
아니, 여기서 네가 나타나면 안 되지. 그러면 라나문을 찾아갔다가 혐오한단 눈빛만 잔뜩 받고 온 내가 뭐가 되냐고. 라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여기서 하이신스에게 또 휩쓸릴 수는 없었다. 그가 개소리를 뱉으면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내내 머릿속에서 왈왈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 텐데. 그러면 이쪽 손해 아닌가.
‘무시하자.’
단호하게 마음먹고서 라틸은 확 돌아서서 회랑을 마저 걸어갔다. 침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이신스 역시 라틸을 붙잡지 않았다.
“폐하, 벌써 돌아오셨어요?”
응접실에 모여 놀던 시녀들 역시 라틸을 보자 라나문의 시종처럼 놀라 벌떡 일어났다. 라틸이 하렘으로 갔단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에, 다들 오늘밤엔 라틸이 그곳에서 자고 올 거라 여겨 당황한 눈치들이었다.
“목욕물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쩌지요?”
시녀인 애런델이 쩔쩔매며 묻자, 라틸은 괜찮다 웅얼거리고서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다들 쉬어.”
라틸은 평소보다 괜히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옷을 다 벗어버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틀자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평소라면 하녀들이 미리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욕조 안에 채워 넣었겠지만, 오늘은 목욕물이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태라 따뜻한 물도 욕조에 띄울 꽃잎도 부드러운 거품도 없었다. 라틸은 최대한 느릿하게 차가운 물로 얼굴만 찰박찰박 적시면서 세수를 했다. 다 씻은 후 밖으로 나와서도 라틸은 침대에 눕는 대신 며칠 전에 읽다 덮어둔 책을 들고서 안락의자에 앉았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글자를 그렇게 꾸역꾸역 얼마나 읽어댔을까. 마침내 라틸은 더 참지 못하고서 책을 덮어 의자에 내려놓고 창가로 달려갔다. 커튼을 슬쩍 옆으로 들추고서 그 사이로 얼굴만 내민 라틸은 아까 하이신스가 서 있던 장소를 황급히 찾았다.
“…….”
하지만 하이신스는 보이지 않았다. 라틸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보이지 않겠지. 그럼 뭐야. 그놈이 저기에 몇 시간씩 서서 기다리기라도 해야 했나? 라틸은 커튼을 놓고 침대로 걸어가다가, 다시 몸을 돌려 창가로 돌아가 아예 커튼을 한겹 더 내려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커튼 줄까지 열리지 않도록 꽁꽁 묶은 라틸은 침대로 돌아오자마자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냥 끝까지 참을걸. 결국 견디지 못하고서 커튼을 들춰본 자신이 미련하고 멍청하게 여겨졌다. 앞에서 같이 잘 싸워대면 뭐해. 뒤에서 이러는데. 이불 안에 파묻혀 있자 나중에는 숨이 갑갑해졌다. 라틸은 이불을 반쯤 내리고서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아무도 누워 있지 않는 옆자리. 손을 뻗어 더듬더듬 만져보자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만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하이신스 그놈은 날 잠깐 보고 바로 가버렸는데. 왜 흔적은 계속 내 옆에 따라붙어 있을까.’
한참 멍하니 옆자리를 더듬다가 라틸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물었다.
“언제 떠날래?”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라틸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어머니든 아버지든 오빠든 이럴 때 한 사람이라도 가족이 곁에 있더라면. 그러면 좀 나았을까. * * *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진다. 새까만 밤 아래 새까매진 창문. 이젠 거기에 창문이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 희미한 빛에 창틀이 조금씩 빛날 뿐.
‘잘 자, 라틸.’
하이신스는 몸을 돌려 손님용 궁전으로 돌아갔다. 걷는 내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서, 발걸음은 점점 더 속도가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하는데. 뭐 하러 여기 온 건지. 오히려 그녀의 화만 돋운 듯하지 않는가.
“폐하.”
그런데 하이신스가 자신이 머무는 방 앞으로 가보니, 근위대장이 그 앞에 초조하게 서있었다. 이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된단 잔소리를 하려는 것치곤 표정이 다급했다.
“들어와.”
무슨 일이 있구나. 하이신스는 대번에 판단을 내리고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근위대장은 얼른 따라 들어와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황후 폐하께서 지금 상태가 안 좋으시답니다.”
“황후? 아이니?”
“예.”
하이신스는 얼굴을 갑갑하게 가려두었던 모자 달린 망토를 벗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건강했잖나?”
아이니는 그의 정적이었기에, 오히려 하이신스는 평범한 정략 결혼 상대 이상으로 그녀의 신상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신스가 알기로 아이니는 몹시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다니? 근위대장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몸이 아픈 건 아니랍니다.”
“?”
“헤움 황자가 돌아왔다면서 횡설수설한다 합니다.”
하이신스는 헤움의 이름을 듣자 어이가 없어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짓을 하라고 자리를 비워준 게 아닌데.”
“일부러 미친 척하는 걸까요? 일단 다가 공작은 머리에 열이 심하게 올라와 잠시 헛소리를 하는 거라 주장하고 있답니다.”
다가 공작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반역을 일으킨 황자가 돌아왔단 이야기를, 그 황자와 한때 연인이었던 황후가 말하는 건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일이니. 미치지 않았더라도 미쳤다 주장해야겠지. 그러나 하이신스는 별 반응 없이 겉옷만 마저 벗었다. 하지만 망토를 고정해 둔 끈을 푸는 손길은 점점 느려졌다. 생각에 잠긴 탓이었다. 근위대장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끈이 풀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하이신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니가 미친 척해서 얻을 이득도 없고, 헤움 이야기를 직접 꺼내 얻을 효과도 없지.”
“그렇지요. 안 그래도 지금 아이니 황후가 황자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그 일을 잊었던 사람들까지 다 옛날 일에 대해 떠든다니까요. 황후가 옛 연인이 그리워 미쳤단 사람도 있습니다.”
다가 공작은 야심이 크지만 지금 당장 하이신스에게 반기를 들 정도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하이신스를 내치려 할 때가 있다면, 아마 그때는 아이니 황후가 황족을 임신했을 때일 터.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군.”
“꿍꿍이가 있겠지요?”
“아니, 아이니가 횡설수설한단 내용.”
“믿으십니까?”
“적이 하는 말이라 더 그럴듯한 말도 있지.”
하이신스는 벗은 망토를 근위대장에게 건네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별빛도 달빛도 유달리 약한 밤은 평소보다 훨씬 어둡게 여겨졌다.
“난 먼저 돌아가 봐야겠다.”
* * *
‘하이신스를 욕하다 잠들어서 악몽을 꾸나.’
라틸은 어두컴컴한 성 안을 두리번거리며 혀를 찼다. 지금까지 본 모든 성을 통틀어서 이렇게 음산한 성은 처음이었다. 아낙차 후궁을 유폐해 둔 곳 이상으로 어두침침한데다 공기도 습하다.
‘지하인가?’
복도만 보아도 이곳이 제법 커다란 성이란 걸 알 수 있겠는데, 희한하게도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지하 같아.’
찬공기가 코끝을 스치자 괜히 소름이 돋아서, 라틸은 제 두 팔로 몸을 감싸고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꿈 한 번 실감 넘치네.’
그래도 꿈은 꿈인지 아무리 걸어도 복도 외엔 나오는 곳이 없다. 어쩌면 성이 아니라 미로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즈음. 누군가 라틸을 덥석 붙잡았다.
“!”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자 그곳에는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가 라틸의 팔을 잡은 것이다. 라틸이 쳐다보자 남자는 손을 떼더니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여우 가면이 무어라 말하기 전. 복도 저편 아래쪽에서 구두 굽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와 두런두런한 말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쪽에 계단이 있고, 그 아래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올라오는 듯했다. 라틸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곳은 복도뿐으로 몸을 숨길 공간이 없었다.
‘아니, 여우 가면한테 이미 들켰잖아. 숨고 뭐고 할 것도 없어.’
그때 여우 가면이 자신의 윗옷을 벗더니 그걸 라틸의 머리 위로 덮어주었다. 뭐야? 라틸이 놀라 쳐다보자, 여우 가면이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부근에 가져다댔다. 쉿. 조용히 하란 뜻이었다. 정황상 지금 다가오는 발소리들로부터 라틸을 지켜주려는 듯한데……. 라틸은 황당해졌다. 아니, 이거 윗옷 뒤집어쓰고 입 좀 다문다고 사람 모습이 안 보일 리가 없잖아? 저놈 혹시 동물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진짜 동물인가? 동물들은 제 눈을 가린 다음 자기가 몸을 숨겼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그런데…….
‘진짜 안 보이나?’
계단을 다 올라온 이들은 정말로 라틸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라틸뿐만이 아니라 여우 가면 쪽으로도.
‘흑마법? 같은 건가?’
그러나 나타난 이들을 보는 순간. 라틸은 더욱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무리 중 가장 앞에 선 사람. 자신이 직접 처형하라 명령한 틀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틀라의 뒤를 따르는 건 각기 다른 동물 가면을 뒤집어쓴 수상쩍은 이들…… 가면을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낸 건 틀라뿐이다.
‘진짜 살아 있어?’
놀란 라틸이 뒷걸음질을 치자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바닥에 잔잔한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라틸이 걷어찬 듯했다. 그 순간. 걸어가던 틀라가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무슨 소리 난 것 같지 않아?”
라틸은 자신의 입을 막고서 틀라를 쳐다보았다. 왼쪽을 살피는가 싶던 틀라가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 눈길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다행히 틀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라틸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고보니 여우는? 또 어딜 가서 보이지 않는 거지?”
“그놈은 늘 바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안심하자마자 라틸은 다시 어깨를 바짝 세웠다. 틀라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대답해준 토끼 가면이 힐긋 이쪽을 쳐다보아서. 그러나 토끼 가면은 굳이 아는 척하는 대신 도로 정면을 보며 틀라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으니 잘된 일이지요.”
“어머니가 탑에 갇혀 있다. 내 동생은 성격이 더러우니 분명 내 어머니를 학대하고 있을 거야. 구출해야 해.”
쭉 걸어간 틀라와 일행이 완전히 사라졌다. 말소리로 가득했던 공간에 다시 어두운 침묵이 내려앉자, 여우 가면이 라틸의 머리에서 자신의 윗옷을 치우며 말했다.
“아직 오실 때가 아닙니다.”
‘아직?’
라틸은 그의 묘한 말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여우 가면은 더 설명하는 대신 제안했다.
“궁전에 바래다 드리지요. 저를 잘 잡고…….”
그러나 여우 가면이 말을 마치기 전. 라틸은 그의 가면을 잡고 확 벗겨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은……. * * *
“너!”
놀란 라틸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면서 게스타의 턱을 쥐다가, 당황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황급히 손을 내렸다.
“아. 미안.”
게스타는 몹시 놀란 표정으로 라틸을 멍하니 보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폐하? 괜……찮으세요?”
라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그 복도도 아니었다. 잘 정돈된 정원과 그 주위로 별처럼 내려앉은 조명들……. 하렘 내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 안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
라틸이 묻자 게스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산책하고 있었는데, 폐하께서 여기에 누워 계셔서…….”
라틸은 문득 게스타가 그 여우 가면이고, 자신과 그 성에 있던 건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게스타는 여우 가면과 옷차림이 아예 달랐지만, 딱 가면을 벗기자마자 이 상황이다 보니 좀 의심스러웠다.
“저기, 게스타.”
“네, 폐하.”
그러나 라틸이 그에 관련한 질문을 하려는 순간.
“폐하께선?”
멀지 않은 곳에서 칼라인의 목소리와 풀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폐하께선 아직 못 깨어나셨나?”
잠시 뒤 나타난 건 칼라인이었다. 궁의를 데려온 칼라인.
“폐하.”
라틸을 본 칼라인이 안심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라틸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여기에 왜 있어?”
라틸이 묻자, 칼라인은 게스타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라틸이 고개를 젓자, 칼라인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발견했을 땐 폐하는 이미 여기에 누워 계셨습니다.”
“저희? 너랑 게스타가 날 같이 발견한 거야?”
“예.”
궁의는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입을 다물고 라틸과 칼라인, 게스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라틸은 인상을 구기고 흘러내려 오는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다 넘겼다. 그럼 정말로 내가 그 검은 성에 있다가 여기 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여기 누워 있던 건가? 몽유병 뭐 그런 거?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틀라라던가 여우 가면. 그 둘을 만난 것도 꿈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