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만 찾아왔으면 좋겠어요2020.12.27.
“근위기사단장 서넛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폐하께 해를 입히려 했다. 다행히 레안 황자님께서 미리 알아차리고 막아냈으나, 일을 그르치자 바로 달아나 지금은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누구든 그자를 잡아 생포해 오면 큰 상을 내리리라.”
단 두 사람뿐인 방 안에 느릿한 목소리가 울렸다. 심드렁한 어조에, 레안은 책상에 앉아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체 실종 사건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셰이트가 흔들의자에 앉아 공표문을 연설을 앞둔 사람처럼 치켜들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레안이 묻자 셰이트는 공문을 내려놓았다.
“서넛은 네 친구이기도 하고, 라틸에겐 누구보다 충직한 기사인데. 이렇게 발표했다가 나중에 라틸이 로드가 아니면 어쩌려고?”
“이미 발표한 걸 어쩌겠어요.”
셰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틸이 널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는데. 그땐 나도 못 말려.”
공문을 구기는 소리가 바스락 울렸다. 레안은 잉크병에 펜을 담갔다.
“라틸이 로드가 아니란 게 밝혀지면 오해였다고 재발표하면 될 일이에요.”
“그런다고 서넛의 오해가 완전히 풀릴까? 서넛은 널 용서할 것 같고? 라틸은?”
셰이트는, 레안이 잉크병에 펜을 너무 오래 담그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걸 눈치챌 즈음. 레안은 이미 펜을 꺼내 아무렇지 않은 척 공문에 사인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악역을 해야죠.”
* * *
“아버지가 가짜가 가짜란 걸 모르는 척하면서 더 가깝게 지내라 했다고?”
게스타는 트리로부터 아버지의 지시를 전달받고 이해가 가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이 일에 나서지 않을 생각이래?”
트리가 얼른 로르드 재상을 편들었다.
“설마요. 아트락시 공작님과 손을 잡고서 이 일을 해결하실 거라던데요.”
“어떻게?”
“거기까지 자세히 말씀하시진 않으셨어요.”
“그래…….”
“제 생각엔, 가짜가 자기 정체가 발각된 걸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하면 안 되니까 이런 지시를 하신 것 같아요.”
게스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위험할까 봐 그러시는 건 아닐까?”
“물론 그 원인도 있겠지만요.”
트리는 순순히 인정하고서 게스타의 눈치를 살폈다.
“재상님 말 들으실 거죠, 도련님?”
게스타는 웬일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색은 안 할게.”
트리는 안심했다. 혹시라도 게스타가 가짜 황제를 대놓고 멀리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염려되었는데. 재상이 딱 적당하게 충고를 해주었으니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트리.”
“네, 도련님.”
“아버지 뜻대로 할 테니까 다른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줘.”
“부탁이라니요?”
곰곰이 생각하던 게스타는 설명하는 대신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편지지와 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펜에 가늘게 잉크를 묻혀서 빠르게 편지를 쓴 후, 트리가 내용을 읽기도 전에 그걸 봉투에 낳고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했다. 밀랍을 후 후 불어서 즉석에서 말리기까지 하더니, 거기에 주소까지 적고서야 게스타는 트리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트리는 얼결에 편지 봉투를 받다가 봉투에 적힌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기엔 편지를 왜 보내시는 거예요, 도련님?”
* * * 같은 시각. 같은 처지이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은 것도, 아버지의 명을 따르기로 한 것도 같지만, 라나문의 방향은 게스타와 전혀 달라졌다.
“혹시라도 폐하가 내 방에 찾아오면 몸이 좋지 않다고 돌아가 달라 청해라.”
라나문의 지시에 카르둔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진짜 폐하건 가짜 폐하건 어차피 하렘엔 잘 오시지도 않는데요 뭘.”
라나문이 서늘한 시선을 던지자 카르둔은 의욕 없이 말을 바꾸었다.
“그래도 오시면 들어오지 말라고 하겠습니다.”
라나문은 어제 태우고 남은 편지 조각이 가장자리가 까맣게 변해 카펫 끄트머리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자, 그걸 주워서 손톱 끝으로 잘게 찢었다. 카르둔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일까요? 정말로 지금 폐하가 가짜일까요?”
“내가 알겠나. 난 폐하를 먼발치서도 보질 못했는데.”
“아…….”
카르둔이 동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자, 라나문은 그게 기분이 나빠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세상일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딱 그 말을 나누자마자 정말로 그날 저녁에 황제가 그를 찾아왔다.
“어, 어떡하죠? 정말로 아프다고 해요? 정말로?”
미리 말을 나눴지만 막상 황제를 거부하기 쉽지 않은지, 카르둔은 발을 구르면서 라나문에게 재차 물었다.
“아프다고 해. 속이 메슥거리고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근육통까지 다 왔다고.”
그래도 겁이 나는지 카르둔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복도로 나갔다. * * *
“갑자기 용병왕은 사랑의 도피를 해버리고, 게스타 님은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 라나문 님은 아프다고 드러누워 폐하를 피하고. 이 타시르와 대신관에겐 발길을 뚝 끊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산책하겠다며 잘 걸어 다니던 타시르가 갑자기 이상한 낙서 앞에서 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자, 시종 히얼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단주님, 혼자 벽 보면서 중얼거리고 그러시면 옆 사람 무서워요. 그리고 클라인 님 얘긴 왜 빼세요. 그분은 없는 취급입니까?”
히얼란은 이 낙서가 흑림의 비밀 표식인 걸 알지 못하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시르에겐 이 낙서가 ‘암시장, 가자미, 아이스 타시르에 슈크림’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 단어를 조합할 수 있는 사람은…… 진짜 황제 하나뿐.
“아니, 어쩌다 이리되셨나 모르겠네.”
타시르가 중얼거리자 히얼란이 똑같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요. 어쩌다 이러고 계신 건지 모르겠네요.”
황제와 좀 잘 어울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황제는 타시르에겐 발길을 끊고 게스타를 불러서 산책하거나 식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밤에 찾진 않지만, 이 정도면 총애의 판도가 바뀌었다고 할 만했다. 그런데 소단주는 머리 쓸 생각은 않고 태연하게 벽 보면서 쓸데없는 말이나 중얼거리자 히얼란은 속이 갑갑했다. 타시르는 히얼란의 그런 속내가 훤히 보여서 비실비실 웃고 등을 두드렸다.
“위기는 기회지. 내 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회는 왔다.”
“무슨 소리세요?”
“지금 황제가 가짜란 소리.”
폭탄 발언을 던져놓은 타시르가 휙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자, 히얼란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엄청난 말이라서 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타시르가 저만치 앞서간 후에야 히얼란은 펄쩍 뛰었다. 그는 황급히 타시르의 옆으로 달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진짜예요?”
“어. 카리센 수도에 계시다네.”
“그걸 저 낙서를 보고 알아차리셨다고요? 아니, 근데 지금 어디 가세요? 여긴 소단주님 처소로 가는 길이 아닌데요?”
지금 황제가 정말로 가짜라면 당장 상단주에게 알린 다음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나? 상단에서 똑똑하단 사람들을 죄라 불러 모은 다음 대비를 세워야 할 텐데. 이 와중에 타시르가 가는 곳은…….
“왜 라나문 님 방으로 가세요?”
라나문의 방이었다.
“히얼란.”
“네, 소단주.”
“대신관도 데려와.”
“예?”
* * * 대신관을 불러서 라나문의 방에 간 히얼란은 왜 타시르가 두 사람을 불러오라 한 건지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황제 폐하는 가짜입니다. 그리고 내 생각엔 우리 라나문 님과 대신관 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진실을 아는 사람들끼리 뭔 수를 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두 분과 얘기를 좀 나눠보려 합니다.”
타시르가, 라나문이 황제를 갑자기 멀리한단 이야기를 떠올리고서 그 역시 진실을 알고서 저러는 거라 짐작한 듯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걸 이렇게 다짜고짜 진행한다고? 라나문 님이 진짜로 아파서 폐하를 멀리하는 건지 가짜란 걸 알고서 멀리하는 건지 어떻게 확신하고서? 히얼란은 소단주의 엄청난 추진력에 감탄 반 당황 반 심정으로 라나문을 곁눈질했다. 몹시 다행스럽게도 라나문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타시르의 말이 진짜인 것 같았다. 그, 그럼 대신관도 이미 알고 있던 건가? 놀라서 대신관을 본 히얼란은 대신관의 표정이 자신과 거의 흡사하단 걸 발견했다. 대신관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란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히얼란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저쪽은 모르고 있었구나.’
하긴. 대신관에 대해서는 달리 도는 소문도 없었지. 그럼 소단주님은 왜 굳이 대신관까지 데려오라 하신 거야? 대신관이 이 일을 모르고 있던 거라면, 라나문이야 그렇다 쳐도 대신관까지 이 판에 끼우는 건 위험하지 않나? 소단주의 의도가 이해가 가지 않아 히얼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이 타시르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태연히 손깍지를 끼고 있었다. 곧 원형 탁자를 둘러싸고 세 남자가 서로를 마주하고 앉았다. 히얼란은 소단주가 뭔 말을 하려나 싶어서 걱정스럽게 타시르를 쳐다보았다. 히얼란과 같은 걱정을 한 건지, 라나문도 차갑게 물었다.
“혹시 그쪽은 폐하의 위치를 알고 있나? 그래서 날 찾아온 건가?”
타시르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설마요. 거기까진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온 거짓말. 아까 카리센 수도 얘기를 안 들었다면 히얼란도 진실이라 생각할 정도로 태연한 거짓말이다. 히얼란은 더욱 이해할 수 없어졌다. 아니, 저러는 걸 보면 솔직하게 터놓고서 일을 해결하려는 것도 아니신 듯한데. 도대체 소단주님은 대신관과 라나문을 데려다가 뭘 하려는 거야? * * * 칼라인에게 모르는 사람이란 대답을 코앞에서 대놓고 들었으면서 아이니는 또다시 그를 찾아왔다. 라틸은 이쯤 되니 아이니가 칼라인에게 반해서 억지를 쓰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대는 혹시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이번에 와서는 더 이상한 질문을 한다. 칼라인이 불쾌한 표정을 짓자 아이니는 다시 아픈 표정으로 돌아섰으나, 라틸은 이번에는 그녀가 가엾단 생각보다 좀 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는데 왜 자꾸 저러는 거야?’
결국, 라틸은 칼라인에게 다른 걸 시켜 놓고서 자신은 밖으로 나간 아이니를 따라갔다.
“황후 폐하. 실례합니다.”
라틸이 뒤에서 부르자,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아이니가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지?”
객관적으로는 사이가 좋기 어려운 관계이지만, 그래도 라틸은 아이니를 좋게 보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라틸은 아이니가 칼라인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져대는 걸 내내 모른 척해주었다. 하지만 아이니가 계속 저렇게 나오면 아이니 본인의 평판도 평판이지만 칼라인에게도 폐가 된다. 아이니야 자기가 남들 이목을 신경 안 쓰고 칼라인에게 말을 걸었으니 거기에 대한 평판도 자기가 감수하면 그뿐이라지만, 칼라인은 황후가 말을 거니 억지로 대답할 뿐인데 같이 평판이 떨어지면 너무하지 않나.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부디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라틸의 말에 아이니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욱해서 왔지만, 막상 대놓고 말하려니 좀 미안한 느낌에 라틸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자신이 딱 잘라서 선을 그어주지 않으면 아이니와 칼라인 둘 다 헛소문에 휘말릴 터. 라틸은 마음을 딱 잡고서 부탁했다.
“너무 자주 찾아오시는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칼라인이 불편해하니 달리 볼일이 없으시다면 이젠 안 찾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